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노동자의 목소리를 국회로, 노동자의 발걸음을 사회로: 울산 북구 국회의원 후보 권오길 인터뷰

조회수 2018. 6. 6. 11:55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2018 지방선거 특집: 울산 북구 국회의원 후보 권오길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갑자기 큰 선거에 나오게 되셨는데요… 어쩌다 이렇게 큰 선거판에 바로 부름을 받으실 수 있으셨죠?


권오길(울산 북구 국회의원 후보): 말 그대로 어쩌다 받았죠. 제가 2015년 말부터 2017년 말까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울산지역본부장을 했어요. 그중 2016년에 쉬운 해고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법 개악,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도입 같은 노동탄압을 박근혜 정부가 거세게 밀어붙였어요.


그때가 마침 총선이 있던 해였어요. 그런데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진보진영이 분열되면서 울산에서 진보정당이 완전 전멸했어요. 그래도 그동안 시의원 1-2명에 구의원도 어느 정도 내고, 구청장도 한 명씩은 진보정당에서 만들어왔는데 새누리당에 다 뺏겼죠. 시의원 당선자가 없었고, 북구에서도 구의원 세 명밖에 당선이 안 됐어요.


그때는 아직 현장 노동자일 때인데, 현장에서 조합원들에게 지지해달라고 하면 ‘단일화 해온나!’를 늘 말했어요. 그래서 2016년 민주노총 지역본부장을 하면서 서울 총연맹에 강력히 주장했던 게 민주노총 지지후보, 진보단일후보를 만들어야 된다는 거였어요. “울산은 할 거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요. 그렇게 민주노총의 총선 단일화 방침을 만들어내고, 이 방침을 바탕으로 조합원 총투표에 기반해서 단일후보를 만들어 냈어요. 그래서 윤종오, 김종훈이라는 울산의 노동자 국회의원 두 명을 만들 수 있었죠.

진보단일화의 열망이 늘 커왔던 울산.

리: 단일화하면 또 방식이 중요한데, 조합원 투표 비중은 얼마였나요?


권오길: 일단 원칙이 ‘조합원 총투표는 무조건 한다, 그리고 그 외에 후보들이 합의해오는 방식이 있다면 추가해줄 수 있다’였어요. 처음에는 조합원 총투표와 여론조사를 반반으로 하자거나 하는 등의 이견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후보들이 조합원 총투표 100%로 단일화하는 데 합의했죠.


리: 어떤 정당들이 단일화를 한 거죠?


권오길: 보통 진보정당이라고 하면 네 개 정당을 말하죠. 그런데 울산은 녹색당이 거의 활동을 못 하고 있어서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이렇게 자리 잡고 있어요. 그때 북구는 노동당이 후보를 안 냈고, 정의당과 지금의 민중당, 그때는 아직 당이 아니고 정치조직이었죠. 이렇게 두 당이 했죠. 그래서 울산에 세 군데 후보를 냈는데 그중 동구와 북구에서 김종훈, 윤종오 이렇게 두 후보가 당선됐죠.



노동자들의 희망, 노동조합


리: 어쩌다가 민주노총 활동을 이렇게 열심히 하게 되신 거예요?


권오길: 제가 현대자동차 노조 정규직 조합원이에요. 공장에서만 28년 정도를 대의원, 노동자 간사, 사무국장 이렇게 간부로 활동을 해오다가 2015년 말에 우연하게 기회가 왔죠. ‘내 운동의 높이를 좀 키워보자’ 이런 의미로 참여한 것도 있고, 난국을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요청도 있었죠.

출처: 중앙일보
권오길 후보(가운데)보다는 뒤에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리: 그냥 현대자동차 지부 간부로 있어도 될 건데 왜 굳이 울산본부로 가셨어요?


권오길: 어떻게 보면 미친 걸 수도 있어요. 그런데 현대차 지부가 97년 정리해고를 겪고 난 후로는 담벼락 안 투쟁만 하고, 밖의 투쟁에 거의 연대를 못 했어요. 제가 그래서 계속 비판했죠. 지역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플랜트노조와 건설노조가 그렇게 열심히 싸울 때, 화학섬유노조가 그렇게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할 때 현대차 지부가 그렇게 조직적으로 지원해주지 못했어요. 물론 개인적으로 가서 연대 투쟁하고 그런 건 있었지만요.


리: 어떤 투쟁이었길래 연대를 못 한 거예요?


권오길: 2001년 현대차 노조가 화학섬유노조 파업에 연대 총파업을 선언했다가 정작 총파업 당일 취소했어요.


리: 아이고, 어떻게 해요? 제일 큰 데서 빠진 거잖아요.


권오길: 그래서 화섬 투쟁이 무너지기 시작한 거죠. 그때부터 공장 담벼락 안 투쟁을 시작했고, 현대차 지부가 대기업 귀족노조 소리를 들은 걸로 기억해요.


리: 현대차 지부 내에서 그런 목소리를 내면 어떤 반응들이 돌아왔나요?


권오길: 그런 목소리는 계속 있었어요. 대중화되고 실천되지 못한 측면이 있었을 뿐이지.


리: 그러면 대가 끊긴 지 한 20년 되어가는 건가요?


권오길: 그래도 2015년 박근혜가 노동악법 몰아붙일 때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임기 첫해에 총파업을 하면서 지부에서도 연대 투쟁 기류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리: 1988년에 입사하셨으면 노태우 때부터 활동하신 건데, 분위기는 어땠어요? 그때와 지금이 좀 달라진 게 있나요?


권오길: 1987년에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투쟁이 본격화됐죠. 현대중공업에서 1990년에 82m 골리앗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농성하는 골리앗 투쟁을 했어요. 그때 경찰이 ‘미포만 작전’으로 공중에서는 헬기로, 육지에서는 불도저로, 해안에서는 군함으로 쳐들어왔어요.


리: 투쟁이 아니라 거의 전쟁 수준이었겠네요.


권오길: 현대차 노동자들이 열심히 육지는 막았는데, 결국 공중하고 해상은 막을 방법이 없으니 진압됐죠. 하지만 노태우-김영삼 때도 계속해서 독재 타도 투쟁을 했어요. 이게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까지 이어졌죠.

출처: 경상일보
회사 측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82m 높이 크레인에 올랐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크레인에 올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노동자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리: 독재 타도를 외치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는 과정이었죠.


권오길: 그때는 그렇게 투쟁이 활성화됐었죠. 현대중공업 노조, 현대자동차 노조, 현대미포조선노조, 현대정공노조 등이 투쟁을 이끌던 게 이런저런 합병 등을 겪으면서 현대차 노조가 울산 전체 투쟁을 이끌게 됐죠. 96-97 이후에는 현대차 노조도 좀 수그러들게 된 거고요.


리: 노동법 날치기의 영향이 좀 있었나요?


권오길: 결국 그 날치기로 정리해고제도가 도입된 거잖아요? 그러면서 98년에 정리해고가 들어왔죠. 그런데 사실 이게 민주노총이 합의해준 것이거든요. 결국 합의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비판이 내부적으로 꽤 있었어요. 물론 당시 투쟁을 이끌던 지도부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리: 그 후로 현대자동차 노조가 대외적 투쟁보다는 내부 투쟁에 주력하게 된 건가요?


권오길: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내부 임단협 투쟁에만 주력했죠. 98년 정리해고를 겪으면서 1만 명이 희망퇴직했고, 1261명이 1년 무급휴직 받았고, 277명이 정리해고를 당했어요. 그래도 정리해고자들과 무급휴직자들은 모두 복직됐어요. 희망퇴직은 복직할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요.


리: 내부투쟁은 되게 잘했네요. 그런데 오히려 그때부터 욕을 먹는 노조가 된 것 아닌가요?


권오길: 현대자동차 노조가 바뀐 게 그때부터라고 봐요. 무급휴직, 정리해고 당했다가 복직한 사람과 그 대상이 되지 않았던 활동가들이 갈라치기 당한 측면이 있죠. 또 무급휴직, 정리해고 당했다가 복직한 분들이 활동가로 많이 올라왔어요. 사람들 심리 속에 이런 게 있었다고 봐요. ‘정리해고 당해보니까 내 것이 최고더라, 또 언제 다시 당할지 모르는데 먹을 것 챙겨놔야 된다.’ 이런 게 강해지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죠. 활동가들도 조합원들이 원하는 활동을 먼저 하는 쪽으로 가고… 그러면서 외부의 투쟁은 안의 임단협 투쟁만 집중하게 됐죠.

출처: 금속노동자
구조조정에 맞서 36일간 파업투쟁을 벌였던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 현대자동차의 투쟁이 패배로 돌아간 후, 한국에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리: 그런데 사실 정리해고는 특수한 상황에 가까웠고, 2000년 이후에는 파견,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졌잖아요. 이게 오히려 귀족노조라는 비판을 낳는 데는 더 기여했다고 보거든요. 이런 문제는 좀 어떻게 바라보세요?


권오길: 사실 1998년 정리해고 이전에도 현대차에는 하청이 있었어요. 무급휴직, 희망퇴직을 받는 과정에서 이분들이 상당히 많이 나갔죠. 그쪽은 단협 적용을 못 받으니까 그냥 계약 해지되면서 나가버렸죠.


리: 그런데 하청이 계속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제의 양상은 조금 다르잖아요. 그런 문제가 불거진 계기는 따로 있지 않을까요.


권오길: 1998년도에 구조조정 투쟁이 끝난 뒤 회사와 하청 비율을 협의하게 됐어요. 결국 일정 부분은 하청이 필요하니까요. 그게 일명 ’16.9%’죠. 구조조정 이전에도 하청비율이 16.9%여서, 1998년 이후에도 비정규직 16.9%를 쓰는 걸로 합의가 됐어요. 그런데 이게 안 지켜지는 거예요. 생산 속도는 급하게 올려야 되는데 정규직 노동자를 뽑아서 교육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당장 라인은 돌려야 하니까 ‘우선은 하청을 쓰고 나중에 바꿔줄게’라고 말하고는 결국 정규직을 안 뽑는 거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회사가 이야기한 게 ‘방패막’이에요. 언젠가 또 구조조정이 올 수도 있는데, 하청을 갖추고 있어야 하청부터 잘라낼 수 있다는 거죠. 그런 말로 계속 노동자들을 회유했어요. 그렇게 25% 정도까지 비정규직 비율이 늘어났어요. 회사 수익을 보면 1998년 정도까지는 평평한 수익을 봤어요. 그런데 1999년부터는 고속 성장을 했어요. 이런 원동력이 다 하청을 늘리는 데서 나왔죠.


리: 하청 비용이 싸기는 하죠.


권오길: 비용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실 회사 입장에서 그렇게 싼지 모르겠거든요. 복리후생비 정도는 줄어들 수도 있는데, 비정규직한테 돈을 덜 준다고 해서 회사에게 덜 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중간 하청업체들에게도 운영비 같은 걸 줘야 하니까요.



1년에 2,000시간을 넘게 일하는 귀족?


리: 현대차 지부 활동을 하시면서 힘든 건 어떤 게 있으셨어요?


권오길: 저는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이 2003-2004년 이때부터 시작됐어요. 당장 정규직이 지지해줄 수 있는 선이 있는데, 비정규직들은 절실하다 보니까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래서 다 들어주고 싶은데 힘에 벅찰 때가 있어요. 좀 천천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리: 투쟁을 하면서 하청 노동자들의 처우가 달라진 게 있나요?


권오길: 지부에서 임단협을 하면 그 기준이 비정규직에도 적용이 돼요. 예전에는 정규직이 10만 원 인상될 때 비정규직은 7-8만 원밖에 인상되지 않았어요. 아, 회사에서 비용상 이익이 있을 수는 있겠네요. 그런데 이제는 9만 5,000원 정도는 받게 됐어요. 거의 비슷해졌죠. 복지혜택 중에서도 현금으로 받는 건 거의 다 받고요.


리: 그러면 비정규직 문제에 관련해서 욕먹는 게 억울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사실 현대차 같은 경우에는 생산직이 사무직보다 급여가 높고, 평균 연봉도 9,000만 원 정도로 나오더라고요.


권오길: 그건 임금체계가 달라서 그래요. 일반 사무직들은 잔업수당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생산직은 그렇지 않죠. 시급제라서 일하면 일하는 만큼 받거든요. 진짜 1년 365일 중에 이틀 빼고 363일을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면 한 1억 2,000 정도 받을 거예요. 노동시간이 2,500시간 정도 되니까요. 지금 대부분 한 2,000시간 정도 일할 건데 그러면 9,000만 원 정도 받게 되고요. 그래서 그런 결과가 나올 뿐이지 시급이 유독 높거나 그러지 않아요. 일하면 일할수록 돈을 많이 받게 되니까 그럴 뿐이죠.

출처: 연합뉴스
2007년의 2,527시간은 휴일 없이 매일 7시간씩 일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이만큼 일하는데 돈을 적게 받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이지 않을까.

리: 2000년대 이후로 현대차 지부에서 운동하시면서 외부를 잘 지원했던 적도 있고, 아니면 또 반대로 지원을 못 해서 아쉬웠던 적도 있을 것 같아요.


권오길: 일단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연대 방침은 다 따라왔어요. 100%까지는 아니지만 80% 이상은 따라왔죠. 가장 완벽하게 수행한 지부 중 하나에요. 그런데 아까 말했던 것처럼 2001년 화학섬유 투쟁 때 현대차 노조가 총파업을 선언했다가 파업 당일 아침에 철회했죠. 그리고 플랜트 투쟁에서도 잘 결합하지 못했고요. 민주노총, 금속노조 전체의 투쟁에는 열심히 했지만 다른 산별노조의 투쟁에는 잘 결합하지 못한 거죠.


그래도 금전적 지원으로는 거의 안 해본 곳이 없을 거예요. 몇천만 원씩 지원하고 그랬어요. 다른 장기투쟁 사업장에도 많이 지원했고요.


리: 노동운동 말고 다른 일에도 연대한 게 있나요?


권오길: 통일사업으로 2007년에 지부에서 5억 원을 내서 평양에 옥수수국수 공장을 만들었어요. 또 울산 위안부 소녀상도 조합원들이 지원해서 만들었죠. 또 작년에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하면 울산이잖아요. 작년이 30주년이어서 30주년 노동기념비를 태화강역에 만들었어요. 사실 그동안은 전국에서 오는 동지들이 노대투의 심장부 울산에서 어딜 가야 그걸 느낄 수 있냐고 하면 데려갈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작년에 30주년 사업하면서 태화강역에 기념비를 세웠죠. 이때도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조합원들이 각출해서 돈을 모았어요. 그러면 현대차 지부 조합원이 울산본부의 절반가량이니까 또 절반은 현대차 지부에서 돈을 낸 셈이죠.

울산 태화강역 광장에 세워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노동기념비

리: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을 하시면서 꼭 이루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나요?


권오길: 2015년에 박근혜가 노동악법을 밀어붙이려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래서 반드시 이걸 막아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안 그래도 타깃이 울산인데 맨날 우리보고 ‘종북세력’이라고 했잖아요. ‘종북세력’이 반대하니까 반드시 깜빵에 넣을 거다, 그래서 정말로 깜빵 갈 각오로 했죠. 막상 그런 각오로 하다 보니까 안 가게 되었지만요.


리: 오히려 박근혜가 깜빵을 갔네요…


권오길: 그렇죠! 하여튼 그래서 2016년에는 열심히 투쟁했어요. 그해 7월 20일에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도입 반대 결의 대회를 했는데 1만 명이 모였던 기억이 나네요.


리: 오, 많이 모였네요.


권오길: 1996-1997년 노개투 이후 최대규모의 집회였어요. 여기에 현대차 지부, 현대중공업 지부가 함께했죠. 그러니까 1만 명이 넘는 집회가 된 거예요. 그때 정말 뿌듯했죠.



혼자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잘살기 위한 싸움


권오길: 지역본부장을 하면서 또 하나 느꼈던 게 비정규직 투쟁에 새로운 눈을 떴어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외에 학교 비정규직, 마트 비정규직, 또 건설 건설·플랜트·화물 비정규직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다 다르더라고요.


리: 어떻게 다른가요?


권오길: 성격이 많이 다르죠. 일단 마트나 학교 비정규직은 최저시급을 받아요. 그러면 연 2,000 정도밖에 못 벌죠. 현대차 비정규직은 정말 장시간 노동을 하면 연 5,000 정도씩은 벌거든요. 물론 고용형태가 불법파견이고 비정규직이라는 문제는 같지만, 정말 배고프고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분들이라는 이야기죠.


리: 이런 부분을 모두 민주노총에서 해결하시려 한 건가요? 


권오길: 저는 사실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사실 현대차는 비정규직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불법파견 문제가 더 크죠. 학교나 마트 쪽은 정말로 정규직화의 문제인 거고요. 학교나 마트 비정규직이 투쟁이 제대로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조건이 정말 어렵거든요. 그분들은 파업하기가 어려우니까 근무 마치고 집회해야 해요. 그런데 또 집에 가셔서는 가사노동도 하셔야 하는 분들도 많으시죠.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카트〉. 2007년 홈에버의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 해고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

리: 현대차 지부에서 마트, 학교 비정규직을 좀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나요?


권오길: 사실 현대차 지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건 금전적인 것 말고는 지원이 어려워요. 여러 문제가 있는데, 일단은 이걸로 현대차 지부가 파업하기는 어려운 거예요. 사실 그분들도 파업하기가 어려우시고요. 그러다 보니까 또 생기는 문제가 이분들이 근무를 다 하시고 결의대회를 하면 저녁 시간이에요. 그런데 현대차 퇴근 시간은 교대근무다 보니까 오후 3시 반 아니면 밤 12시에요. 그러면 5시, 6시에 하는 결의대회에 같이 가자고 하기가 어렵죠. 간부나 대의원 한 100명 정도만 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문제들이 있죠.


리: 그런 문제점들 때문에, 이게 지금까지의 활동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지만 정치로는 풀 수 있을 것 같아서 출마하신 건가요?


권오길: 그렇죠. 이걸 풀겠다는 마음이죠. 사실 마트 비정규직이나 학교 비정규직은 투쟁을 통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정부의 지침을 바꿔야 하는 문제거든요.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쟁점화를 시켜야 해요. 그래야 지금의 유연성 문제, 착취의 문제, 관리의 문제 같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어요. 직고용하고, 전환 채용하면 되는데 계속 하청을 쓰는 건 결국 더 많은 이윤을 착취하려는 거죠.


리: 그런데 사실 사용자에게도 기업활동의 자유라는 게 있고, 법적으로 강제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닌가요.


권오길: 2016년 촛불이 있었던 건 4.19가 있었고, 87년 6월항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민주화는 결국 기존의 틀을 바꾸려는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국회에 들어가 노동자가, 노동자당이 국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해오지 못했던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죠. 물론 기존에 진보정당이 없진 않았죠. 이번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 때도 정의당 의원들, 한국노총 위원장 출신인 민주당 이용득 의원 등이 반대했잖아요. 여기에 더 목소리를 보태는, 진짜 노동자의 목소리가 국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리: 다른 정치인은 모르는 현장을 알 수 있다는 건가요?


권오길: 제가 직접 연대하면서 겪어보니까 마트 비정규직도 결국 현대차 비정규직이랑 다르지 않아요. 권오길: 구체적 성격은 다르지만, 본질은 또 다르지 않다는 거죠. 왜 마트에서 정규직을 안 쓰고 비정규직을 안 쓰겠어요? 그런 게 자본의 논리로 보면 다 합당해요. 그걸 다르게 볼 수 있는 저 같은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리: 국회의원이라는 게 국민 전체의 대표자이기는 하지만, 지역구 의원은 지역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는 자리라고 보는데요.


권오길: 저는 지역 공약을 별로 이야기 안 하려고 해요. 설사 당선이 안 되더라도. 철저하게 노동 공약을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비정규직, 청년 일자리와 같은 노동의 문제를 파고들려고 해요. 왜냐? 여긴 울산 북구거든요.


리: 어떤 의미인 거죠?


권오길: 울산에 노동자가 55만 명이 있어요. 한국노총, 민주노총,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까지 해서.


리: 엄청 많네요? 울산 인구가 100만 명 좀 넘는 거잖아요? 


권오길: 인구 118만 명에 95만 유권자인데 55만 명이 노동자에요. 원래 120만 명인데 현대중공업 구조조정 이후로 2만 명이 줄었죠. 북구는 정말 노동자가 많아요. 현대차 지부 2만 5,000명 중에 1만 1,000명이 북구에 살고, 현대중공업 2,000~3,000명, 금속노조 조합원 1,500명이 북구에 살아요. 한 3만 명은 노동자인 거죠. 그래서 계급투표 구도를 만들어야 가능성이 있다고 보죠. 과거에는 진보:보수 1:1 구도였지만 이번에는 민주당에서도 후보가 있거든요.


리: 그러게요… 울산은 드디어 민주당이 이길 것 같다고들 하더라고요.


권오길: 그렇게 3각 구도에서 노동자 정치 실현을 걸고 나온 제가, 7번 국도 확장할게요, 철로 옮길게요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죠. 오히려 ‘네가 울산 북구를 얼마나 아느냐?’는 비난에 직면할 거라고 봐요.



자르지 않는 게 최고의 일자리 창출


리: 노동 이슈에서 청년노동자, 여성노동자는 사실 대기업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특히 여성 생산직은 매우 드물고요. 청년노동, 여성노동 문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세요?


권오길: 일단 울산의 특성상 금속 사업장이 많다 보니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는 문제가 크죠. 청년 일자리 문제는 지금 저희 당 공약이 공공부문 청년고용의무제 3%를 5%로 올리고, 민간부문에서도 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저는 일자리 창출보다 중요한 건, 안 자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현대중공업이 정리해고를 하면서 일자리 3만 개가 날아갔어요.


리: 그런데 조선업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자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를 수밖에 없어서 자른 것 아닌가요.


권오길: 현대중공업이 정말로 어려워서 해고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충분히 버틸 능력이 있었어요. 현대자동차가 1998년도에 정리해고 할 때도 똑같았습니다. 현대차가 정리해고 당시에는 2년 정도 적자를 봤어요. 그런데 바로 몇조 원대 흑자를 내기 시작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리: 현대자동차처럼 바로 턴어라운드할 수도 있겠지만 쌍용차처럼 가라앉을 수도 있고, 현대중공업처럼 버텨낼 수도 있지만, 대우조선해양처럼 될 수도 있는 거고, 사실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권오길: 그렇죠. 그렇게 아무도 모르니까 오히려 정리해고부터 도입하면 안 된다는 거죠. 현대중공업은 진짜 잘 나갔어요. 1년에 순이익이 몇십 조씩 기록했어요. 지금 사내유보금도 12조 원이에요. 그 사내유보금만 잘 활용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사내유보금으로 평창 주변 땅 샀어요. 자기 지역과 관계없는 데 투기한 거잖아요. 또 현대중공업이 정리해고하는 궁극적 목적을 저는 경영 승계로 봐요. 정상적으로 증여세를 내려면 너무 많으니까 계속 회사를 분할하고, 몸집을 줄이는 거죠.

출처: 매일노동뉴스
수년 연속 흑자, 14조의 사내유보금, 계속되는 실적 호조 속에서도 계속되는 정리해고

리: 대기업은 정리해고 안 하고 버틴다고 쳐도, 중소기업은 다르지 않나요?


권오길: 아니에요. 다르지 않아요. 현대차에 1차 협력업체가 있고 2차 협력업체가 있잖아요? 저는 현대차가 1차 협력업체에 불공정거래를 요구하면서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에도 똑같이 굴고 있다고 봐요. 어쩔 수 없죠. 현대차가 1차 협력업체의 수익 구조를 다 알아요. 생산원가가 얼마인지 다 아는데, 부품의 70-80%를 다 현대차에 납품하니까 다 계산이 되죠. 그래서 협력업체가 조금만 많이 남긴다 싶으면 납품단가를 깎아요. 그러면 1차 협력업체가 2차 협력업체 단가를 깎죠. 이걸 법적으로 막아야 해요. 납품단가를 현대차가 정하면 안 돼요. 1차 벤더가 얼마에 납품할지 입찰하는 식이어야죠.


리: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는요?


권오길: 여성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가 이번 지방선거 준비를 하면서 정책을 제안받았어요. 굉장히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더라고요. 일자리, 육아, 보육 등등. 우선은 여성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지금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대부분 여성이에요. 그걸 정규직화해야 하고, 사기업에서는 최소한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는 등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죠. 그리고 공공어린이집, 마더센트 등 공보육 시설을 늘리게 된다면, 지금 돌봄노동은 아무래도 여성 분들이 더 많이 하고 계시니까, 여성 일자리를 늘릴 수 있죠.


리: 당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권오길: 제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했는데, 당번이 엄청 빨라요. 70번대예요. 노조 간부여서 빨리 가입했죠. 그런데 현장에 있어서 당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죠. 그 이후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고… 민중당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민주노총 지역본부장들과 산별노조 위원장들이 모여서 노동 중심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계속 해왔어요. 그러다 민중당이 만들어진 거죠.


리: 울산에서 활동하는 진보정당이 다양한데 민중당을 택한 이유는 어떤 게 있을까요? 통일 운동을 하고 싶어서 가신 건 아니잖아요?


권오길: 통일운동도 하고 싶었죠. 저는 이 나라가 통일이 되어야 훨씬 더 발전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막걸리 나눠 마시고 함께 자전거를 타는 국회의원


리: 이번에 되시고, 4년 후에 임기가 끝나면 어떤 국회의원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권오길: 2년이죠, 2년.


리: 아, 재보궐이죠…


권오길: 2년 후에 다시 출마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의원들과는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선거할 때만 보이는 의원들이 있잖아요? 저는 일상 속의 의원이 되고 싶어요. 유럽 국회의원들 보면 정말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주민을 직접 만나 대화하잖아요. 그런 의정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서울 국회에 많이 있어야 하긴 하겠지만, 가급적이면 지역구에도 자주 와서 주민들을 직접 만나고 의정활동을 자주 보고하고 싶어요.


리: 흐음…


권오길: 제가 평범한 노동자고, 평범한 북구 주민이라는 걸 주민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쉽게 다가올 수 있게. 우리는 국회의원을 대단한 권력자로 인식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전 쉽게 막걸리 한잔하면서 고충을 듣는 의원이 되려고 해요. 국회의원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주민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출처: 노컷뉴스
자전거 타는 정치인이 한국에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타면서 주민들을 안 만났지…

리: 계속 ‘양질의 일자리’들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로봇 기술이 도입되면 일자리는 줄어들 테고, 좋은 일자리는 더 줄어들 텐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권오길: 양질의 일자리라는 게 뭔가요? 보통 임금과 연결해서 말씀들 하시는데, 다 비슷한 임금을 받으면 양질의 일자리라는 개념은 없어지는 건가요? 그래서 저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임금을 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나라는 철저한 빈익빈 부익부예요. 1%가 나머지 99%와 같은 재산을 갖고 있죠. 결국은 기업이 나서야 해요. 정말 경기가 어렵다면 해고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곳간을 열어서 풀어줘야 해요. 그러면 자연스레 ‘양질의 일자리’라는 개념이 사라지겠죠. 일자리가 얼마나 많으냐가 문제 될 뿐이지.


리: 아무리 국회의원이어도 재벌의 곳간을 열게 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권오길: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실패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김대중도, 노무현도, 저는 문재인 정부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제에 부딪힐 거라고 보고요. 그것은 일종의 ‘벽’이고, 그걸 뛰어넘지 못하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뻥인 거예요. 투쟁하든 뭘 하든 노력해야 해요. 민주화의 역사가 그렇게 이루어졌듯이 재벌의 역사도 그렇게 바꾸어야 해요. 이미 국민들은 대통령도 재벌 총수도 구속시켜 본 경험이 있어요. 국민들이, 노동자들이, 국회의원들이 두려움 없이 투쟁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봐요.


리: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에 출마하실 때는 박근혜 때문에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 시대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에게 100점 만점에 몇 점 정도 주고 싶으세요?


권오길: 저는 대체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동정책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저임금 문제만큼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리: 사실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상여금이나 이런 건 큰 문제는 안 되잖아요?


권오길: 아니에요. 마트 비정규직, 학교 비정규직 등등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도 다 상여금, 식대가 있어요. 계속 투쟁해서 만들어낸 성과죠. 투쟁해서 식대 쟁취하고, 방학이면 못 받던 임금 보조받고, 상여금도 쟁취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낸 게 고스란히 최저임금으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게다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들어가 버리면 투쟁의 성과 덕택에 기본급이 안 올라도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출처: 딴지일보
겨우겨우 야채를 추가해놨더니 어느새 야채가 스테이크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세상.

리: 그런데 한국 임금체계가 워낙 골치 아프게 되어있잖아요? 결국 털어야 할 문제 아닐까요? 또 올해 최저임금이 16.4% 인상으로 급격하게 올랐잖아요? 그러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권오길: 저는 문재인 대통령이 ‘최저임금 1만 원’을 내걸었을 때부터 보완책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선거하면서 자영업자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이 절 만나자마자 하는 이야기가 ‘최저임금 올라서 알바를 못 쓰겠다’에요. 이제 알바 안 쓰고 식구끼리 한다는 분들도 많고요. 그때 제가 한 이야기가 이거예요. “최저시급은 당연히 올라야 한다. 우리 딸이 대학생인데, 최저시급이 오르니까 1주일에 한 끼 정도는 자기가 먹는 음식이 달라진다고 하더라. 예를 들어서 맨날 3,000-4,000원짜리 라면이나 국밥 먹다가 주말에는 파스타도 한 번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 결국 최저임금 인상의 적용 대상은 자영업자들인 건데,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후속대책이 없었다는 거죠.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최저시급이 올라도 그 돈이 다시 현장으로 풀리려면 2-3년은 있어야 한다. 초반에는 임금이 오른 사람들이 저축을 할 거예요. 그런데 2-3년 후에는 결국 시장으로 다시 돈이 나오죠. 그동안 자영업자들이 버틸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줬어야 하는데, 정부는 그냥 인상분 보조해주겠다 하나만 내놨죠. 더 다양하고 실질적인 방안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없었으니 5달 만에 이런 파국이 벌어진 거죠.


리: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라는 게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세요?


권오길: 제가 1988년에 입사해서 1989년부터 현장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1996년에 노동악법이 날치기로 통과되는 걸 보면서 ‘결국 이 나라 정치를 안 바꾸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노동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가서 국가권력을 잡지 않으면 한계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노동자들이 정치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복지는 실질임금을 인상하는 효과를 가져오거든요. 민주노동당이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이야기했잖아요? 무상교육을 하면 학비를 안 내도 되니 실질임금이 올라가죠. 그러면 정치를 통해서 임금을 올리는 효과를 낼 수가 있다는 거죠.


리: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만약에 이번에 떨어지신다면 그 이후에는 삶이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세요?


권오길: (웃음) 저는 떨어진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설사 떨어지더라도 지금의 상황하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결국 정치를 통해서 우리 노동자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 활동은 계속할 거예요. 지금까지는 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꿔왔다면, 이제는 정치를 통해서 바꾸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2000년대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적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죠. 지금 진보정당이 다 분열되어 있지만 결국은 하나로 모아야 해요. 그래서 2016년 총선 전에 한상균 위원장을 면회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말로 단일화가 안 되면 민주노총당을 만들자’라고.


리: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권오길: 그렇죠? 진짜 추진하려고 했어요. 한상균 위원장도 동의했고요. 그렇게라도 해야 된다고 했죠. 그래서 진보정당이 노동한테 와서 표만 달라고 하고 막상 노동의 말을 제대로 안 들으면 민주노총이 독자적으로 당을 만들어 가는 것도 한 방법이죠. 한국노총이랑 같이 만들어도 되는 거고요.


리: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에 많은 긍정적 기여를 해왔는데, 2008년 촛불 때도 그렇고 시민들로부터 배격당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시나요?


권오길: 억울한 측면이 좀 있죠. 노동의 진정성과 시민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다른 것도 있고요. 그런데 노동 운동이 결국 사회 전체를 좋게 만든다고 봐요. 현대차가 파업하면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데 그러냐’ ‘귀족노조 아니냐’ 이렇게 비판해요. 그런데 현대차 지부의 활동이 정말 우리한테만 이익일까요? 막 현대차 1년 교섭비용이 1조라고 해요. 그래서 사측에 물어봤죠. “우리가 임금 동결하면 1조 원이 절약된다는 건데, 그러면 그 1조를 사회에 환원할 수 있겠냐?”라고 물어봤어요.

자기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를 위한 투쟁이라는 권오길 후보의 항변.

리: 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뭐래요?


권오길: 그런데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거죠. 우리가 동결하면 협력업체들도 다 임금이 동결돼요. 거기에서 인상하자고 하면 ‘원청이 동결했는데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리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결국 노동운동이 단지 우리의 이익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의 질을 끌어올리고, 사회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