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까지 중퇴한 강성 운동권, 문재인 곁에서 생활 속 진보를 이야기하다

조회수 2018. 4. 24. 16: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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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희 군포시장 예비후보 인터뷰

문재인을 위하여 군포로 나서리


리: 어쩌다가 출마하게 되신 건가요?


한대희: 16년 총선, 당시 군포시가 갑과 을로 분구될 때 출마하려 했습니다. 당시 공천이 김종인 대표에 의해 전횡적으로 이뤄지는 바람에 예비후보 단계에서 낙마했죠. 김종인 대표는 제 대학교 과 선배이기도 한데(…) 제가 이해찬 맨입니다만, 이해찬 대표가 날아가시는 판이었는걸요.


그 후로는 대선 준비에 물두했는데, 다행히 촛불 시민혁명을 통해 1년 일찍 치뤄진 대선에서 문재인 대표가 대승을 거뒀지요. 대선 이후 여러 진로를 고민했는데 제가 그나마 군포에서는 누구보다 문재인 정부의 철학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제 역할을 찾아보려 했지요.

20년이면 최순실도 출소하는 세월이다

리: 현역 시장님이 한 번만 더 시장을 하면 최다 시장 기록을 세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대희: 그분이 사실은 우리 민주당에서 다섯 번 공천을 받았어요. 지난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당, 안철수 당으로 탈당을 하셨죠. 이걸 그냥 보고 있으면 그분이 세력을 등에 업고 또 당선되는 적폐적인 상황이 될 것 같아서, 저라도 문재인 시대를 열어가는 데 있어서 일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리: 아까부터 문재인을 굉장히 강조하시는데, 너무 강조하시니까 오히려 뭔가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 이번 선거에서 모두가 문재인만 내세우고 있거든요.


한대희: 제가 문재인 대통령의 입당원서를 받은 실무 책임자였어요. 2011년도에 ‘혁신과 통합’이라는 야권 통합단체를 만들 때부터 참여해 조직위원장을 맡았어요. 여기서 ‘시민통합당’이라는 가설정당을 만들어서 민주당과 통합했는데, 이 시민통합당의 당원 1호가 문재인 대통령이었어요. (주: 문재인 등 친노계가 주축인 ‘혁신과 통합’은 정당이 아니라 합당이 불가능했기에, 시민통합당을 만들어 합당한 것)

포츈지가 선정한 위대한 지도자 4위라 카더라…



고교시절부터 투쟁!


리: 아예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죠. 출생지가 군포는 아니시죠?


한대희: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임실군. 시골 농촌마을이죠. 교육열이 높으셨는지 형제들 중학교부터는 전주로 보내셨어요. 저도 6학년 때 전주로 전학을 와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다니러 서울에 왔죠. 군포에 처음 발을 딛은 건 85년도, 운동권 학생으로 감옥에 다녀온 뒤 현장 운동을 했어요. 93년부터는 아예 군포로 이사 와서 살고 있고요.


리: 전주 생활은 어떠셨나요?


한대희: 가족들한테는 모범생으로 돼 있었죠. 하지만 내면까지 그랬겠어요? 부모 슬하에서 벗어나 혼자 학교를 다녔으니, 좀 되바라진 측면이 있었을지도요. 술담배도 조금은 했고… 중학교를 마치고 지역 명문이었던 전주고에 입학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1980년이에요. 4월부터 시내에서 대학생들 데모가 벌어졌고, 5월 즈음해선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하잔 얘기가 돌았고, 그런 과정에 휘둘려서 징계 위기에도 처했죠. 뭐, 무사히 졸업은 했어요.


리: 전주 지역에서도, 광주 5월항쟁 때 뭔가 했었나요?


한대희: 저희 학교는 시도했지만 못 했어요. 신흥고등학교는 실제로 학내 시위를 해서 휴교령이 내려지고, 고등학생이 구속되고 그랬죠.


리: 못 해서 억울했나요? 아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거나?


한대희: 부끄럽기도 하고, 분노도 하고. 그 전에 1979년 추석 때는 서울대 다니던 형이 긴급조치로 구속되었다가 10.26 후 풀려난 일도 있었어요. 집안이 어려운 시기였죠. 저희 시골 마을이 한씨들만 사는 집성촌이고, 저희 집이 종손격이었거든요. 논 다 팔아서 서울대 보내놨더니 감옥이나 가고 그랬던 거죠.


리: 그런데 둘째도 가자마자 운동질(…)


한대희: 당시 전주고가 워낙 명문이어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외대 독일어과에 갔죠.



제 발로 운동권 서클을 찾아나선 좌빨 청년, 학교에서 투쟁!


리: 썩 좋지 않은 성적이면 외대에 가는군요. 저도 외대 출신인데(…) 어쨌든, 대학교 가자마자 운동을 고민했다던데요.


한대희: 외대가 워낙 작아서 건물이 몇 채 없잖아요. 서클이 뭐가 있는지 학생회관부터 뒤졌죠. 당시 운동권 서클은 비합법이니까 간판을 안 붙여놔요. 문학 서클, 철학회 같은 서클에 가입하니 지하 서클에 있는 운동권 선배들이 물색을 하러 찾아왔지요.


리: 굉장한 좌빨의 씨앗이네요. 서클에선 뭘 시키던가요?


한대희: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나치 치하 투쟁을 다룬 『백장미』,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같은 책을 읽었어요. 81년 당시엔 시위가 잘 일어나지 못했어요. 80년, 소위 ‘포고령’에 의해서 학내 운동 서클의 중요 분자들이 전부 다 강제징집됐거든요. 역량도 떨어졌고, 분위기도 엄혹했죠. 시위가 가끔 있긴 했어요. 5월~6월에는 국풍81이라고, 요즘으로 치면 뉴라이트 같은 우파 대학생 축제가 열렸는데, 그 반대 집회가 한 번 있었죠. 학림사건으로 강제 징집될 위험에 처한 선배들을 지키려고 스크럼 짜고 몇 백명이 데모했던 것도 있고요. 다만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고 그런 시대는 아니었어요.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희대의 관제축제 국풍 81…



군사훈련에서도 투쟁!


리: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한대희: 그 해 11월에 문무대에 입소했어요. 일종의 대학생 교련으로, 1주일간 군사집체 훈련을 받는 게 의무였죠. 교련은 한두번만 결석해도 학적변동자가 돼서 군대로 끌려갔어요. 당시 고대, 외대가 같이 훈련을 받았는데, 젊은 혈기가 있다보니 시위가 계속 벌어졌어요. 총장과 학생처장이 와서 학생들을 달래는 상황까지 이르렀죠. 5.18을 겪은지 얼마 안 됐으니 저항심도 있었을 상황인데, 젊은 애들 몇천명이 한꺼번에 모였으니 흥분이 일어난 거죠.

교련이란 정신나간 과목이 사라지기까진 그 이후로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리: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나요?


한대희: 훈련은 문제없이 마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학적변동자 공지가 붙었어요. 아마 전두환 정권 입장에선, 실제 병영 내에서 집단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게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12월 15일에 공지가 올랐는데, 1월 3일까지 전부 입대를 시켰죠. 그때 친구 2명이 강제징집을 거부하자고 저를 꼬시며 결의했어요. 그런데 둘은 말만 그렇게 하고, 결국 저만 남았더라고요.


리: ……


한대희: 군대야 갈 수 있는데, 강제로 끌려간다는 데 대한 저항감이 생기더라고요. 걸리면 감옥 가니까 친구들, 선후배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도망다니면서 겨울을 나다가, 4월에 학교로 돌아가 또 데모를 했죠. 그러다가 학교 4층에서 유인물을 돌리다가 체포됐죠. 당시 학내경찰이 있어서인지 메가폰 잡고 이야기 하려는데 이미 문을 으깨며 들어오더라고요.


리: 연행될 때 기분이 어땠나요?


한대희: 후련하기도, 아쉽기도 하고, 시위가 제대로 안 된 거니까 창피하기도 하고요. 수건으로 얼굴을 묶어서 말을 못 하게 하고, 혁대 앞 뒤를 잡고선 거의 들다시피 해서 청량리 경찰서까지 끌려갔죠. 딱 1년 6개월이 나왔어요. 대학별로 가는 교도소도 정해져 있어요. 동북권은 성동구치소. 지금 이명박이 있는 곳이 제가 있던 곳이 이전한 곳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는 데 대해선 답이 없었어요. 다만 운동의 길이 어떻게든 있을 거란 생각은 있었지요.

참고로 요즘은 꽤 살만하지만 군사정권 하 독방은 0.75평이었다(…)



감옥에서도 투쟁!


리: 감옥 생활은 어떠셨어요?


한대희: 처음에는 혼자 있을 때 두렵더라고요. 그런데 82년 하반기에 접어들며 감옥으로 들어오는 학생들이 많아졌어요. 성동구치소에서 삼청교육대 같은 걸 4주씩 강제로 시켰는데, 제가 그걸 안 받겠다고 또 싸웠죠. 그러다 영등포 교도소를 갔는데, 거기서도 그거 안 받으려고 매일 싸우고… 아침마다 묶인 채 실려나가서 훈련하는 옆에 내동댕이치고 그랬어요. 그리고 박관현 열사 사망 사건 때문에 또 단식하다가 수원교도소로 옮겼어요. 여긴 독방에만 한 스무 명 정도가 있더라고요. 그래도 옆방에 다른 학생들도 있고 하니까 한결 지낼 만 했어요.


리: 그렇게 사고치면 옥살이 늘어나지 않나요…


한대희: 특별 사면으로, 2개월을 덜 살고 나왔어요. 전두환 정권 때는 늘 그랬죠. 가둬 놓는다고 시위를 막는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통보도 없이 새벽 4시에 내보냈어요. 옷보따리 들고, 책보따리 들고 알아서 집에 갔죠.


리: 복학하셨나요?


한대희: 감옥을 살면 제적 처리가 되거든요. 뭘 해야 할지 막연해졌죠. 그런데 전두환이 갑자기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사람들에게 복학 조치를 내렸어요. 저는 가족들 때문에 복학을 안 할 수 없었죠. 그런데 또 운동 같이 하던 친구들이 대책위를 만들어서, 누구는 학교에서 후배들을 지도하자, 누구는 현장으로 가자, 이런 식으로 정했어요. 동기들은 다 4학년인데, 저는 1학년이니 학교에서 진두지휘하긴 그렇다, 그래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현장운동을 하겠다며 방을 얻고 숨은 곳이 안양권이었어요.

미국 대학을 중퇴한 이분들과 달리, 한국은 참 팍팍해진다(…)



군포와의 인연도 투쟁!


리: 군포와의 인연이 참 슬프게 시작됐네요. 그 당시 군포 모습은 어땠어요?


한대희: 산본은 축산 등을 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어요. 아직 금정역은 없던 시절이죠. 당정동, 금정동까지가 공단지대고, 명학까지 또 공장지대였어요. 그만큼이 한 생활권이었죠. 전 취업공고 보고 위장취업 하고, 준비해온 게 없는 상황에서 일단 부딪쳐보는 상황이었어요. 교회 뒷마당에서 용접 기술을 배우고... 그거라도 해 봐야 현장에 갈 수 있으니까. 취업이 안 될 때는 현장에서 노동 정치 신문 같은 거 만들어서 밤에 배포하고 그랬어요.


리: 그 당시 공장은 오히려 인력이 부족해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대희: 그런데, 그분들이 위장취업을 적발해내는 데도 선수예요. 그리고 취업이 되려면 좀 노티가 나고 굴러먹은 티가 나야 하는데, 전 너무 멀끔했는지 취업이 어려웠어요.


리: 그렇게 멀끔해 보이진 않는데요(…)


한대희: 그건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출처: 군포신문
누구나 아저씨가 된다

리: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대희: 그 이후엔 조직 문제 때문에 성남권으로 옮겨갔지요. 거기에서 감옥을 오래 했던 선배에게 지도를 받고, 대학 후배들을 현장으로 끌고 오고. 돈 얻어다가 연탄 아궁이 하나 있는 쪽방 하나 얻어주고 취업시키는 식으로 조직을 늘려간 거죠. 그래도 새파란 젊은 놈이 공장 노동자들을 데리고 노조 조직 활동하기는 쉽지 않았죠.


리: 계속 패배의 역사네요. 시위도 제대로 안 되고, 깜방 갔다와서 노동운동도 안 되고.


한대희: 그런 축적의 과정인거죠, 87년 6월항쟁까지의 과정이란 게… 그렇게 전두환과 전면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거죠. 80년 5월 지도부와 진보 인사들이 다 감옥에 가 버린 이후, 운동권을 재건하여 전두환과 전면전을 벌일 때까지 7년이 걸린 거예요.


한편으로, 그 막바지에 어쩌면 운동권이 너무 앞서갔던 게, 86년 당시 개헌대회가 폭력적으로 이뤄지는 바람에, 실제 6월항쟁 때는 소위 어른들, 김근태 선배나 문 목사님 같은 분들이 다들 감옥에 있었어요. 그 때문에, 전두환의 호헌 조치 이후, 전면투쟁을 하자는 기조는 대강 일치했지만 그것을 전국적 규모로 구성하는 데 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전두환과의 ‘전면전’ 순간까지 7년이 걸렸다



이젠 안 투쟁!


리: 87년의 승리를 뒤로 하고 출판사를 차렸다고 하던데요.


한대희: 6월항쟁의 승리 속에서도 대선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죠. 그러다 보니 직선제 개헌이 진정 승리인가 하는 회의도 있었어요. 또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열심히 탐독했지만, 동구에서 사회주의 몰락이 이어지면서 혼란이 더 커졌죠. 이것이 꿈꾸던 사회 변혁인가 고민하던 중에, 선배님들이 출판사들을 운영하던 게 있는데 맡아 보라는 제안을 했어요.


리: 직접 처음부터 만드신 건 아니고요? 출판사 이름이 뭔가요?


한대희: 80년대부터 있던 ‘한울림’이란 출판사에요. 지금도 있어요. 이젠 어린이 책을 만드는 출판사로 변신을 했죠. 제가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나서 후배들이 변신시켰어요.

지금은 잘 나가는 아동서적 출판사입니다

리: 대표가 바뀌자 출판사가 돈을 잘 벌었군요(…)


한대희: 그 이후로도 출판계 일을 했어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거든요. 어쩌면 사회 영역에서 내가 할 역할이 출판, 교육 분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2000년 무렵까진 출판 계통에서 일을 하고, 사업도 하고 그랬죠.


리: 90년대는 비교적 평탄했네요.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한대희: 사업이 잘 되거나 했다면 거기 몰두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임원도 맡기도 했지만, 언제까지 직장인 생활을 할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렇게 지쳐가던 때에, 2007년에 이해찬 선배님이 열린우리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시기로 했다는 얘기가 들렸어요. 83년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따로 뵙지 않았는데… 또 연락이 와서 모시게 되며 정치에 입문하게 됐죠.

“너, 내 동료가 돼라!”

리: 이해찬 총리하고는 어떻게 처음 알게 된 거예요?


한대희: 서울대 다니면서 데모했다는 저희 형님이 돌베개 출판사 대표신데, 거길 설립한 분이 이해찬 총리에요. 정치를 하시는 동안은 제가 안 봤는데, 주변 선후배들이 경선을 좀 도우면 어떻겠느냐 하면서 끌고 갔어요. 다만 아시다시피 경선에서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했지요.



이해찬을 만나 정치를 시작하다


리: 이후 이해찬 총리는 존재감이 좀 약하긴 했죠.


한대희: 그 이후 08 총선은 안 나오셨고, 그동안의 경험을 집대성하고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취지로 재단법인 광장을 만드셨어요. 그 과정에서 총리를 모시고 다니고 하면서, 우리들 말로 하자면 ‘여의도 건달들’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가, 아직 노무현 정부의 공과가 정리가 안 된 상황이잖아요. 친노는 ‘폐족’이란 얘기도 있었고. 그러던 와중에, 08년에 처음으로 서울시에서 직선제 교육감 선거를 했는데, 그것도 졌죠.


리: 운동도 안 되고 출판사도 안 되고 선거도 안 되고(…)


한대희: 그러다가 09년 경기도도 교육감 직선제 선거를 한다고 하니까, 김상곤 교수를 추천하여, 민주당과 야권의 지원을 이끌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2월쯤부턴 그 일에 몰두를 하게 되었죠. 교육감 선거는 당 차원에서 할 수 없으니, 김상곤 캠프와 민주당, 전교조, 진보세력 등을 조율하는 정무적 역할을 했죠.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있게 기획도 해야 했고요.


리: 무상급식의 그 기적!


한대희: 처음 선거 때 무상급식은 주요 이슈가 아니었어요. 공약과제이긴 했지만 무상급식 같은 일을 가시화할 수 있을지는 상상을 못했죠. 당시 우리 당 도의원이 정원 120여 명 중에 7명인가 그랬을 거예요. 그 7명이 머리 깎고 싸워서 무상급식 하자고 한 거예요. 그리고 2010년 선거에서는 무상급식, 보편적 복지가 전국적 이슈가 되어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는 졌지만 자치단체장을 많이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죠.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해서, 과오는 인정하면서 진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공통 화두를 찾아낸 것이에요.

물론 무상급식을 전국에 퍼뜨린 분은 이분이다(…)

리: 소위 투사라는 분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그중에서도 운동에 있어서는 급진성이 강한 편이셨어요. 민주당 쪽에서 일하시면서 불편함은 없으셨나요?


한대희: 90년대의 제가 내내 극복해야 할 과제였죠.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뭐라도 변화시키려면 반의 반의 반 걸음이라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아요. 총칼로 세상을 뒤집지 말자, 표로 세상을 바꾸자는 게 말하자면 87년 우리 사회가 했던 약속이에요. 그 속에서 과제를 정하고 헌신하는 것이 앞으로의 길이겠구나 생각했지요.


리: 하필 민주당 활동을 하신 10년이 민주당 최악의 시기였어요.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한대희: 소위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집단으로 취급되었죠. 사실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사조 속에서 참여정부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인데요, 아직 평가가 정리되진 않았지만 일부 오류를 스스로 인정한 부분도 있어요.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야권통합운동을 비롯한 여러 운동을 했는데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만들어온 세력과 시민 운동 세력, 진보 세력이 융화할 수 있는 지점이 필요했어요. 보편적 복지 같은 것, 무상급식이 그 예이겠죠. 참여정부가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반성해야 할 부분과 진보의 가치가 결합하여, 미래의 가치를 창출한 것이죠.


리: 모든 건 과정이다…


한대희: 그러는 동안에는 갈등과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저로선 구태로 찍히고 비난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문재인을 부산에서 데려와서 대선후보로 만들어낸 거예요. 70, 80년대 사회 변화를 겪어온 선배들의 지혜와 경험, 당장 이기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는 힘이 그 바탕에 있었던 것 같아요.

산채로 잡혀온 문재인

리: 본인이 보시는 노무현, 이해찬, 문재인은 어떤 게 비슷하고 어떤 게 다른가요?


한대희: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히 사적 인연이 없었어요. 먼 발치에서만 보았지요. 지금 대통령께서는 의제를 상당히 빠른 속도로 흡수하세요. 그리고 그 자체가 선함, 솔직 담백함 그 자체세요. 이해찬 총리께서는 정말 강한 분이세요. 이미지가 아니라 정신력이 대단히 강한 분이죠. 정권을 잃고, 대통령 두 분 서거하시는 상황에서 책임을 감수하시고, 주류세력이 아니면서도 많은 세력을 모두 아우르셨죠. 스스로 뭘 하겠다는 의지는 강하지 않으시거든요. 그러나 문재인, 노무현, 이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강한 책임의식을 갖고 계세요.

명언 제조기 이해찬 선생. 내 역사에 대해서는 따뜻하겠지

리: 지난 선거에도 출마하시려 했는데, 그땐 어떤 이유였나요?


한대희: 12년 대선에서 당 통합운동도 하고, 원탁회의 통해서 후보 보좌하는 등의 일을 했지만, 결국 지더라고요. 이후 다음 대선을 이기려면 경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전선에서 제가 어디든 힘을 쏟아서 내 역할을 해내고 싶었죠. 그래서 김태년 의원이 도당위원장을 맡으면서, 제가 사무처장을 맡게 된 거에요. 지역 시도위원 핵심당원들이 결국 대선에서 표를 모으는 핵심 역할을 하더라고요.


리: 그 이후 총선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전략공천이 내려왔어요.


한대희: 네, 전략공천에 무참하게 밀렸죠. 전략공천 문제는 당의 고유한 권한이긴 합니다.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셨는데, 갈등이 워낙 컸잖아요. 이전에 대통령 후보셨던 분이 박지원 의원과의 경선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호남에서 문재인 대표의 인기는 최악인 상황이었죠. 그래서 혁신위도 만들고 김종인 대표가 들어오는 등 외연을 확장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여길 지원하신 거예요. 결국 현수막 걸어놓고 한 달쯤 돌아다녔을까요, 전략공천이 금방 내려오더라고요. 억울하기도 했지만, 시원섭섭하기도 했어요.


리: 경선 붙었으면 이겼을까요?


한대희: 제가 그렇게 촉이 좋았던 것 같진 않아요. 쉽지 않다는 분위기였잖아요. 그런데 우리 김정우 의원도 고전 끝에 이겼죠. 우리 시의 투표 성향, 그동안의 지지를 보면 이겼을 수는 있겠다 싶어요. 그런데 군포가 혼란스러웠던 게, 총선 직전에 현 시장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안철수당으로 갔어요. 거기 발을 맞춰서 우리 당 시도의원들도 탈당하는 등 안 좋은 상황이었던 것을, 우리 이학영, 김정우 의원이 지켜낸 거예요.



그가 그리는 군포의 미래


리: 스스로 군포에서 25년 생활하셨다 하셨어요. 핵심 공약을 3개 정도 축약해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한대희: 지금 우리 김윤주 시장님께서 다섯 번 공천 받으셨으니까 거의 20년이잖아요? 경선 없이 공천을 받으실 정도거든요. 군포의 역사가 그 양반의 역사다시피 하죠. 그런데 그동안 불통의 도시가 되었다고 시민들이 평가하고 있어요. 소통은 지방자치의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혹독한 평가인 거죠. 소통, 민주주의 공론장이 열린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소망이에요. 상생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방안이 논의되었으면 하죠.


리: 불통을 통해서 야기된 문제는 어떤 게 있나요? 소통을 통해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한대희: 공무원의 인사권, 시의 이런저런 위원회들이 20년 동안 사람이 변하질 않아요. 하나의 권력이 유지되고 있어요. 복지부동이 초래되고, 새로운 혁신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가 없죠. 작년 겨울, 한 아파트 단지가 난방 열수 공급 공사를 했어요. 그런 공사를 하면 시 예산이 지원됩니다. 완공일자가 12월로 잡혔는데, 실제로 추워지기 시작하는 게 11월이었어요. 임산부, 고령 노인, 아이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당장 난방과 온수공급이 안 되니, 재난이 되어버린 거죠.


주민자치니 마을자치니 하는데도, 공적 역할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다 보니 이런 문제를 아무도 챙기지 않은 거예요. 주민들이 항의를 했는데, 시장님은 돈 달라고 해서 예산 준 죄밖에 없는데 왜 나한테 죄를 묻느냐, 하시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죠. 소통의 전제는 공감인데, 법적인 의무와 이행여부만 가지고 따지고 있는 거예요.

당시 아파트 상황

리: 산본 신시가지와 구 군포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큰데요. 오래된 문제인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한대희: 군포는 공업지역을 배경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자족기능이 뛰어난 도시였습니다.그런데 IMF 이후 수도권 공장들이 해외로 이전했고, 지가도 공단을 유지하기엔 너무 높아져서 공단이 공동화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그 공단이 경제기지로 재생되어야 구도심 재생도 가능하다고 봐요. 그런데 이 공단지역은 군포 뿐 아니라 의왕, 안양도 공유하고 있거든요. 세 도시간의 협의와 연대는 물론 중앙정부와의 협력이 필요한 거죠. 지금 문재인 정부가 도시재생을 이야기하고 있고, 경기도지사도 임창열 도지사 이후 처음으로 이길 수 있는 기회거든요. 시민 동의를 받고, 시끼리 협력하고, 도 정부와 중앙정부를 만나서 공동으로 해내야 할 과제지요.


리: 스마트시티, 교육복지 등도 강조하셨는데요. 여기가 안양이나 의왕 등 주변 도시에 비해 교육 여건이 그다지 좋다고 보기 힘들잖아요. 아까 이야기하신 세 개 도시를 연결하자는 것도 스마트시티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한대희: 군포도 행정동 11개 동 중 9개 동이 쇠퇴 지표에 해당하고 있어요. 균형발전, 지역발전 얘길 하지만, 수도권에서도 사실 쇠퇴하는 지역이 있는 거죠. 이런 곳에 경제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청년창업기구든 일자리 센터든, 군포, 의왕, 안양이 각각 경계를 두고 일을 해서 얼마나 효용이 있겠는가 싶어요. 공동 권역에 같이 수평적 협력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문재인 정부도 그런 곳에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하고 있거든요. 첨단, 스마트 시스템 같은 건 당연히 병행되어야 하는 거고요.

세 지역은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리: 금정역사 문제도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한대희: 금정역에 GTX가 들어오는 게 어느 정도 동의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런데 정부 논의과정을 보면 이걸 수원까지 늘리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맥락 속에서 금정역 주변 민간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사실 안양역사나 수원역사의 사례를 볼 때 그런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수 있을까…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해야 한다, 안 해야 한다는 건 민간 투자 문제가 있어 단언해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리: 시장이 되면, 내가 이거 하나만큼은 반드시 하겠다는 게 있나요?


한대희: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방 정부가 법과 제도 이상의,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모범이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예를 들어 한부모가정의 고용이나 경제 활동을 지방정부 차원에서 쿼터를 준다거나. 어르신분들 길 가다가 화장실 문제 많이 겪거든요. 이런 것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배려하고요. 노인에게 얼마를 드리고, 아이를 낳으면 얼마를 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 사회적 가치를 모색하고 실현하는 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리: 감사합니다. 군포시 최고의 맛집 하나 소개 부탁드릴게요.


한대희: 당말고개에서 산본에 가다 보면 수리산이 보이고, 거기서 동쪽을 바라보면 광교산, 백운산이 보여요. 거기 고갯마루라는 밥집이 있는데 전라도식 한식 정식 반찬이 맛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꼭 찾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역시 예비후보 추천맛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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