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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팬케이크 유랑기

조회수 2018. 5. 3. 1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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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케이크 마니아라면 필독!

그것을 처음 먹은 것은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을 거다.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큰언니가 가정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큰언니는 어린 동생들에게 문익점 같은 존재였다. 본인이 보고 배우고 느낀 신문물을 동생들에게 끊임없이 전파했다.


엄마 아빠는 빠듯한 살림에 4남매를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 일하느라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분들이었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에게 큰언니는 엄마이고 또 아빠였다.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아래로 2살, 4살, 7살 차이 나는 동생들을 먹이고 챙겨야 하는 것은 큰언니의 몫이었다.


우유와 밀가루, 베이킹소다, 설탕, 달걀을 알 수 없는 비율로 섞어 만들어낸 큰언니의 팬케이크는 낯설고 신기한 존재였다. 케이크는 꿈도 못 꾸고 슈퍼에서 파는 빵만 먹어도 감지덕지했던 꼬꼬마들은 케이크를 뚝딱 만들어내는 큰언니가 마술사 같았다. 생김새는 명절 때 먹던 부침개랑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달큼한 향, 따끈하고 고소한 그 맛은 완전히 달랐다.


그렇게 처음 만난 팬케이크는 내 마음속에서 음식 그 이상의 의미였다. 어린 시절, 늘 당연했던 엄마, 아빠의 부재로 생긴 마음의 허기를 채워준 음식. 그리고 또 집 밖 세상엔 내가 모르는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이 넘쳐난다는 걸 알게 해 준 음식. 그게 바로 팬케이크다.



팬케이크의 정석, 오사카 모그

한동안 잊었던 팬케이크를 향한 사랑이 다시 불타오른 건 오사카에 가서였다. 너무 많이 먹어서 쓰러지는 “구이다오레(食い倒れ)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오사카 말이다. ‘배불러서 쓰러질 때까지 먹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미덕인 그곳에서 교과서 같은 팬케이크를 만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버터 핑거 팬케이크 류의 미국식 팬케이크에 익숙했던 나였다. 내 인생 음식과 맛을 향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떠난 오사카 여행에서 구름을 먹는 듯 보드랍고 포근한 맛의 팬케이크를 맛본 것이다. 모그(Mog)는 팬케이크로 일대에 명성이 자자한 카페다. 평일 늦은 오후 시간임에도 약 30분 정도 웨이팅 후에야 카페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테이블석이 만석이라 다찌석에 앉았는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팬케이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 대형 철판이 있었고 그곳에서 직원은 쉴 새 없이 팬케이크를 구웠다. 반죽을 붓고 그것이 적당한 두께로 부풀어 오르면 묘기를 부리듯 단번에 뒤집었다. 그리곤 팬케이크 위에 뜨겁게 달군 인두로 “Mog”라는 이름 도장을 찍는다. 그렇게 완성된 팬케이크는 내 앞으로 바로 이동했다.


인기 No. 1 메뉴였던 플레인 팬케이크를 시켰기 때문에 버터와 메이플 시럽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심플했다. 팬케이크 그 자체는 생김새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맛이었다. 버터를 곁들이니 풍미가 배가 됐고, 메이플 시럽까지 뿌리니 완벽해졌다. 팬케이크의 교과서가 있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모그는 나에게 팬케이크의 정석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운이 나빴던 걸까? 운도 실력인 걸까? 삿포로 마루야마 팬케이크

가장 최근에 방문한 팬케이크 전문점이다. 삿포로에서 핫하다는 소문을 듣고 시내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본점으로 굳이 찾아갔다. 믿고 찾는 구글맵 리뷰어들의 반응이 꽤 뜨거웠기 때문에 시내의 분점을 놔두고 먼 걸음을 한 것이다. 평일 낮 늦은 오후임에도 제법 넓은 카페 안은 ⅔ 이상 사람들로 차 있었다. 방문한 손님들은 친구, 연인, 가족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히나 내 옆 좌석 테이블 밑에는 큼직한 리트리버 한 마리가 얌전하게 졸았고, 반대편 손님은 작은 푸들 한 마리를 안은 걸 보니 애견 동반이 가능한 카페였다. 그간 먹은 일본의 팬케이크에 실망보다는 만족이 다수였기에 의심하지 않고 “엔젤 팬케이크”를 시켰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유명해진 수플레 스타일의 팬케이크다.


섭섭지 않은 양의 과일, 아이스크림이 곁들여진 엔젤 팬케이크.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팬케이크는 그 자체로 놀라웠다. 기대감에 차 크게 잘라 한입 가득 넣었다. 엉? 이게 뭐지? 덜 익은 밀가루 맛이 확 느껴졌다. 분명 겉모습은 지금까지 먹어왔던 팬케이크와 견주어도 손색없이 먹음직스럽게 태닝 된 상태였는데 무엇이 잘못됐을까? 찬찬히 팬케이크 상태를 확인했다. 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다시 입에 넣어 보니 완벽하게 익은 상태는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라 이렇다 할 대처도 못 하고 겉 부분만 떼어 시럽 맛으로 먹었다. 분위기를 보니 내가 오기 직전에 한꺼번에 많은 주문이 밀려 있었나 보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소화하기엔 주방은 한계가 있다. 내가 운이 없어서 덜 익은 팬케이크를 만난 것이라 믿고 싶다. 팬케이크 마니아 인생에 최초의 실패라는 불명예를 기록한 삿포로 마루야마 팬케이크. 과연 그 (나에게만 준) 불명예를 회복하게 될 날이 올까?



너도 팬케이크? 홍콩 허유산 망고빤지

이걸 팬케이크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잠시 고민도 했다. 전형적인 팬케이크와 확연히 다른 생김새 때문이다. 하지만 이름에 팬케이크를 중국의 광둥어로 발음한 빤지(班戟, bān jǐ)가 뻔히 들어가므로 나의 팬케이크 컬렉션에 넣기로 한다.


한국 사람들이 홍콩에 가서 빠지지 않고 들른다는 그곳! 허유산에 망고주스를 먹으러 갔다가 망고즙이 들어간 얇은 크레이프에 생크림과 망고를 넣은 홍콩식 팬케이크, 망고빤지(芒果班戟)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 생활을 할 때도 본토로 진출한 홍콩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몇 번 먹어 보긴 했다. 하지만 홍콩에 왔으니 원조를 맛보고 싶었다.


얌전한 생김새의 망고빤지는 누구나 상상 가능한 맛이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향긋한 것들이 한데 모였으니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 없다. 게다가 진한 망고주스까지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맛본다. 빵 중심의 팬케이크가 식상하다면 한 번쯤 도전해 봐도 좋을 가벼운 팬케이크다.



단연코 인생 팬케이크, 오사카 베르뷔르

그간 국내외의 여러 팬케이크를 먹어봤지만 단연 최고로 꼽는 곳은 오사카 우메다의 오래된 건물 한구석에 위치한 팬케이크 집이다. “꼭 맛보고 말겠다”는 신념이 없이는 굳이 찾아갈 위치도, 분위기도 아닌 곳이다. 사실 찾아가는 것부터가 미션이었다. 이름과 주소만 들고 우메다 헤매기를 1시간. 포기하려는 찰나 먼저 다녀간 분들의 글을 찬찬히 둘러보다 “지하상가”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지하… 지상 건물에서 간판을 찾았으니 있을 리 만무했다. 


기쁨의 깨춤을 추며 지하상가로 가니 베르뷔르(belle-ville)라는 간판 아래 1990년대 초반 경양식집 풍의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인 가게가 있다. 이곳이 맞나 싶어 간판과 메뉴판을 다시 확인하니 틀림없이 맞다. 가게 안 손님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중반쯤? 젊은 층은 극소수, 거의 중장년층 어르신들이 많았다. 또한 가게 안에서는 담배 냄새가 풍겨 왔다. 자리마다 재떨이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저녁 6시 이후에는 흡연이 가능한 곳이라고 한다.


신문을 보거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 사이에서 기대감에 차 팬케이크가 나오길 기다렸다. 곧 일본 특유의 진한 커피와 동그란 버터 모자를 쓴 4층 팬케이크가 내 앞에 놓였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8층 팬케이크다. 인증샷 몇 컷을 찍고 식기 전에 얼른 경건한 자세로 팬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아~ 짧은 감탄이 입에서 세어 나왔다. 포동포동한 아기 볼을 앙 하고 살짝 물었을 때 느껴지는 부드러움. 봄꽃의 달콤한 향. 그간 먹어왔던 시판 팬케이크 믹스로 만든 팬케이크 100개를 압축한 듯 진하고 고소한 맛. 디저트를 먹으러 왔는데 다음 끼니까지 해결하게 만든 넉넉한 양까지. 가게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처럼,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쌓아 온 오랜 세월의 맛이었다.


그렇게 내 가슴에 콕 박힌 인생 팬케이크, 베르뷔르. 내 생애 마지막 팬케이크를 먹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베르뷔르의 팬케이크를 먹기 위해 다시 그 혼돈의 오사카를 찾을 것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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