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노무현을 믿은 사람, 이제는 그의 못다한 꿈을 시흥에서 이루고 싶다: 시흥시장 후보 임병택 인터뷰

조회수 2018. 5. 21. 10: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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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지방선거 특집: 시흥시장 후보 임병택 인터뷰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쩌다가 선거에 출마하셔서 또 이 고생을 하고 계십니까?


임병택(시흥시장 후보): 첫 질문부터 공격적인 질문을 하시네요. 정치인 임병택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봤습니다. 20대 때 노무현 대통령님을 만나서 노사모 창립회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청년지방 도의원을 두 번 하고, 더불어민주당 전국 청년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으로 문재인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대교체의 첫 선봉장 역할을 제가 할 수밖에 없죠.


리: 청년 코스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은 좌절을 겪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그런 좌절이 없었나요?


임병택: 어마어마했죠. 젊은 정치인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돈이 많지 않으면 힘들어요. 대형 현수막만 해도 돈이 많으면 중심가에 거는데 돈이 없으면 어디 변두리에 얻기도 힘들죠. 지금 1990년대 학번, 그러니까 1970년대에 태어난 자치단체장이 없는 거로 알거든요.


리: 40대 중반도 없으면 50-60대가 다 쥐고 있다는 거네요?


임병택: 그래서 공천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뛰었죠. 전국청년위원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부딪혀서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공천심사위원들과 유력 정치인들에게 전화, 문자 한 통 하나 보내지 않았어요. 정면승부를 하고 싶었어요.


리: 사실 많은 사람이 경선에서 패배할 거로 예측했는데 이긴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임병택: 승리의 경험을 믿었어요. 제가 노사모 출신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2002년 당시 노무현의 진심이 이인제를 이길 수 있을 거라 봤던, 결국 광주 경선에서 승리했던 경험이 있거든요.



처음으로 노짱을 믿은 사람, 마지막까지 노짱을 이어받으려는 사람


리: 원래 어디 출신이세요?


임병택: 전남 여수 출신이에요. 전남대 법대 다닐 때 노사모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0년 6월 6일 창립회원이 됐죠. 그리고 창립총회장에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처음 봤죠.


리: 2000년만 해도 호남에서 그렇게까지 노무현이 세를 떨치던 시절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요.


임병택: 제 졸저 『담쟁이의 꿈』을 보면 나와 있는데요. 제 위로 누나가 네 분 계시는데, 전라도 여수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부산에 있는 야간 산업체 고등학교를 갑니다. 낮에는 부산 신발, 어묵 공장에서 일하며 여공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저도 부산에 종종 갔는데, 갈 때마다 누나들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러다 그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수고하는 부산의 정치지도자 노무현에 대해서 알게 됐던 거죠.

부산 태종대에서 누나들과 함께 찍은 사진. 부산에서 누나들을 도와준 정치인 노무현을 자연스레 그는 기억하게 되었다.

리: 그때 지역감정이 심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임병택: 그래서 부산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부터는 경상도 말을 썼어요.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숨겨야 했죠.


리: 대학교는 언제 들어가셨어요?


임병택: 1997학번으로 들어갔어요. 나이로는 1993학번인데 군대 제대하고 호텔 보이 생활하면서 돈을 벌어서 들어갔어요. 그렇게 전남대 법대에 가서 고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리: 전남대가 운동권이 센 데, 같이 운동하진 않았나요?


임병택: 학생운동이 너무 편협한 길로 갔죠. 학생들과 멀어지고 극소수의 이념적으로 경도된 학생들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전 노사모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서울에 노사모 사무실이 2001년에 처음 생기며 상근자를 구하는 데 아무도 지원을 안 한다고 해서, 6개월만 할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리: 상근 생활은 즐거우셨어요?


임병택: 경제적 부분만 빼고는 너무 즐거웠어요. 그때 활동비로 50만 원을 받았는데, 한 달에 거의 300~400만 원을 썼어요. 30만 원짜리 고시원 얻고, 아침 저녁은 제 돈으로 먹었고. 또 어디서,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노사모 결성식을 한다고 하면 비행기 표도 제 돈으로 끊어서 가고요.


리: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 고생을 해요?


임병택: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한다고 어머니를 속였죠.


리: 아이고… 마음 아프지 않았어요?


임병택: 6개월 도와주고 내려가면 고시 패스할 거란 자신감도 있었어요. 갚으면 되겠지 하고…


리: 어렸는데 어떻게 발탁이 된 거예요? 아무도 안 한다고 했을 리는 없는데.


임병택: 그 당시만 해도 아무도 안 하겠다고 했어요. 전국에서 만들어지는 노사모를 중앙 사무국 이름으로 인증하고, 관련 소식을 노사모 메인 게시판에 올리는 역할을 했죠.


리: 이런 열성 팬이 호남에서 탄생했다는 것도 참 재밌네요.


임병택: 그러니까 노짱이 저를 조금 눈여겨보신 듯합니다. 만났을 때 “내가 자네 어머니께 너무 죄송하네. 여수 내려가면 내가 꼭 자네 어머님 팔짱 끼고 사진 찍어주겠네.” 하셔서 찍어 주신 사진도 저기 걸려 있어요. 처음으로 노사모를 통해, 돈을 써가며 노무현에게 정치를 배운 사람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리: 상근 끝나고는 다시 내려가서 공부했나요?


임병택: 네, 고시반 들어가서 공부를 했죠. 그런데,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에 정당 사상 최초로 국민경선제가 도입됐어요. 이게 지지하는 시민들을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에 따라 판세가 달라지는 거잖아요? 노사모가 정말 필요해진 거죠.

출처: 영화 〈노무현입니다〉
한국 정당 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참여경선제

리: 광주경선이 모든 걸 뒤집었다고 알려져 있죠. 경선 전 노무현과 이인제에 대한 광주 민심은 어땠나요? 


임병택: 노무현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짠한 마음이 있어요. 쟤가 김대중을 위해서 고생한 친구다. 물론 이인제도 고마운 사람이죠. 1997년도에 DJ가 대통령 되도록 무소속 출마를 해 준, 그 엄청난 용기에 대해서…


리: 아니, 뭐 DJ가 되도록 하려고 나온 건 아니잖아요? 자기 되려고 나온 거지.


임병택: 그렇지만 ‘이인제가 안 나왔으면 DJ가 대통령 됐겠나’ 하는 생각이 호남에 깔린 거예요. 국민경선 당시 저는 광주 노사모 사무국장으로 그 전쟁을 치렀죠. 편지쓰기 운동도 하고, 경선 참여도 독려하고.

실제로 이인제의 경선불복 출마 선언 이후 이회창의 지지도는 급락했다. 유시민은 1997년 대선 당시의 이인제를 두고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리: 그러면 또 고시 공부는 물 건너간 거였군요?  


임병택: 물 건너갔죠. 그 부분은 지금도 집안에 죄송한데… 어쨌든 그래서 이번 경선도 저는 2002년 노무현처럼 진심을 가지고 밀어붙이고 부딪히면 시민의 마음, 당원의 마음이 움직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리: 사실, 진심도 진심이지만 광주 경선에서 어떻게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임병택: 정치평론가 100명 중 100명 다 광주에서는 못 이긴다고 그랬거든요. 광주 시민들의 높은 정치의식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광주 정신에 비춰봤을 때, 광주정신에 누가 맞는 사람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면 이인제보단 노무현이거든요. 물론 노무현 후보와 참모들, 그리고 저희도 워낙 열심히 했고요.


리: 그런데 얼마 전에 허성무 창원시장 후보를 만나고 왔는데, 노사모들은 다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영남의 세를 끌고 올 수 있는 사람만이 이길 수 있다고.


임병택: 그건 부산의 시각이자 바람이고, 광주 전남에서 체감되는 건 조금 달랐죠. 물론 광주만 이겨서 된 건 아니에요. 울산에서 이겨줬기 때문에 불이 붙은 거죠. 거기에 민주당의 원조 정신, 광주 정신이 더해지면서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노무현 대통령님도 “내 정치 인생에서 대통령 당선보다 광주 경선 승리가 더 기뻤다”고 하셨어요. 저도 그래요. 이번에 당선되어도 그때만큼 기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거기에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젠 제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출처: 영화 〈노무현입니다〉
광주 경선 현장에서 노사모 회원들은 열성적 선거운동을 벌였다. 가운데의 주황색 옷이 당시 임병택 후보.

리: 문 대통령 당선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하시지만, 시흥시장에 나오신 건 또 뭔가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는 것 아닌가요? 


임병택: 노무현의 억울한 서거를 누군가 극복해주기 바랐고,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문재인이라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 같아요. 지난 9년은 참 불편한 세월이었죠. 노 대통령께서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노사모 했던 사람들, 많이 기죽어있죠?” 봉하에 내려가시면, 노사모가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자신이 증언하고, 살아 있는 증거가 되겠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어요.


리: 대통령 본인이요?


임병택: 네. 저는 삼손의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이었던 것처럼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힘의 원천은 노사모로 상징되는 시민그룹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수구언론, 수구진영이 그 머리카락을 없애려고 엄청난 상징조작을 했죠. 사실 노사모 회원은 인터넷 가입만 하면 누구나 될 수 있어요. 그런데 계속 노사모 회원들이 행패를 부렸다고 계속 보도해요. 박근혜 면도칼 피습사건 때도 ‘노사모 회원 출신이 테러했다’는 게 헤드라인이었고요. 그러면 일반 국민들은 노사모 하면 과격하다는 이미지가 생기죠. 대통령 주변 참모들도 노사모를 멀리하라고 국민에게 다가가라고 조언했어요. 심지어 홍위병이라는 소리까지 있었죠. 그래서 노사모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예와 자긍심이 엄청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참여해서 자신을 세워줬던 노사모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올 수 없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죠. 저도 똑같아요. 이번 경선도 저를 도와주시는 시민 그룹들이 안 계셨으면 이길 수 없었어요. 임병택이라는 사람을 자신들의 뜻을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도와줬기에 이길 수 있었죠.


리: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하나도 안 챙긴다는 소리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빚진 게 없으니까 가능한 건데, 노짱도 그런 타입이었는데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나요? 사실 경륜도 많이 모자랐을 텐데요.


임병택: 사실 백원우 선배의 도움이 컸죠. 대선 끝나고 다시 공부하러 학교로 돌아갔는데 전혀 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2004년 총선에 백원우 선배가 시흥에서 출마할 건데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리: 그렇게 시흥이랑 연을 맺게 됐군요.


임병택: 네. 백원우 선배가 청와대 가는 것도 좋지만 국회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다고 하셔서 보좌관으로 있었어요. 그러다 2006년 지방선거 때, 우리 당이 도의원 후보가 없었어요. 그때 분위기가 어차피 지는 선거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후보를 안 낼 수는 없으니까 출마도 경험이라는 조언을 받아서 출마했죠. 낙선한 뒤 그제야 청와대를 가게 됐죠.


리: 인생곡선이 참 대단하네요… 노 대통령께서는 본인을 어떻게 부르셨어요?


임병택: ‘샤인’ 님이라고 불렀어요. 제 이름을 자체를 모르셨어요. 사실 저도 노사모의 누구 아냐고 하면서 이름 말하면 몰라요. 지금도 대부분 그냥 아이디만 알아요. 청와대에서도 ‘샤인’ 님이라고 불렀어요. “샤인 님, 잘 되나요? 할 만한가요?” 이렇게요.


리: 나름 일국의 대통령인데, 평등하게 불렀네요.


임병택: 한 번도 하대하신 적이 없어요.

출처: 영화 〈노무현입니다〉
당시 노사모는 오프라인에서도 이름이 아니라 닉네임으로 서로를 불렀다. 명계남의 닉네임은 바밤바…

리: 그 나잇대에 경력이 풍부하지도 않은데 청와대에 4급 행정관으로 간다는 건 굉장히 높은 자리에요. 어떤 걸 느끼고 배우셨나요? 


임병택: 제가 배치된 게 국정홍보비서관실이었어요. 제 역할은, 노무현 대통령님이 퇴임 후에 하려고 하셨던, 깨어 있는 시민들을 조직해서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지키자, 민주주의 2.0을 실현하자.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제 노사모 경력, 온라인 경력이 필요하셨던 거죠. 그래서 온라인 논객들과 교류를 담당하기도 하고, 청와대에 부르기도 하고요.


리: 놀라운데요?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 잉여들을 청와대에 불러서 이야기하는 셈이잖아요.


임병택: 그렇죠. 그러다가 사회조정비서관실로 옮겨서는 시민사회와의 소통을 주로 담당했죠. 대통령님이 지방 행사를 가시면 전날 미리 가서 노사모 회원들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게 2007년도의 문화였어요. 대통령님이 본인이 현직으로 있을 때, 노사모를 중심으로 한 참여 시민들을 만나고 그분들한테 자부심을 주고 싶어 하셨거든요. 오시면 내려서 악수하시고 아이들 있으면 쓰다듬어 주셨어요.


리: 2007년 대선 때는 지켜보면서 어떠셨어요?


임병택: 질 거라고 생각했죠. 대선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점심쯤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들어오더라고요. 인수 초기 작업을 하기 위한 팀이 들어온 거죠.


리: 뭘 이렇게 빨리…


임병택: 외로운 고성이 침탈당한다는 느낌이었죠. 어차피 지는 거였기는 하지만요. 다시 이 청와대라는 곳으로 돌아와서 옥상에서 경복궁을 보고 싶었어요. 문재인 대통령님 되고 나서, 사실은 제 선거를 치러서 이긴 후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당원들이 단체 관람을 예약해서 그때 같이 가서 다시 볼 수 있었죠.


리: 2008년부터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임병택: 2008년 4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바로 두 달 만에 총선이 있었어요. 그때 백원우 선배가 다시 출마했는데, 제가 보좌관 출신이니까 다시 복귀해서 선거운동을 했죠. 정말 쉽지 않을 거라고 다들 예상한 선거였는데 백원우 선배가 열심히 싸워서 이겼어요. 그 후 수석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봉하마을에 내려가 계신 대통령님 지원 업무를 맡게 됐죠. 당시 김경수 보좌관님하고 수시로 전화 주고받으면서 뭐가 필요한데 정부에서 안 해준다고 하면 제가 사정사정하고… 2008년 6월엔 노사모 총회를 양산에서 했는데, 노 대통령님하고 여사님이 오셨어요. 제가 사회를 봤죠.

출처: 연합뉴스
2009년 5월 29일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헌화하려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해. 여기가 어디라고!”라고 호통을 쳤던 백원우 의원

리: 쇼맨십이 좋으신가 봐요? 


임병택: 사회를 잘 봤어요. 그때 문재인 대통령님도 오셨고, 노사모 회원님들하고 좋은 시간 보내셨죠. 강연도 하셨는데, 당시 광우병 촛불집회가 한창이었어요. 그때 “청와대 쳐들어가는 건 좀 하지 마십시다. 그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러시기도 했죠. 그러고 나서 대통령님이 대검찰청에 소환되시던 날, 대검찰청 앞을 지켰죠. 그리고 서거하시는 아픔을 당했고…


리: 대통령님이 은퇴하시고 이루고자 했던 시민운동이나 민주주의 2.0이 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임병택: 저는 시민주권으로 이해해요. 당신이 주인이라는 걸 자각해주기 바란 거죠. ‘당신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슬로건을 쓰셨잖아요. 저도 시흥이라는 자치정부에서 그걸 실현하고 싶고요.


리: 노 대통령이 좋아하셨던 말이 그거잖아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깨어있는 시민의 모습은 잘 보였지만 조직화가 잘 되었는지는 항상 의문이거든요.


임병택: 조직화를 하고 싶어 하셨죠. 봉하마을 내려가서도 플랫폼을 만들고 논의하고, 토론하고, 저술 활동을 하고 싶어 하셨죠. 사실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정치참여, 시민 참여하기가 벅차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SNS가 생겼어요. 굳이 컴퓨터 앞에 앉지 않아도 스마트폰을 통해 조직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죠. 이번 촛불혁명도 그랬죠. 페이스북의 탄생이 조직화의 기폭제였다고 생각해요.

출처: 오마이뉴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늘 강조한 말이었다.

돈 없이도, 거짓말 없이도 정치하고 싶다


리: 아픈 일을 겪으시고 의원실에 계속 계셨나요?…


임병택: 2009년에 아픔을 당하고 2010년에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백원우 선배께 출마하겠다고 했어요. 대통령님은 정치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한 번 해봐야겠다 생각했죠.

출처: 노무현 사료관
사실은 정치하라는 말에 가까웠던 ‘정치하지 마라’라는 말.

리: 그 글은 사실은 정치하라는 거잖아요? 다만 각오하고 해라. 


임병택: 대통령님 뜻은 거짓말을 안 해도, 돈이 없어도 정치할 수 있는 환경 만들자는 거였죠. 그런데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지금 당에서 전국청년위원회에 예산을 한 푼도 배정을 안 해줘요. 너무 어이없는 게 현수막 거는 데는 수천만 원을 쓰면서 전국청년위원회 자치예산은 확보를 안 해줘요.


리: 굉장히 희한한데요… 지금 청년 목소리가 거의 대변이 안 되잖아요?


임병택: 그러니까요. 청년에 대한 지원책이 없어요. 적어도 저쪽 당은 이준석이나 손수조 같은 키즈들을 키웠잖아요.


리: 제 생각에는 그럴 바에는 안 키우는 게(…)


임병택: 키우지는 않아도 공정한 판은 만들어줘야 된다는 거죠. 선거법 자체가 청년들한테 엄청 불리해요. 명함 뿌리는 것도, 결혼을 안 했으면 자기하고 부모님밖에 못 뿌려요. 그런데 연세 드신 분은 자기, 자기 아내, 부모님, 아들딸이 다 함께 뿌릴 수 있죠. 이런 불공평한 걸 아무도 지적 안 해요. 문자도 돈이 많으면 몇천만 원을 들여서 문자를 보낼 수 있는데, 돈이 없는 청년 후보가 당장 경선 통과도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문자를 보내겠어요?


리: 어떻게 보면 지방에서 정치한다는 사람이 지역 유지와 결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런 데 있겠네요.


임병택: 그러니까 돈 없이 정치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선배님들이 아무런 지적을 안 하세요. 관심도 없어요. 그러니까 전국에 수많은 청운의 꿈을 가진 청년 정치인들이 낙엽처럼 쓰러지잖아요. 지금 제가 전국에서 가장 젊은 후보에요.


리: 어떻게 보면 슬프네요. 마흔다섯이신데…


임병택: 강남구에 여선웅 후보가 경선에서 살아남으면 최연소 후보가 되기는 할 텐데, 쉽지는 않을 거예요. 싸움 자체가 불공정해요. 동네 유지급 후보하고 청년 후보가 공정한 경선이 가능해요? 당원을 모으는 것부터 차이가 나요.

1983년생 여선웅 예비후보는 예비를 뗄 수 있을까

리: 그래서 청년 후보한테 가점을 주고 그러지 않나요? 


임병택: 득표의 10%를 더해주는 게 무슨 효과가 있겠어요. 10%를 그냥 더해주는 것도 아니고 득표의 10%는 실질적 가점이 아니죠. 중앙당에서는 그걸로 생색내는 거고요. 이런 식으로는 청년 정치가 못 살아요. 후원회도 없죠, 돈도 없죠, 권리당원들하고 스킨십을 어떻게 해요? 열정으로 됩니까?


리: 청년정치가 왜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임병택: 청년을 대변하는, 정서적 공감대를 이루는 대표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여성의 대표자가 있듯이 말이죠. 또 서구 민주주의 정당들의 발전사를 보면 젊어서부터 정치 훈련을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30대에 총리하고 그러는 거죠. 또 그렇게 하다 보면 싹수가 노란 사람들은 커팅이 됩니다. 못났거나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인 사람은 육성단계에서 커트가 돼요. 그런데 지금처럼 그냥 스카우트하면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스카우트 돼요. 시민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단순히 명성에 의해서 공천받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리: 도의원 이야기로 조금 넘어가 보죠. 2010년에 바로 지방선거에서 도의원이 되신 거죠? 되어보니까 어땠나요?


임병택: 시민들을 계속 접촉하면서 소통하려고 했어요. 사람들이 의원이 자기들하고 먼 존재라고 생각해요. 제가 시흥이 지역구인데, 퇴근하고 오면 “왜 이렇게 시흥에 자주 오세요?” 하는 분도 계세요. 도의원이니까 수원에만 있는 줄 아는 거죠. 또 진짜 많이 들은 소리가 “기사님은 어디 가셨어요? 왜 직접 운전하세요?”에요. 그게 평균적인 국민 정서에요. 아직도 도의원, 시의원이 높은 사람이에요. 저는 당신들의 심부름꾼이라는 걸 실천하고 싶었어요.


리: 사실 온갖 민원이 들어오잖아요.


임병택: 그렇죠. 간단한 건, 공원에 휠체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달라는 것부터 시작해서요. 제가 진짜 가슴 아팠던 사연이, 베트남 여성하고 결혼하신 분이 있었는데, 아내가 쌍둥이를 낳았어요. 쌍둥이가 어린이집을 가야 하는데, 한 명은 지금 서류상 베트남으로 출국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어린이집에서는 받아줄 수 없고, 시청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하고. 그래서 쌍둥이 중 한 명만 어린이집을 다니고, 다른 한 명은 그냥 집에 방치된 거예요.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죠. 이야기를 듣고 시청 공무원을 불렀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그러면 또 법이 어떻고, 규정이 어떻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화를 냈죠. 이거 해결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그래서 결국 1주일 만에 다 해결해줬어요.


리: 갈구면 다 되는 건가요…


임병택: 공무원들의 인식과 민원 당사자들의 지식 수준, 처한 상황에 따라서 민원이 처리되는 게 천차만별이에요. 시장의 마인드가 바뀌면 시 공무원들의 마인드도 바뀌어야 해요. 그러면 사회가 바뀌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바꿔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시장 직속 민원 종합상담소를 두겠다고 한 것도 그런 취지에요.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몰라서, 민원을 이야기하는 법이 서툴러서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양다리를 못 쓰시는 어머님이 계셨는데, 독거노인으로 방치되다가 다른 할머니가 뒤늦게 도와달라고 찾아오셨어요. 제가 그분을 업고 병원으로 가서 장애등급을 받게 도와드렸죠.


리: 병원을 아예 안 간 거예요?


임병택: 그렇죠. 결국 복지 사각지대인 건데, 복지담당 공무원들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는 없는 게 그들이 엄청난 일에 시달려요. 그런 사각지대를 해소하려면 시민사회의 협조와 도움이 없어선 안 되는 거죠.


리: 시민사회요?


임병택: 어떻게 공무원들이 모든 사람을 챙기겠어요. 적십자 회원들, 자율방범대, 새마을부녀회 같은 게 있잖아요. 자원봉사센터마다 자원봉사자들도 있고요. 교회도 있고요. 세 모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복지 거버넌스를 자치정부에서 만들어야죠.


리: 그러면 시민사회들에게 인센티브도 주고요?


임병택: 돈으로는 못 주겠죠. 현재는 공영주차장 2시간 무료권 이런 정도만 주는 현실이에요. 그러한 간접적인 혜택을 확대해 드릴 수는 있겠죠. 이런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요. 그보다,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이 존경받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돼요.


리: 그게 작은 마을 단위면 모르겠는데 시흥만 해도 굉장히 복잡한 도시잖아요? 옆집 뭐 하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뿌듯함을 느끼기가 쉬울까요?


임병택: 저는 있다고 봐요. 자원봉사자 공원을 만들어서 그분들 이름을 새긴 나무를 심거나, 공정한 심사를 거쳐서 명예의 전당 같은 걸 만드는 거죠. 동사무소 벽면에 자원봉사 열심히 했다고 할머니 이름을 걸어주는 거죠. 그러면 손자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겠어요.


리: 단순히 돈으로 때우는 데만은 한계가 있고…


임병택: 중앙정부에서 받는 데도 한계가 있고요. 또 성남시처럼 재산세가 많은 동네도 아니고요. 어쩔 수 없이 자발적 시민연대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한 자원봉사자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건 차기시장의 리더십인 거고요.


리: 도의원 두 번 하셨는데 1기, 2기 뭐가 다른가요?


임병택: 경험이 쌓이죠. 재선되니까 후배들이 생기고요. 저보다 젊은 도의원들이 초선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도권 청년 지방의원들 모임인 ‘푸른 청년회’를 만들었어요. 여선웅 의원도 있고요. 서로 정보 교류하고 MT도 가고 너무 재미있게 보냈죠. 그렇게 네트워킹을 하는 거죠.


리: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문제 해결도 더 쉬워지나요?


임병택: 그렇죠. 당장 우리 동네에 조례를 만드는 데 다른 동네 조례를 참고할 수도 있고요. 청년 일자리 지원 조례를 각자 지역구에서 발의했어요. 그 동네에 시장이 좋은 정책을 내면 벤치마킹하기도 하고요.


리: 그러니까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임병택: 경기도 공공기관에서 청년의무고용제를 지키게끔 하고, 그걸 공공기관장의 인사평가에 반영하도록 했어요. 사실 지금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ㅍㅍㅅㅅ가 훌륭한 매체기도 하지만, 선배 정치인분들이 청년 정치인들을 지원하도록 뭔가 남기고 싶은 거예요. 국회의원들은, 지역위원장은 청년 정치인을 본인의 국회의원 당선을 위한 도구로 봐요. 그러니 청년 정치인들이 지역위원장한테 잡혀서 기를 못 펴죠. 그러니까 제가 목이 터져라 싸우는 거고요. 정말 돈 없이 정치하는 정치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거짓말하지 않는 정치문화를 만들고 싶고요.



낭만이 넘치는 최첨단 도시 시흥을 그린다


리: 이번에 나오면서,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임병택: 한국의 실리콘 밸리를 만들고 싶어요. 샌프란시스코와 스탠퍼드 대학, 실리콘 밸리가 3각 연맹을 통해서 미국의 성장동력이 되고 있잖아요. 시흥에 서울대 스마트캠퍼스가 작년에 착공했어요. 4차산업중심연구인력과 대학원 관련 시설들이 올 예정이고, 그러면 인공지능, IoT, 자율주행 연구단지 등이 구현되겠죠.

출처: 서울신문
시흥의 신성장동력이 될 서울대학교 시흥 스마트캠퍼스

리: 그렇게 연구개발을 하려면 단지가 꽤 커야 하지 않나요? 


임병택: 20만 평(66만㎡)이에요. 배곧신도시에 작년에 착공을 했어요. 주변 그린벨트를 조정해서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실리콘밸리 같은 첨단산업단지를 유치하는 게 제 그랜드플랜입니다.


리: 베드타운을 벗어나 시흥시 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 문화를 자리 잡게 할 계획이 있나요.


임병택: 미래전략 차원에서 시흥이 4차산업혁명 중심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울대학교 시흥 스마트 캠퍼스를 품은 곳이잖아요. 또 60%가 넘는 그린벨트 때문에 지금 시흥이 띄엄띄엄 개발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의 그린벨트를 공원화해서 쾌적한 삶의 질이 보장되는 도시를 만들고 싶어요.


리: 사실 이번에 인터뷰하는 곳마다 스마트 시티라든지 스타트업 유치를 이야기하는데, 사실 대단히 많은 예산, 단지, 주요 기관과의 인접성 같은 조건이 필요해요. 이걸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세요?


임병택: 서울대 시흥 스마트 캠퍼스가 있죠. 또 시흥 스마트허브라는 제조 중심 국가 산업단지가 이미 있어요. 이걸 합쳐서 고부가가치 생산이 가능한 4차산업 집적 단지를 만드는 거죠.


리: 시흥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교통이라고 하는데요.


임병택: 올해 6월에 시흥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소사-원시선이 개통합니다. 그러면 서울에서 시흥시청까지 전철로 올 수 있어요. 그리고 또 지금 실시 설계 중이고, 사업자도 선정된 신안선선까지 개통되면 여의도까지 25분이면 갈 수 있어요. 여기에 마을버스 준공영제, 좀 더 나아가서 직영제를 생각했습니다. 전철역으로 시민들을 실어나르는 마을버스를 대폭 확충하는 걸 1차적으로 생각하고요.

출처: 중앙일보
시흥에 교통혁신을 가져올 소사-원시선과 신안산선

리: 학부모들 표도 중요해요. 교육 문제는 어떻게 보세요? 


임병택: 영어, 수학만 잘하는 아이들은 4차산업혁명 인재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마을 자원들을 아이들이 체험하고,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을교육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 사실 그러려면 첫 번째로 주민들의 교육 수준, 문화 수준이 높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주민들 간에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성공사례가 드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임병택: 문제를 정확히 보고 계시네요. 서울대 시흥 스마트 캠퍼스가 들어오며 서울대의 핵심 미래시설들이 오고요, 또 서울대 시흥 교육지원협력센터도 생겨요. 서울대에서 시흥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거죠. 구체적인 건 신임 시흥시장과, 6월에 새롭게 선출될 서울대 신임 총장이 만나 합의해야겠죠.


리: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게 또 보육이잖아요. 특히 시흥은 맞벌이 부부가 많은 것 같은데, 준비하는 제도가 있나요?


임병택: 일단은 문재인 정부에서 확대하려고 하는 돌봄교실이 있죠. 여기에 시흥도 플러스알파를 지원해야죠. 예산 상황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확대할 계획이고요. 또 하나 이야기하자면, 지금 시흥에 지역아동센터가 40곳이 있어요. 돌봄 선생님 파견, 인건비 지원 같은 정책을 고민합니다.


리: 이번에 사람들이 문화, 관광 정책을 굉장히 많이 내놔요. 사실 시흥 하면 서울 사람들이 떠올리는 게 오이도밖에 없는데, 어떤 정책이 있을까요?


임병택: 갯골생태공원이 있어요. 소래, 월곶 쪽으로 썰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죠. 캠핑장도 만들었는데 캠핑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고요. 살아 있는 바닷물이 들어오고 빠지는 게 굉장히 신비합니다. 또 오이도 같은 곳은 회만 먹고 갈 게 아니라 해양레포츠를 도입해야죠. 전철 타고 갈 만한 서해에 집라인 같은 걸 만들어 놓으면 나름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해안선을 따라서 청정 버스킹 거리를 조성하는 것도 목표예요. 여수 밤바다 한 곡 때문에 대한민국 청춘들이 여수 가서 야경 보잖아요. 시흥에 예술적 끼가 있는 친구들이 끼를 발산할 무대가 잘 없어요. 그런 친구들에게 조명, 스피커 지원해주면 또 나서는 친구들이 있겠죠.

출처: 여수시청
거의 로또급…

리: 이번에 시장이 되시면, 기존의 시흥시와 이후의 시흥시는 어떤 차이가 생길까요? 


임병택: 시장을 현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될 거예요. 행정도 스마트 행정이 되어야 해요. 사무실에 찾아와서 보고하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차 안에서 결재하고, 토론하는 거죠. 더 많은 현장, 더 많은 시민을 찾아가고, 시민들을 섬기는, 시민주권을 실현하는 시장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슬로건도 ‘시흥은 시민이 주인입니다’ 이고요. 그렇게 하다 보면 시민들이 시장이 자신들의 심부름꾼이라는 걸 알 수 있겠죠. 그게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믿습니다.


리: 마지막으로 정치 생활을 계속 하실 텐데, 은퇴 전까지 꼭 이루고 싶다거나,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거나 하는 게 있나요?


임병택: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면 도망자 장발장이 어떤 소도시의 시장이 되잖아요. 창녀촌에 팔려간 여성을 구하기도 하고요. 장발장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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