JTBC는 기자윤리를 위반했는가?

조회수 2017. 1. 6. 23: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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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는 기자윤리를 위반했는가?’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가장 뜨거웠던 토론 거리 중 하나다. 발단은 이렇다. 정유라의 체포 과정을 보도한 JTBC 취재진이 정유라를 현지 경찰에 신고했는데, 이것이 사건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기자의 원칙을 깬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대상 글은 JTBC 기자가 정유라를 “시민으로서 신고하기로 했다면 보도를 포기해야 했”으며, “보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신고하지 않고) 관찰자로 남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언명령이 아니다 

나는 대상 글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사건을 취재하던 JTBC 취재진이 정유라를 현지 경찰에 직접 신고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방송인 겸 작가 유시민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한다. “보도윤리 위반 아닙니까?” “취재 중에 신고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기자는 관찰자에 그쳐야 한다”는 보도윤리를 위반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너무 우악스럽게 적용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 저 보도윤리는 ‘정언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JTBC는 정말 이 원칙을 위배했는가, 그렇다면 왜 위배했는가 등을 착실히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기자는 왜 관찰자에 그쳐야 하는가?’

기자는 ‘왜’ 관찰자에 머물러야 하는가? 

만일 기자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는 일이 잦아지면, 단순한 개입에 그치지 않고 사건을 만들고 연출하여 이를 보도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유라를 신고한 것 자체가 사건을 만들고 연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디어오늘의 글은 야생의 생태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지를 쳐낸다거나, 새의 다리를 본드로 붙인다거나, 불쌍하다는 이유로 사슴을 구해준다거나 해선 안 되지 않느냐고 묻지만, 사실 이것은 기자가 아니라 어떤 직업인이든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보도윤리나 관찰자 – 개입자의 딜레마 같은 얘길 꺼내기도 전에 일단 그냥 생태계 파괴니까.

사실 정반대로, 기자고 뭐고 국정농단 사태의 주요 연루자로서 정유라를 신고하는 것이야말로 당장 공익에 부합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JTBC 취재진이 정유라를 신고하지 말아야 했다면, 이를 통해 추구할 수 있는 또 다른 공익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 공익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이것이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긴 한데, 정유라를 신고한다 해서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가? 만일 기자가 자신이 정유라를 신고했음을 밝히지 않고 정의의 턱시도 가면이 나타나 장미를 던져 정유라를 잡았다고 보도했다면 모르겠지만. 일손이 부족한 재난지역에 간 기자가 구호에 참여한 뒤 구호가 잘 이루어졌다고만 보도하면 사실이 왜곡된 것이겠지만, 일손이 부족해 기자도 함께 구호활동에 참여해야 했다고 보도한다면, 이 경우 사실은 왜곡된 것일까?

사실 이 또한 중요한 부분인데, 정유라를 신고한다고 해서 없던 편견이 생길 상황인지도 모호하다. 정치적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때에도 기자의 사건 개입이 꼭 편견을 강화한다 볼 수 있을지 역시 확정하기 어렵다. 편견에서 벗어난다며 기계적으로 보도하는 것이(옴니아가 좋다는 삼성의 견해와 아이폰이 좋다는 애플의 견해를 동등하게 인용 보도한다거나) 반드시 중립적일 수 있는가, 같은 이슈와도 맞닿은 면이 있다.

자연스럽게 기자의 참여를 강조한 ‘곤조 저널리즘’의 헌터 톰슨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저널리스트와 사건과의 엄격한 분리, 취재원과의 객관적인 거리를 강조한 주류 저널리즘의 방법론을 톰슨은 깡그리 무시했다. 톰슨은 저널리스트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고, 취재원과 ‘함께 뒹구는’ 취재 방식을 스스로 실천했다. 들풀(deulpul)의 글을 인용해 보자.

흔히 저널리즘의 생명은 사실 (fact) 보도에 있으며, 저널리스트의 소명은 사실에 대한 영원한 헌신과 추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취재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됩니다. 그러나 곤조 저널리즘은 이같은 주류 취재 태도의 덕목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립니다. 취재 대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보도하기 위해서는 직접 취재 대상이 되어 함께 부대끼며 생활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범법을 저지르게 되어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참여 관찰 (participant observation) 의 극단적 강조라고나 할 이 말을 처음 만들고 스스로를 곤조 저널리스트라고 이름 붙인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헌터 S 톰슨 (Hunter S. Thompson, 67, 위 사진)이 어제 (2월 20일) 콜로라도의 자기 집에서 권총 자살로 숨졌습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대표작은 1971년에 발표한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공포와 혐오] (Fear and Loathing in Las Vegas)입니다. 여기서 톰슨은 스스로 마약과 술에 찌든 괴팍한 주인공이 되어 기존 권위에 도전하며 미국의 문화와 현실을 신랄하게 비꼬았습니다. 기성 언론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객관주의를 헌신짝 버리듯 던져버리고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어서 써낸 매우 반항적인 스타일의 기사는 급속히 독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독자들은 톰슨의 기사를 통해, 기존의 객관적인 기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힘과 재미를 맛보았습니다.

또 떠오르는 건 이것이다.

민감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의 경우, 예를 들어 독재 타도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 노조 운동, 내부고발 등에 관련된 인사의 경우 취재원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하는 것이 곧 사회의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다. 물론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을 신고해버리는 건 직업윤리 위반이기도 할 테고, 언론으로서도 향후 취재를 위해 지양해야 할 일일 터다. 하지만 정유라는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정유라가 JTBC의 취재원으로서 인터뷰를 승낙했는데 JTBC가 신고해버린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어떤 가치를 위한 ‘방법론’인가

“기자는 관찰자에 그쳐야 한다”는 주류 저널리즘의 보도윤리는 그 자체로 옳거나 바람직한 도덕 법칙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 혹은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물론 여전히 주류 저널리즘은 객관성, 불편부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냉정한 관찰자로서의 기자를 모범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방법론 자체를 맹신하거나 절대적인 진리로, 도그마로 주장해선 곤란하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라는 더 큰 질문을 망각하게 한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건 그 방법을 따름으로써 어떤 가치, 어떤 목적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취재원을 지켜야 한다” 같은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더 높은 가치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지킴으로써, 나아가 어떻게 공공의 선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기자는 관찰자에 그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근간에는 ‘그로써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쌍’으로 함께 계속해서 질문되어야 한다. 그 가치란 기자뿐 아니라 누구나 추구하고 또한 공감할 그런 가치여야 하리라. 그렇다면 이 사안에서도 우리는 다시 제대로 질문해야 한다.

JTBC는 정유라를 신고함으로써, 어떤 가치를 지키고 어떤 가치를 훼손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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