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향응 장소로 전락했던 휴머니즘 건축의 전범

조회수 2017. 9. 23. 1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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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풍운의 역사가 깃든 조선 제2궁궐 '창덕궁'

계춘(季春)의 궁궐. 빈 집, 빈 뜰을 가득 채운 따사로운 햇살이 오히려 처연하다. 인정전(仁政殿) 지나 희정당(熙政堂) 뒤 대조전(大造殿). 그 무량각 지붕 너머로 파릇파릇 새순을 토해내는 수목들이 호흡하는 봄기운을 타고 ‘창덕궁(昌德宮) 전하’ 순종의 간절한 유언이 맴돌아 흐른다. 

나는 종사의 죄인이며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목숨 꺼지지 않는 한 잊을 수 없다. 노력하고 광복하라, 광복하라.
순종

조선 제2궁궐로 창건

창덕궁은 조선 왕실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됐다. 그 배경에는 개국 초기의 골육상쟁, 즉 제1·2차 왕자의 난이 숨어 있다. 태조 7년 8월, 군사를 일으켜 경복궁(景福宮)을 공격한 다섯째 왕자 방원은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 형제를 살해했다. 더불어 세자를 감싸던 개국 공신 정도전과 남은 일파도 제거하면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한다. 자식들의 흉변에 분노한 태조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 정종은 곧 옛 도읍 개성으로 천도했으며 그 재위 2년에는 방간·방원 친형제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방간이 동생 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때 방간을 제압한 방원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이가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이다.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된 태종 재위 4년, 조정에서는 한성으로의 환도 논의가 시작됐다. 태상왕 이성계의 한성에 대한 애착이 크게 작용했다. 

창덕궁 인정전

태종은 한성 천도를 명하면서 자신이 입거시조(入居視朝)할 궁궐을 새로 짓도록 했다. 성석린·조준 등 중신들이 경복궁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태종은 응봉 자락 향교동을 이궁 터로 확정했다.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속내가 짐작된다.


그해 10월 시작한 이궁 영건 공사는 이듬해인 1405년 10월에 완공해 태종은 새 궁궐이 완공되기 열흘 남짓 앞서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경복궁으로 들지 않았다. 연화방 조준의 집에 거처하면서 이궁의 완성을 기다렸던 것이다. 경복궁이 자신의 손으로 동생들을 죽여야 했던 바로 그 현장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마침내 10월 스무날 태종이 새 궁궐에 입어하니 온 도성이 경축의 염원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새 궁궐은 창덕궁으로 명명됐다.

임란 이후 정궁으로
풍운의 역사를 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입지해 동궐(東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창덕궁은 창건 당시 외전 74칸, 내전 118칸의 작은 규모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에 기록된 주요 전각은 정침청·동서 침전·서별실·동루·상고·수라간·사옹방·탕자세수간·편전·보평청·정전·승정원청 등이다. 


창덕궁에 주로 거처했던 태종은 지속적으로 전각을 건립했다. 1406년에는 인소전과 광연루를, 1411년에는 해온정과 금천교를, 그리고 1412년에 이르러서야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이후 세종과 단종, 세조를 거치면서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2 궁궐의 면모를 갖췄고 성종은 대제학 서거정에게 명해 29 궐문의 이름을 짓게 하고 각각 그 문액을 걸었다.

돈화문


치욕의 16세기 말, 창덕궁 역시 임진왜란의 전화를 비켜갈 수 없었다. 경복궁, 창경궁과 마찬가지로 전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 복구 공사에서는 창덕궁이 가장 앞서 중건됐다.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는 1년이 지나 환도했지만 모든 궁궐이 파괴돼 지금의 경운궁(慶運宮)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의 옛 저택을 시어소로 삼아 승하할 때까지 그곳에 거처했다. 재정이 궁핍한 상황에서 궁궐을 새로 짓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 '명량'

이윽고 선조 재위 말년인 1607년에 이르러서야 창덕궁 중건 공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들이 건립됐지만 두 차례 공역 중단을 거쳐 1610년에 완공을 보게 된다. 정릉동 행궁 즉, 월산대군의 옛 저택에 머물러 있던 광해군은 창덕궁으로의 이어를 꺼리다가 1611년에야 창덕궁으로 입거했다. 이로부터 창덕궁의 정궁 역할이 시작됐다.


조선 전기의 이궁, 조선 후기의 정궁이었던 창덕궁에는 구석구석 연산군, 광해군의 패륜과 인조반정, 임오군란, 갑신정변, 조선왕조 마지막 어전회의 등 풍운의 역사가 스며 있다. 20세기 들어 일제 강점기에는 경복궁, 창경궁과 더불어 창덕궁도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인정전·희정당·주합루 등이 일제 관리들의 향응 장소로 전락했는가 하면 궐내 전각의 태반이 훼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1926년4월 마지막 임금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면서 그나마 창덕궁은 주인 잃은 쓸쓸한 ‘고궁’으로 남게 됐다.

창덕궁 흥복헌

지형지세에 순응하는 전각 배치

창덕궁의 전각 배치는 경복궁과 판이하다. 즉, 경복궁의 경우 옛 중국의 제도에 따라 정문과 중문·전문·정전·편전·침전이 남북 직선 축상에 질서를 지켜 반듯하게 입지한 반면, 창덕궁의 전각들은 지형지세에 순응해 자유롭게 배치했다.


정문인 돈화문은 정전인 인정전의 남서 방향에 멀찍이 세워졌고, 유일한 청기와 집이자 편전인 선정전은 인정전에 잇닿아 동쪽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다시 그 동쪽으로 정침인 희정당을 배치했고 그 뒤에 중전인 대조전을 건립했다. 자연친화적 건물 배치의 압권은 후원(後苑)이다. 울창한 숲속에 그야말로 최소한의 터만 닦아 대자연의 장식물 같은 정자들을 세웠다. 물길 따라 연못을 만들고 비탈 따라 돌담을 쌓았으니 그 풍경 하나하나가 혹은 이리저리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창덕궁 후원

바야흐로 친환경 건축이 화두로 떠오르는 시대다. 친환경 건축의 궁극적 지향점은 자연 존중이요 인간 존중이다. 우리 전통 건축의 재료는 자연 그대로이다. 흙과 돌과 나무와 풀에 최소한의 가공을 했을 뿐이다. 돌을 깎아 주추를 놓고 구들을 얹는다. 흙을 구워 기와를 올린다. 나무를 다듬으면 기둥이요 마루이며 창호이다. 그 속에 주인으로서 친구로서 사람이 머문다. 자연에 동화되면서도 자연을 어루만지는 너른 지혜야말로 휴머니즘 건축의 전범(典範)이다. 이러한 전통 건축의 정수가 곧 서울 도심 속의 창덕궁인 것이다.


창덕궁은 이렇듯 자유로운 전각 배치의 틀을 지켜오면서 임진왜란과 크고 작은 화재를 겪으면서 부분적으로 그 배치가 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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