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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을 넘어 나라를 바꿔온 구청장, 이제는 주민들의 마음에 남고 싶다: 서대문구청장 후보 문석진 인터뷰

조회수 2018. 6. 3.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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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ㅍㅍㅅㅅ 지방선거 특집: 서대문구청장 후보 문석진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벌써 다섯번째 선거를 맞이하시죠? 오랜만에 선거 다시 나오니까 어떠세요?


문석진: 특별한 느낌은 없어요. 4년마다 치르는 선거인데요, 뭐.


리: 정말 꼬박꼬박 치르셨죠… 경력을 보시면 사실 딱히 정치에 도전할 이유가 없어 보이시는데, 어쩌다 출마하신 거예요?


문석진: 지방선거가 처음에 부활했을 때,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배의 권유가 있었죠. 아직 자치단체장 선거는 안 하고 자치의원 선거만 하던 시절인데, 구의원 선거와 시의원 선거 시기가 달랐어요. 3월에 구의원 선거를 먼저 하고, 6월에 시의원 선거를 했죠. 그런데 구의원 선거에서 그냥 동네에서 어깨에 힘 좀 준다 하는 분들이 되신 거에요. 그래서 그 선배가 저에게 권유하셨어요. 우리가 어떻게 피 흘려 가며 만든 지방자치인데, 회계사인 니가 참여해야 하지 않겠냐고.


리: 아니, 왜 그렇게 연결이 되죠-_-?


문석진: 회계사가 분석하고 감사하는 일을 하잖아요? 말하자면 의회가 하는 일도 감사예요. 집행부에 대해 감시하는 일이니까, 그런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지방자치에 나서야 한다고 하신 거죠.


리: 그 선배님은 어떤 분이세요?


문석진: 민청학련 선배님이세요. 당시로 표현하면 연세대 운동권의 두목급이었달까요(웃음). 연세대에서는 최민화 선배하고 김학민 선배가 민청학련을 이끌었어요. 김학민 선배는 같은 상과대학 선배였고, 최민화 선배는 신학대학이었는데 교회 생활을 같이 했어요. 유신 때부터 같이 생활하면서 10·26, 5·18, 신군부 다 같이 겪었죠.


리: 굉장히 애매한 타이밍이었네요? 80년부터는 운동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졌잖아요.


문석진: 그렇죠. 그래서 그 당시 80년대 학번 후배들은 저보고 개량주의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리: 뭔가 특이한 조합인 게 연대, 운동권, 교회. 연대랑 교회는 잘 어울리는데 연대랑 운동권은 좀 잘 안 어울리지 않아요?


문석진: 그때는 어느 대학이나 운동권이랑 어울렸죠. 오히려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환영을 못 받았죠. 사실 뭐 지금도 좌빨이라고 욕하는데 오죽하겠어요.

연세대는 이한열 열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리: 그런데 교회는 계속 나가시잖아요?


문석진: 그렇긴 하죠. 교회는 아직도 보수 성향이 강하고요. 그 안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내면 너무 운동권적 시각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해요. 그래도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어요. 제가 교회 장로인 건 그래도 그 분들이 인정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모태신앙이에요. 계속 교회 안에서 컸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교회를 열심히 가게 되거나 그러진 않았죠.



노동자를 보호하던 회계사, 시민들의 권리를 지키는 시의원이 되다


리: 순수했던 기독교 청년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운동권이 되다니…


문석진: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당시에는 이념써클이었던 목하회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두고 토론을 많이 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선배들이 많이 붙들려갔는데, 저는 어쩌다 보니 붙들려가지는 않아서 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3학년 2학기 때부터 회계사 시험 공부를 했는데, 선배들이 감옥에 갈 때 회계사 공부를 했다는 마음의 빚이 늘 있어요. 그래서 재야운동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회계사가 되고 보니까 재야운동권에 회계사가 없는 거에요. 사실 회계감사활동이 많이 필요한 데 말이죠. 그래서 그런 곳들에서 제가 감사를 많이 했죠. 돈이 되는 일도 아닌 데다, 오히려 검찰에서 주목하니까 다들 잘 안 하려고 했거든요. 한 번은 어용노조가 잘못하고 있다는 내용의 감사보고서를 냈어요. 그러면 검찰이 어용노조 간부를 불러서 조사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감사를 한 저를 불러다가, ‘옛날에는 ‘탁’ 치면 ‘억’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협박도 하고 그랬어요.


리: 사실 지금만 해도 시민단체나 노조를 보면 제대로 정리가 안 됐다고 말이 많은데, 그 당시에는 정말 행정이 잘 안 되었을 것 같네요…


문석진: 사례가 있어요. 같이 활동했던 분 중에 조승혁 목사님이라고 국가보안법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으셨던 분이 계세요. 그 분이 한 번은 횡령으로 감옥을 가신 거예요. 그런데 그 횡령 건이 뭐였냐면, 당시에는 외국에서 지원금을 많이 보내줬어요. 특히 독일의 종교 관련 재단인 EZE 재단에서 많이 지원을 해줬어요. 원래 지원 명목은 위장이고, 이 돈으로 재소자 가족을 돌보거나 다른 운동에 쓰라고 한 거예요. 재단에서는 다 이해를 해줬거든요.


그런데 엉뚱한 수사기관에서 횡령이라고 잡아가는 거죠. 운동했다고 잡혀가는 건 좋은데, 꼭 횡령 같은 죄목을 걸어서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아갔던 거죠. 그래서 ‘이건 내 소명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출마 권유를 받았고, 회사에 한 달 휴가 내고 나와서 출마했다가 떨어졌죠.


리: 그렇게 일하셨는데 돈은 받으셨어요?


문석진: 돈 벌려고 하는 일도 아니고, 감사를 통해서 노동조합 같은 조직을 보호하는 명분이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기본적인 돈만 받았죠.


리: 그때는 결혼 하신 상태셨나요? 사모님이 돈 벌어오라는 소리는 안 하셨나요?


문석진: 아뇨, 돈도 벌고 있었죠. 직장생활하면서 같이 한 거죠. 공인회계사는 자영업이다보니까 되더라고요(웃음).


리: 그래서 선거에 나섰는데 잘 안 됐나봐요?


문석진: 처음으로 나온 거니까… 그리고 동네도 내가 살던 동네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반응은 좋았어요. 서른 다섯에 선거에 나가니까 젊은 사람이 나왔다고 너무 반응이 좋아서 거의 이기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 정원식 총리 지명자가 외국어대학교에 갔다가 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여론이 확 나빠졌죠.


리: 아… 그런 일이 있었죠.


문석진: 또 다른 문제가 있었어요. 저는 신민주연합당이라고 김대중 총재가 있는 당에 있었고, 그때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리며 노무현, 이기택 등이 있던 민주당이 따로 있었어요.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는 한 명인데 야당에서만 후보가 두 명이 나온 거죠. 그래도 저는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격려하면서 으쌰으쌰 선거를 치뤘는데, 사실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리: 순진하셨군요…


문석진: 결국 제가 8천 표를 받았고, 민주당 후보가 4천 표를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민자당 후보에게 213표 차이로 떨어졌죠…

91년 6월, 외대 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은 정원식 총리 지명자. 이 사건을 계기로 진보세력에 대한 역풍이 불었었다.

리: 낙선하니까 어떠셨어요?


문석진: 뭐, 선거가 뭔지도 모르고 회사에서 20일 휴가 받아서 한 것치고는 잘 한 거죠. 투표 바로 다음날 휴가가 끝났으니까, 새벽에 넥타이 고쳐 매고 다시 출근했어요.


리: 동료들은 뭐래요? 재밌어하지는 않던가요?


문석진: (웃음) 별 말은 안 하더라고요. 아마 저 같은 기록은 없을 거예요. 샐러리맨이 휴가 받아서 출마하고… 생각해보면 그때 떨어지기를 잘했어요. 그때는 지방의원 월급도 없을 때라…


리: 잘됐으면 지금 서울시장이 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문석진: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만 당장 생계유지가 안 됐겠죠(웃음). 인생은 여러가지 다른 경우의 길이 있는 거죠, 뭐.


리: 정당을 민주당으로 선택하게 되신 계기가 있나요?


문석진: 당연히 민주당이었죠. 민주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독재 파쇼적 정당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 당이 꾸준히 인권, 민주화,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향했던 정당이라는데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91년도부터 같이 해왔다는 자긍심이 있죠.


리: 1995년 선거는 어땠어요?


문석진: 뭐 그때는 거꾸로 바람이 분 덕에 아주 쉽게 원사이드하게 이겼죠. 그렇게 만 39세에 당선이 되어서 재무경제위원장이 됐어요. 서울시의회 최연소 상임위원장이었죠.


리: 오오...!


문석진: 그때 서울시 금고가 처음으로 복수금고제가 도입이 됐어요. 제가 20년 전부터 문제제기를 해온 부분이었어요. 그때 시 금고가 우리은행, 당시에는 상업은행이었죠. 일제시대 조선식산은행 시절 시 금고로 수의계약을 100년 이상 맺었던 거에요.


그런데 당시 정기예금 금리가 보통 10%이었어요. 그때 2조원 정도를 예탁했으니까 1년에 이자가 2천억원 정도 들어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훨씬 적게 주는 거에요. 그래서 6개월간 행정사무조사 하면서 깊게 파고들었죠. 은행계에서는 난리가 났죠. 상업은행에서는 복수금고 막으려고 로비하고, 다른 은행들은 같이 하려고 달려들고… 그렇게 토론회도 하고 행정사무조사도 하면서 밀어붙였는데, 정작 복수금고 도입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는 날 의원들이 회의장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의결정족수를 못 채웠어요.


그래도 상업은행에게 두 가지 양보를 받아냈죠. 하나는 무조건 시중은행 금리보다 더 쳐주겠다, 둘째는 만기가 되기 전에 미리 예고를 하겠다. 그 전에는 만기가 되었는데 예고도 안 해줬어요. 정기예금 금리 주는 기간이 끝났다, 그러면 자기들 마음대로 보통예금 금리로 계산해서 줘 온 거예요. 그런데 이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는 성공했죠.


리: 일반 시의원 급에서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엄청 뿌듯했겠네요?


문석진: 그렇죠, 회계사라는 전문성이 발휘된 셈이었죠. 그래서 그 후에 결국 복수금고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어요. 이번 시 금고 선정 때 신한은행이 주 금고가 되었고, 우리은행이 보조금고가 되는 복수금고제가 도입이 되었죠.


리: 은행에서는 많이 달가워하지 않았겠네요?


문석진: 자기들 이익이 줄어드니까 당연하죠. 하지만 그게 원래는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이잖아요? 그렇게 제가 되돌려드린 이익이 한 600억 정도 됩니다.

출처: 한국경제
무려 104년 동안의 관행을 깨는 단초를 초선 시의원이 마련한 셈.

리: 그다음에는 또 어떤 길을 겪으셨나요?


문석진: 구청장 선거에서 두 번 떨어져서 3수를 했습니다(웃음).


리: _-;; 이렇게 큰 업적을 세웠는데 왜 두 번이나 떨어지셨을까요?


문석진: 처음에 떨어졌을 때는 현직이었던 구청장이 경선에서 저한테 졌어요. 그러면 양보를 해야하는 건데, 무소속으로 나와서 또 표를 갈라먹었죠.


리: 3파전이 되어서 결국…


문석진: 그래서 결국 한나라당이 됐죠. 그런데 그 구청장이 8년동안 완전히 구정을 농단했어요. 부정을 일삼았고… 그래서 7년 5개월을 감옥에 있었을 정도였어요.


리: 와… 얼마나 해먹었으면;; 보통 가석방 좀 시켜줄텐데…


문석진: 가중되고 가중되고 세 번까지 가중되어서 다 합쳐 7년 5개월 형을 받은 거죠.

출처: SBS
뇌물죄 트리플 크라운(…)

리: 내리 지면서 느끼신 게 있으세요?


문석진: 타산지석의 기간이었죠. 우선 돈 문제가 있었던 부패한 구청장이 있었고, 그 이전 구청장은 또 여자 문제가 있었어요. 공인으로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게 돈과 여자다. 이에 대해 철저한 자기 수련을 한 거죠. 누가 돈 1원, 10원이라도 제공한다고 하면 제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어요.



서대문이 쏘아올린 마이크로 개혁, 나라를 바꾸다


리: 되게 공복의식이 강하시고 청렴함을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하다보면 다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문석진: 어렵죠. 그래서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청장 혼자는 뭘 하기가 힘들어요. 이상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는 데서 힘이 나오는 거죠. 그걸로 이슈를 만들고 사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절차를 지켜야 한다, 급변하면 안 되고 점진적으로 해야 된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 다 핑계거든요.


가장 좋은 예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이라고 생각해요. 남북간 정상이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이 현대 사회에 필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말이죠. 목표를 가지고 바꿔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정말 답답해요.


리: 시의원을 하시다 구청장에 도전하신 건 시의원으로 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셨나요?


문석진: 시의원은 일단 집행부가 아니죠. 그런데 구청장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예산과 인원, 인력이 있어요.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것을 기획하고, 예산을 투입하고, 예산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작동이 되고, 결과물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죠. 그래서 구청장, 시장, 군수를 해야 결과물을 보는 거죠.


흔히들 정치를 왜 하느냐고 물어볼 때 세상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말들을 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실현하느냐? 저는 가장 기초자치단체인 서대문구를 제가 바라는 사회로 바꾸는 것으로 도전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바꾼 대표적인 사례가 안산 자락길이에요. 안산에 나무 데크 길을 둘렀어요. 아무런 계단 없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그래서 휠체어도 돌 수 있는 길을 만들었어요. 전국 최초입니다. 순환형 무장애 자락길. 이건 정말 걷기 불편한 사람이 산을 즐길 수 있게 해보자는 생각에서 한 거에요.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 직원들과 의논하고, 기획하고, 서울시에도 이야기해서 예산을 탔어요. 마지막에는 서울시에서 돈을 주기가 어려워지니까 우리 구비 15억원까지 더해서 전국 최고의 자락길을 만들었죠.

턱, 계단이 하나도 없는 전국 최초의 ‘무장애’ 숲길 안산자락길

리: 막상 구청장 자리에 앉으니까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으셨을 것 같은데, 우선순위 같은 건 어떻게 뽑으셨나요?


문석진: 저는 첫번째가 복지라고 생각했어요. 2010년도에 지방선거를 저희 당이 이길 수 있었던 건 무상급식과 복지 아젠다를 말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지방정부 단위에서부터 복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리: 예산 문제는 없었나요?


문석진: 어차피 예산 들어가는 복지는 잘 안했어요.


리: 엥? 그러면 뭘 하셨어요?


문석진: 예산이 별로 안 들어가도 할 수 있는 걸 했죠. 예를 들어 동을 복지의 근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어요. 구청에서 하던 복지를 동이 주축이 되어서 할 수 있게 하자, 대신 동에서 하는 행정기능을 구청으로 옮기자. 그렇게 해서 동장을 ‘복지 동장’으로, 통장을 ‘복지 통장’으로 바꾸는 거죠. 계속해서 지역에 사각지대가 없는지, 정말 어려운 가정은 없는지 찾는 거죠.


또 그 동안에는 찾은 것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어요. 그래서 ‘100가정 보듬기’라는, 우리 사회의 연대를 통해 기부를 하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한 가정마다 30만 원을 매월 보내는 사업인데, 구청에는 절대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칭만 신경쓰고, 돈은 공동모금회를 만들어서 후원자-공동모금회-수혜자 이렇게 바로 연결되도록 만들었어요.


리: 왜 바로 가도록 만들었죠?


문석진: 그래야 누수가 안 생겨요. 구청에서 기부를 하면 그 돈 일부는 운영비로 쓰이게 돼요. 100을 내면 10, 20이 복지재단의 운영비로 쓰이죠. 하지만 우리는 100을 만들었으면 100을 다 이 사람에게 주는 구조인 거죠. 그렇게 투명성 있게 운영해야 복지가 지속가능성을 가지는 거예요. 그렇게 2011년 1월에 시작해서 그 해에 100가정을 모았고, 지금은 524호 가정까지 모았어요.


리: 듣다 보니 궁금한 게, 기존의 통장과 동장은 어떤 역할을 했죠?


문석진: 예전에는 말단 행정기능을 했죠. 교통 정리, 주차 단속, 쓰레기 정리, 민방위 같은 거요. 일에 자부심이 생길 수가 없죠. 그런데 지금은 ‘복지 통장’이라고 문패까지 달아주거든요. 우리 동네 어려운 이웃을 찾아서 구제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거죠. 그 마음으로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가는 거고요. 그래서 이명박 정부 말에는 ‘우리 동 복지 허브’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해서 청와대에 가서 프레젠테이션도 했어요.

복지통장의 집에 ‘복지도우미’ 문패를 달아주는 문석진 서대문구청장(가운데).

리: 이명박이 인정해 준 거네요?


문석진: 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동 복지 허브 이름을 따서 ‘복지 허브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전국에 주민센터, 예전에는 동사무소였던 곳들이 다 행정복지센터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서울시에서는 또 박원순 시장이 ‘찾아가는 동 주민센터’라고 해서 ‘찾동’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그 원조가 서대문인거죠.


그리고 ‘100가정 보듬기’를 통해서 사각지대 가정이 나오면 다 도와줬어요. 지금 524개 가정이 다 그렇게 발굴된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전수조사를 했어요. 공과금 고지서 체납 같은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는 대상자를 뽑았어요. 이중 몇 가정은 정말 어려워요. 관심을 못 받으면 자살할지도 모르는 가정도 있을 수 있는 거죠.


리: 되게 마이크로하게 보시네요. 특히 고지서로 보는 것은 되게 좋은 시스템인 것 같아요.


문석진: 그래야 정확하게 보죠. 고지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요. 이를테면 집에서 사람 기척이 없다든지, 평소에 나오던 활동을 어느 날부터 빠진다든지.


리: 그런 걸 체크하려면 사실상 누군가 계속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문석진: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동 복지 허브를 둔 거죠. 그리고 방문 간호사를 통해서 보건소에 있는 조직을 동으로 보내요. 방문 간호사, 동 직원, 구청 복지 직원, 통장 같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는 거예요.


리: 또 생각나는 복지가 있으세요?


문석진: 다른 대표적인 건 사람 중심으로 고가도로를 철거한 걸 들 수 있죠. 아현, 홍제, 서대문 고가도로를 철거한 건 말 그대로 사람 중심으로 생각한 결과예요. 고가도로는 차 중심의 구조물이거든요. 이제는 교통 시스템이 많이 좋아져서 철거한 후에도 전혀 정체되지 않아요. 북아현동 분들이 고가도로 없어지고 나서 하늘이 뚫렸다고 했으면 했지, 차 막힌다고 하시는 말씀은 제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또 연세대 앞 연세로를 주말에는 차 없는 거리로 만들었어요. 그러면 광장이 생기고 문화가 탄생하죠.


리: 오오...


문석진: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기초자치단체장의 역할이라고 하는 게 그런 거예요. 지역 사회의 변화를 정말 좋은, 혁신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 있는 이상을 밀어붙이고 현실화시켜 가는 것이죠.


리: 철학이 개발과는 거리가 먼 쪽이신 것 같아요.


문석진: 그렇다고 서대문이 개발이 안 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문화체육회관을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다 해요. 철거도 사실 일종의 개발이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 중심의 변화를 이끄는 행정을 해 나가야 한다는 거죠.


리: 환경이나 사람, 중심 같은 가치도 좋지만, 서대문은 재개발이나 재건축 문제가 남아있는 동네 아닌가요?


문석진: 처음에는 많이 부딪치기도 했죠. 그런데 제 임기 동안 64개 있던 재개발 지역 중에 반이 정리됐어요. 완료된 곳도 있고, 해지한 곳도 있고요. 지금 유지되고 있는 절반도 사업 진행이 많이 됐죠. 저는 계속해서 구민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예전 구청장들은 주민과의 대화를 무서워하더라고요. 저는 그분들이 찾아오시면 회의실로 같이 가시자고 해서 몇 시간씩 이야기를 들어주고 토의해요.


그러다 ‘시간이 됐으니까 다음에 다시 제대로 찾아와주세요’ 하고 돌려보내면 이제는 제대로 대표가 구성되어서 오죠. 그렇게 서로를 신뢰하면서 대화하면 몸으로 부딪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대화가 진행돼요. 예전에는 구청에 와서 데모하는 게 늘 비상대책위원회 쪽이었어요. 반발하는 쪽이죠.


그런데 제가 구청장 되고 재개발 관련해서 첫 데모가 10달 만에 열렸는데, 오히려 조합에서 빨리 사업 승인해달라고 찾아온 데모였어요. 그만큼 반대하는 분들에게 저랑 대화할 수 있다는 신뢰를 쌓아두었던 거죠. 이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 시의원 하실 때는 금고 수의계약 가지고 본인의 전문성을 발휘하셨다면, 구청장 하시면서도 그런 게 있을까요?


문석진: 이런 게 다 전문성이죠. 회계사라는 영역이 전체를 들여다보고 경영을 분석하고 회계를 감사하는 것이거든요. 대기업 감사할 때를 떠올려 보면, 시간은 20일밖에 없는데 모든 자료를 분석하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빠르게 흐름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디테일을 찾는 거죠. 그래서 구정 살림도 이렇게 잘 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가 구정을 하면서 회계사가 숫자 따지듯이 하지는 않아요. 그냥 정책만 결정해주고, 알아서 결재하게 해 줍니다. 저는 한 번도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어요.


리: 의사결정을 다 공무원에게 맡기신다고요?


문석진: 네, 그런 것들을 국과장들에게 충분히 위임하는 거죠. 저는 중요한 정책을 정할 뿐이고요. 그게 CEO가 할 일이거든요. 리더로서 해야 될 역할은 구조를 어떤 방향으로 가져가야 하는지, 예산을 어디에 투입해야 하는지, 어떤 성과가 나야 하는지 설정하는 일이죠. 그 과정에서 예산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 하고, 뒷돈을 받지 말아야 하고요.


지금 안산 자락길이 처음 만들어진 구간은 2011년에 만들어졌어요. 목재 데크가 7년 정도 되었으니 내구성이 다 되었을 수도 있는데, 지금도 멀쩡해요. 이런 부분에서 제대로 공사가 진행된 거라고 판단하는 거죠. 저는 뒷돈을 받고 부정하면 정말 ‘죽여버린다’고 표현해요.


리: 워… 세네요ㅡ,.ㅡ;;


문석진: 돈 10원이라도 받으면 죽여버리겠다. 당연히 인사 청탁도 절대로 안 받죠. 예전 구청장 때에는 ‘3, 5, 7’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해요. 팀장 되려면 3천만 원, 과장 되려면 5천만 원, 국장 되려면 7천만 원을 써야 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선포했어요. 돈을 주면 오히려 승진될 만한 사람도 못 하게 하겠다고.

ㅇㅇ알겠냐?

리: 아하… 효과가 뚜렷할 것 같네요.


문석진: 확실하게 성과로만 승진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죠. 그러면 직원들이 성과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그 결과물이 매년 다양한 상을 타오는 결과로 나타나는 거예요. 결국 모든 조직은 분명한 동기부여와 성과에 대한 명확한 피드백을 해주면 잘 돌아가요.


리: 지금까지 8년 동안의 각종 성과를 열심히 이야기해 주셨는데, 3선 또 나오는 것은 추가로 어떤 성과를 내고 싶으셔서인가요?


문석진: 사람 중심의 행정도 중요하지만, 서대문에는 아직도 개발을 해야 될 곳들이 남아 있어요. 특히 홍제권의 개발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예산을 투입하려고 하죠.


리: 그동안은 왜 못하셨어요?


문석진: 제가 야당인데 누가 돈을 줍니까? 아무도 안 주지(웃음). 그런데 지금은 여당이니까 조금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싶어요. 중앙과 시에서 예산을 받아야 하고, 사실은 그 전에 구 재정이 강화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방분권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개헌도 이루어져야 하죠. 그런데 개헌이 안 됐잖아요? 정말 기득권이 문제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리: 기득권을 정말 싫어하시네요.


문석진: 어휴, 진짜로 싫어하죠. 자유한국당은 없어져야 할 정당입니다. 정당에는 목표, 이상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정당인가요? 개헌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막상 안 하는 건 거짓말이잖아요. 정치인으로서 말은 정말 생명처럼 아끼면서 해야 해요. 그런데 전혀 안 그러잖아요. 또 언론도 문제예요. 그런 걸 신랄하게 비판해야 시민들이 정치권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인식하는데, 그런 책임을 방기하고 있어요. 우리 언론처럼 썩은 곳이 또 어딨습니까?


리: 아이고, 이렇게 세상에 척을 져서 어떻게 사시려고…


ㅁ석진: 그래도 믿어주는 시민이 있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던 이유가 뭡니까? 세상을 바꾸자는 거에요. 그런데 막상 국회가 개혁을 질질 끌어서 세상을 바꾸는 걸 막을 거라면, 국회가 대체 왜 필요하냐는 거예요. 국민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해왔습니다. 이 힘이 저는 곳곳에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갑질을 더 이상 직원들이 묵인해주지 않아요. 돈으로 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천민자본주의의 대표가 바로 조씨 일가잖아요. 이제는 그만하라는 거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 이야기죠. 이런 변화가 우리 국민의 생각이고,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청장님, 구청장님, 우리 구청장님


리: 민주주의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묻고 싶습니다. ‘진짜 민주주의’를 하려면 아예 주민들이 직접 서대문구의 정책을 내야 한다는 측면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문석진: 필요하죠. 앞으로는 정부도, 서울시도 주민자치회를 강화시켜 갈 거예요. 주민들이 그저 주민참여예산으로 예산 의견이나 내는 식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정책 부분까지 제시하고, 행정의 거버넌스를 통해 구체적으로 작동되도록 주체로 들어오라는 것이죠.


리: 그게 가능할까요? 많이들 노력은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문석진: 많은 역량이 필요하죠.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일정하게 영역을 개발해 가야 해요. 지금은 작은 예산 단위를 그분들께 할당해 드리고 참여해서 실행해 나가는 과정에 그쳤다면, 앞으로는 이 영역을 더 크게 확대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실력도 늘게 되겠죠. 그래서 구청장과 시민이 시민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서만 이야기를 내는 게 아니라 함께 내는 거에요.


리: 서대문구의 매력은 뭐라고 보세요?


문석진: 서대문구는 산이 다섯 개고, 대학이 아홉 개거든요. 그만큼 자연 환경과 교육환경이 좋은 거죠. 그리고 도시가 번잡스럽지도 않고요. 쉽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공원이 많고, 대학도 많은 삶의 질이 좋은 곳이죠.


리: 관내 대학이 아홉 곳 있는데, 그들과 협력을 잘 해서 정책을 펼치실 계획도 있나요?


문석진: 많이 하고 있죠. 예전에는 그런 교류가 없었지만 지금은 멘토링 사업도 많이 하고, 대학에 지원도 하고, 대학생 임대주택 사업도 하고, 청년 사회주택 사업도 하고 있어요. 그렇게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고, 대학은 또 대학 나름대로 정책을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죠.


리: 사실 청년 주거 문제는 청년이 돈은 없고, 거주할 주택은 모자라서 해결하기 힘든 난제일 것 같은데요.


문석진: 그렇지만 조그맣게라도 해결해 가야죠. 작은 기초자치단체지만, 대학생 임대주택 사업을 저희가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물론 처음에는 16명 밖에 입주를 못 시켰어요. 우리가 안 쓰던 데이케어센터를 개조해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5만원으로 입주할 수 있게 한 거죠. 그 다음에는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서 48명을 입주시켰어요. 이 역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5만원. 그 대신 멘토링 봉사를 하게 했어요.

대학생 주거난 해소를 위해 서대문구에 최초로 만들어진 홍제동 행복기숙사

리: 아까 이야기한 부분들이 서로 연결되네요?


문석진: 멘토링은 지역 사회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업이에요. 이런 것도 매우 중요하잖아요? 또 행복 기숙사도 만들었죠. 이건 중앙정부가 우리 구와 함께 했던 사업인데, 연합기숙사에 516명을 입주시켰어요. 또 청년들한테도 1인 주택을 공급해서 앞으로의 자립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고 있죠.


리: 8년하시고 4년 더 하시려는 거보니까 구청장이 좀 몸에 맞나 봐요?


문석진: 전 즐겁고 기쁘게 하고 있어요. 우선 제가 생각했던 내용들의 결과물이 나오니까 사회도 바꾸고, 지역도 바꾸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기쁨을 느끼죠. 또 그래서 주민들이 저를 만났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저 역시 기쁜 일이죠.


리: 퇴임하실 때 구민들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문석진: 예전에 그런 표현이 있어요. ‘시장님, 시장님, 우리 시장님.’ 그런데 저는 이제 ‘구청장님, 구청장님, 우리 구청장님.’ 이런 정도가 나오면 좋겠죠. 그러니까 항상 구민들 마음 속에 있는 거죠. 이 구청장은 나의 문제를 항상 생각해주는 사람, 내가 힘들어하면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든 관여해주려는 사람. 그런 것이죠.


리: 아드님 결혼하실 때 안 알려서 화제가 되셨죠?


문석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친구들하고 친척만 불러서 소박하게 대학교에서 했죠. 화환도 없이 했어요. 사돈댁에서 누가 모르고 두 개인가 세 개인가 보낸 게 있었는데, 그것도 다 보내 버렸죠.


리: 마지막으로, 스스로 생각할 때 본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문석진: 기본적으로는 신앙의 길을 잘 지켜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믿으려고 하고요. 제가 친구들에 비해서 잘났거나 똑똑하지 않은데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이 나를 도구로 써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쓰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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