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의 스티브잡스, 빚 3억을 지고 재기하기까지

조회수 2018. 4. 20. 18: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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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교 관악구청장 예비후보 인터뷰

리: 휴대폰에도 그렇고, 옷에도 그렇고, 노란 리본이 있어요. 언제부터 다셨던 건가요?


정창교: 4년 전이에요. 정말 충격이었죠. 그때가 저희 청장님 선거 운동하던 땐데,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합동 분향소로 달려갔어요. 그때부터 기억하게 된 거죠. 게다가 세월호가 제기한 숙제가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고 있잖아요.


또, 자식 죽은 게 유산이냐 이런 얘기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세월호 유족들이, 가방 뒤에 리본이 달려 있는 것만 봐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대요. 이런 작은 걸로 그분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면, 해야지요.

리: 어떻게 하시다가 선거에 나오게 되신 거죠?


정창교: 지난 8년동안 유종필 구청장과 함께 일했습니다. 달동네 이미지의 낡은 관악구를 도서관도시, 인문학도시로 바꾼 분이시죠. 그분이 작년에 불출마선언을 하셨는데, 그 정책을 계승하는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리: 본인은 나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주민들을 위해서 출마했다는 건가요?


정창교: 주민들의 요구도 있고, 현황을 보니까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죠. 제가 경험을 해보니까 선거에서 제일 큰 것은 판이거든요. 제가 2004년도에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해서 낙선하고 패가망신한 적이 있어요. 상대 후보가 송영길 후보였고, 저는 민주당, 그분은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했죠. 사실 2004년 같은 경우에는 탄핵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거잖아요.

출처: 오마이뉴스
이 바람을 어찌 이기랴(…)

리: 질 거 뻔히 알면서 왜 열린우리당 안 가고 민주당에 남았던 겁니까(…)


정창교: 사실 당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 사태에서 개인의 선택은 이념과 노선보다 인간 관계때문이더라고요. 저와 함께 오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민주당 쪽 사람이 많았어요. 모교 광주고 출신의 박주선 의원, 박상천 대표, 이런 분들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리: 떨어지니까 기분이 어떻던가요?


정창교: 탄핵 바람에 6.5% 표를 얻어서, 보전도 전혀 못 받았어요. 빚만 3억이었어요. 낙선하고 나서 빚은 잔뜩 있지, 실업자지, 막막했죠… 개인적으론 자살 생각도 했었어요. 딸 얼굴 보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그때 경험을 살려 신인을 위한 지침서, 실무 관련 책을 쓰기도 했어요. 거기에서 제일 먼저 했던 얘기가 웬만하면 출마하지 말아라 하는 거예요. 녹록치 않으니까, 특히 신인들한테는.

지방선거 때마다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

리: 지방선거 관련해서도 책을 내셨지만, 당내에서도 선거 컨설팅을 하지 않으셨나요?


정창교: 낙선 이후 먹고 살 게 없어서 막막했는데, 그래서 제가 가진 재주가 그거였으니까요. 총선, 지방선거 컨설팅을 했죠.



유종필 구청장과 관악을 함께 바꾼 8년


리: 그러면 기존 유종필 구청장님이 당선, 재선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본인이 자신하세요?


정창교: 당연하죠. 제가 다 기획했으니까. 유종필 구청장님은 그 전에 5번을 낙선했어요. 그리고 2010년 총선 1년을 앞두고 그분이 저를 불러서 관악구청장 선거에 도전하고 싶다, 컨설팅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죠. 대학 때부터 인연이었고, 그분이 노무현 후보 대변인 하실 때 저는 당 국장이었어요. 결과는 서울 시내 최다득표 당선이었어요.


리: 일반적으로 구청장은 예산을 끌고 오고, 기업을 유치하고, 땅값 올리는 게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본인도 그렇고 유 구청장도 그렇고 그런 쪽은 그다지 부각시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당선, 재선까지 된 걸까요?


정창교: 일부러 파격적으로 만든 거예요. 유 구청장님 선거 당시 공약의 절반을 도서관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토건, 건축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반발하죠. 하지만 학부모님들은 굉장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관악구는 신혼 초 부부들이 많이 거주해요. 환경은 쾌적하면서 서울 2호선이 뚫려있는 서민 주거지역이죠. 이분들을 당사자로 도서관 공약을 한 거고, 실제로 2010년 5개였던 도서관을 43개로 늘렸어요.

관악도서관이 정창교 예비후보 당선의 꿈과 희망도 키웠다

리: 금천구나 도봉구 같은 곳은 신혼부부들이 좀 먹고 살 만하면 떠난다는 점에 대해 문제의식을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관악구 같은 경우는 어떤가요?


정창교: 관악구도 마찬가지죠. 서울 지역이 대부분 다 그래요. 일년에 16~20%가 떠나니까. 한 지자체 차원에서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워요. 다만, 지역이 정체성을 갖고 발전하려면, 그 동네에 애정을 갖고 오래 거주한 사람이 있어야 해요. 관악구 같은 경우 달동네 같은 이미지도 있지만, 도서관 등 문화시설이 잘 되어 있는 편이었던지라, 이걸 더 발전시켜보려 하고 있죠.


리: 달동네는 개선되고 있나요?


정창교: 지금은 많이 없어졌죠. 관악도 이제 50%가 아파트거든요. 남은 부분은 이제 도시 재생을 통해 개선하려고 하고 있어요.



역사교수를 꿈꾸던 모범생이 인천 87항쟁을 진두지휘하기까지


리: 초중고 생활을 다 전라도에서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셨나요?


정창교: 모범생이었죠. 저희 아버님이 학교 선생님이셨거든요. 특히 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초임이셨는데, 너무 미인이시라 그만 짝사랑에 빠졌어요. 역사 공부는 올백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죠. 선행학습도 하고. 꿈이 역사 교수였어요.

로망스를 꿈꿨지만 예비후보는 김재원이 아니었다

리: 특히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나오셨죠? 5.18 때는 어떠셨나요?


정창교: 5.18 때 저는 재수하러 서울에 올라와 있었어요. 5.18에 대해서는, 그때는 광주 사는 부모님조차 쉬쉬하셨어요. 제대로 진실을 몰랐죠. 빨리 다시 대학을 가는 게 중요했어요. 전두환이 정원을 늘리는 바람에 서울대에 합격했고, 법대도 들어갈 점수였지만 인문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어요. 제대로 된 역사교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리: 아쉽군요, 홍준표처럼 될 수 있었는데… 그러다 좌빨 유종필을 만났군요.


정창교: 다 사주팔자에요. 좌빨이 아니고, 당시 학내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는데, 제 앞에서 사람이 죽은 거예요… 81년 5월 24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국제경제학부 4학년 김태훈 열사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투신했거든요. 그걸 우연히 지나가다가 봤어요. 그런데 경찰이 최루탄을 쏘더니 시신을 탈취하고, 피 묻은 흔적을 모래로 덮더라고요. 제가 그 모래를 담아가서 기숙사 서랍에 넣고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나요.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투신한 김태훈 열사. 손윗누나 김선혜 씨는 세월호 특조위 지원소위원장이기도 하다.

리: 왜 모래를 담아가신 거죠?


정창교: 기억하려고. 그때까진 어렴풋이 알았던 사실이 현실로 느껴진 거예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역사 교수가 되겠다고 공부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죽는데. 그러면서 광주의 진실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운동권이 된 거죠.


리: 사실 전두환 초기에는 운동하는 게 굉장히 무서운 시기였잖아요. 삼청교육대, 학내경찰… 어떤 고초를 겪었다거나 한 게 있나요?


정창교: 제일 큰 게, 1학년 2학기 때 강제징집을 당했어요. 학도군단이 주최하는 관제축제를 막으려고 시위를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죠. 원래는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방위 판정인데, 강제징집은 그런 거 상관 없거든요. 그대로 끌려가서 강원도 양구, 21사단, 거기서 생고생했습니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그래도 양구보단 나으리…..

리: 제대 후에는 다시 운동을 했나요?


정창교: 원래 군생활 하면서는 다시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동기들이 4학년이 되면서 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 지도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절 꼬시더라고요. 당시엔 학생운동 다음엔 현장으로 가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래서 손목 끌려서 간 게 인천 부평. 거기에서 15년 동안 노동운동을 했죠.


리: 너무 오래 하신 거 아닌가요?


정창교: 제가 원래 스타일이 한 번 하면 뭉개는 스타일이어서. 처음엔 야학을 했어요. 근로자들을 모아서 노동법 강의를 했죠. 84년도에 시작해서 교장까지 했어요. 그 당시 기억나는 게 87년 6월 항쟁이에요.


리: 87항쟁이 대체 어땠기에…


정창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 시위대가 흩어지잖아요. 도망가려고 뒷골목으로 쭉 갔어요. 그랬더니 40명이 따라오더라고. 그냥 가기 뭐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니까, 사람들이 따라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백 명 이백 명, 나중에 천 명이 됐어요. 다들 절 쳐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거기서 간이로 사회를 봤죠. 다시 경찰이 쫓아오니 도망가고,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까 만 명, 십만 명이 된 거예요.

당시 정창교의 모습 (상상도)

리: 인천에서 십만 명이 모인다고요?


정창교: 네, 그게 한 여덟시쯤 됐나, 퇴근한 노동자들까지 나오면서 그렇게 됐죠. 물론 십만 명 눈으로 다 안 세었지만, 어쨌든 겁나 많았단 얘기죠. 그러니까 경찰이 진압을 포기하더라고.


그때부터 유명인사가 된 거예요. 당연히 경찰도 저를 알아보죠. 그렇게 88년도에 처음 구속이 됩니다. 저를 처음 구속한 사람이 황교안 전 법무장관이에요.



별 죄도 없이 3번이나 감옥에 간 이야기(…)

리: 황교안과 인연 (…)


정창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번역한 사람으로 오인이 돼서 조사를 받았죠. 그런데 저를 잡아서 조지고 고문을 해봐도, 그럴 실력이 아니거든요.


그걸 번역한 건 수배중이었던 제 친구였어요. 출판사에서 책 구해 달라길래 갖다 줬는데, 이 출판사에서 욕심 내서 그걸 출판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치안본부에서 그 사람을 잡아서 고문을 하고는, 이거 누가 갖다줬냐… 정창교가 갖다줬다… 그때 걔네들은 대한민국에 러시아 혁명을 수입한 원조를 드디어 찾았다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겠죠.

이런 책을 그 때 출판하는 패기

리: 황교안이 정말 기뻐했겠군요.


정창교: 그런데 제가 번역 안 한 게 확인이 되면서, 서로 급 실망을 했죠. 그때 재수가 없었던 게, 하필 판사를 정의파 판사를 만났어요. 이 판사가 보기에 피고가 죄가 없으니까, 전 가만히 있는데 판사와 검사가 열심히 싸우더라고요. 게다가 구형하고 선고를 할 때가 됐는데도 황교안 검사가 더 질문할 게 있다면서 계속 잡아두는 거예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나왔는데, 선고가 나왔을 땐 이미 6개월을 다 산 뒤였죠.


리: 황교안은 후보님을 아세요?


정창교: 당연히 기억 못하죠. 마주친 적도 없어요. 살아온 길이 다른데.

아마 정창교의 의전이 부족해서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

리: 그렇게 황교안에게 당하고 풀려난 뒤로는 어떤 활동을 하셨죠?


정창교: 인천노조협의회 교육부장으로 일을 조금하다가, 또 1년 감옥을 가요. 노동절 시위 주도 혐의로. 큰 사안은 아니었지만 집행유예 기간이라 실형을 살았어요. 그리고 92년에 또 감옥에 갔어요.

정창교는 관악을 얻으려 감옥을 삼고초려했다 카더라

리: 이번엔 왜 또(…)


정창교: 가장 억울한 경우였어요. 포항제철에 취직한 친구가 있었는데, 저랑 인상착의가 아주 비슷한 삼촌이 일주일에 한번씩 그 친구를 만나러 내려갔어요. 이걸 보고 경찰이 제가 포항제철에 조직을 심어 놓고, 현지 지도를 나간다고 한 거예요. 두들겨 패고 고문하다가 얼굴을 보니까 아닌 것 같은 거죠. 고문하던 양반도 미안하다며 밤마다 치킨도 사주고, 봐주겠다고 하긴 했는데… 누범기간이라서 결국 또 실형을 살고 나왔어요. 보통 감옥을 가면 군대를 안 가잖아요. 그런데 전 순서가 잘못돼서 할 걸 다 했어요.


리: 풀려나고 나서 더는 운동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정창교: 아니요. 제가 감옥에 간 이유가 늘 국가보안법이다 보니, 결혼한 사람이 아니면 면회가 안 돼요. 그러다 보니 애인을 사귀어도 감옥 갔다 오면 없어지는 거예요. 세 번째 나온 후에는 또 감옥에 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 3개월만에 결혼을 했어요. 하필 또 우리가 동성동본이었어요. 친척들이 이 결혼 무효라는 걸 억지로 입단속을 하면서 겨우 결혼식을 했죠.

당시 동성동본은 사회적 금기였다

리: 왜 그렇게 운동에만 매진했어요? 서울대 학생이면 과외하면서 운동은 조금씩만 했어도 돈은 충분히 벌었을 텐데.


정창교: 청년 시대에 가질 수 있는 열정이었죠. 지금은 힘들지만 열심히 하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15년이 지나버렸죠. 무식하니까 한 거지, 생각하면 하겠어요? 논리적으로?


리: 그런 것 치고는 고생만 너무 한 것 같습니다.


정창교: 성과도 많았어요. 저희 집이 중산층 가정이었으니까, 어려움을 모르고 잘 자랐죠. 그런데 손가락 막 잘리고, 받는 월급은 정말 적고, 야근해도 생활하기 힘들고… 전태일 열사 평전이 나와있던 게 70년대잖아요. 제가 있던 80년대도 똑같은 거예요. 이들과 함께 87년 항쟁을 하고, 이후 노조를 만드는 데에도 제 야학의 많은 노동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어요.



국졸 택시기사를 시의원으로 만들고 DJ 캠프로 발탁되기까지


리: 결혼 후엔 인생을 새롭게 사셨나요.


정창교: 인천 노동조합 협의회 월급이 월 3만원이었어요. 오토바이 우유배달도 하고, 제 처는 노조 활동 하면서 매점 직원도 하고 그러면서 어렵게 꾸렸지요. 그러다 애가 생기면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인천 택시노조 사무국장으로 직장을 옮겼어요. 월급이 103만원으로 어마어마하게 올랐죠.


리: 택시노조 생활은 어떠셨나요?


정창교: 부평 대우자동차 노조가 만 명이 좀 넘잖아요? 택시조합이 팔천 명이 좀 넘거든요. 인천에서 두 번째로 큰 조직인 거죠. 택시는 요금, 차량 대수 등 시에서 결정하는 게 많아요. 자연스럽게 조직 결의를 해서, 조합원 한 명을 시의원으로 추대를 했죠. 그분이 국민학교 4학년 중퇴였어요. 그런 자격을 가지고 공천을 달라니까 민주당 지역위원장이 어이없어 했죠. 그러면서 시의원 후보로 유력한 다른 사람이 한 달만에 입당원서를 500장을 받아왔다고 하더라고. 저희가 일주일만에 3천 장을 모아서 줬어요. 결국 공천을 받았죠.


리: 민주당에서 굉장히 놀라워했겠네요.


정창교: 그렇죠. 재미있는 게, 이 양반이 재선을 해서 부의장까지 했어요. 국민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 어떻게 의정활동을 할까 다들 의심을 하잖아요. 그런데 첫 해에 시의원 33명 중 베스트 5 안에 들어가더라고요. 건설업자, 사장 출신의 다른 의원은 지시에 익숙해지만, 이 사람은 회의에 익숙했던 거예요. 경청하고 고민해서 합리적인 의견을 말하는.


리: 굉장히 뿌듯했겠네요. 그래서 당 차원에서 주목을 받게 된 건가요?


정창교: 노동운동 때는 말도 많고 승복도 잘 안 되는데, 선거는 표를 통해 한방에 끝나더라. 재밌다… 그래서 제가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선거기획사에서 1년동안 공부를 했어요. 후보자를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 상품을 어떻게 홍보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걸 배웠죠. 그 이후 인천 서구 보궐선거 때 조한천 의원의 국회의원 선거를 도우면서, 그 분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리: 드디어 입성이네요. 그리고 대선 때 DJ를 만나게 된 건가요?


정창교: DJ의 수행기사가 저를 찾아왔어요. 택시기사들이 구전 홍보에 뛰어나니까, 이걸 조직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잘 할 수 있을 사람으로 절 추천 받은 거고요. DJ 차를 타고 중앙당으로 간 거죠. 그날 저녁 DJ가 직접 전화를 하더라고요. “조 위원 잘 있는가, 자네 보좌관 내일부터 내가 쓸게잉.”

DJ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성했다

리: 그때가 DJ를 처음 뵌 자리였어요? 첫 만남은 어땠나요?


정창교: 악수를 했는데, 사람 손이 이렇게 따뜻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나기 전엔 투사란 선입관이 있었는데, 인자하고 포근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어요.


리: 캠프에서의 성과는 어땠나요?


정창교: 재밌었죠. 제가 그때 했던 일이, DJ가 대구에 간다, 하면 택시기사가 가장 많이 모이는 기사식당을 섭외를 했어요. 고급 교통수단과 대중 교통수단 사이에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택시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공감을 해 주고, 준공영제 얘기를 했죠. 이건 지금도 해결이 안 된 문제예요. 그런데 97년에 그런 얘기를 하니 신선했던 거죠. 박수가 나오고, DJ도 뿌듯해하고요.


리: 당선날 분위기는 어땠어요?


정창교: 제가 전라도 사람이잖아요. 87년, 92년 낙선 때는 정말 눈물바다였죠. 그러다 1.3% 차이로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거예요. 정말 감동적이었고, 기대도 컸죠. 그 이후, 새천년민주당 창당 때 창당기획위원으로 선발이 돼서 기획을 하게 되었어요. DJP 연합이 깨지면서, 총선을 앞두고 당을 재정비해야 할 상황이 왔죠.


리: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었네요.


정창교: 그때 제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어요. 처음으로 전당대회를 인터넷 생중계로 해보자, 화상대화로. DJ의 대단한 점이, 항상 새로운 것을 좋아했어요. 전자정부도 그때 처음 만들었잖아요. 대박이었죠. DJ가 신선했다면서 이 친구를 써보라고 지시를 했어요. 그래서 39살 때 민주당 국장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최연소였죠.


리: 2000년에 인터넷 생중계를 생각할 정도면, 그때도 인터넷에 많이 밝으셨겠어요. PC통신도 하셨나요?


정창교: 하이텔을 했어요. 아이디는 기억이 안 나지만요.

모든 덕후는 조상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리: 세상에, 드디어 인생 폈네요.


정창교: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이 또 꼬이기 시작합니다.



2002년 국민참여경선으로 참여정부를 낳은 장본인


리: 또 왜…


정창교: 2001년 말에 DJ가 레임덕에 빠지면서, 재보궐에서 계속 참패를 했어요. 대선도 질 게 뻔해 보였죠. 그때 문제가, 민주당의 사회 대표성이 우리 국민의 사회구성비와 너무 다르다는 거였어요. 호남, 중장년층이 너무 많았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걸 사회구성비에 맞춰보자는 제안을 했어요. 국민들에게 완전히 개방을 해서. 국민참여경선제의 시작이었죠.


리: 흥행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당내에선 반발도 엄청 컸을 것 같은데요.


정창교: 사실 노무현 후보 측에서 반발이 제일 컸어요. 처음 듣는 얘기죠? 당시엔 이인제가 대세였어요. 대안이 없다고들 여겼죠. 이인제는 어차피 자기가 되는 거니까 오케이 한 거예요. 반면 노무현 후보는, 국민참여경선도 동원을 하는 거 아니냐고 오해를 한 거죠. 그때 당시만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요.


리: 후보님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안을 짜면서?


정창교: 저는 특정 후보를 좋아하기 이전에 순수하게 당직자, 전문가 입장에서 고민했던 거예요. 이렇게라도 해야 국민들이 민주당 후보에 관심을 가질 거고 성공하지 않겠냐 하는 절박감이 있었던 거죠. 안 그러면 뻔하잖아요. 당원끼리 투표하면 이인제가 될 테고, 나머진 선거를 안 할테고요.


리: 그리고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나와버렸죠. 노무현 신화. 그때부터 당내에선 스타가 되셨겠어요?


정창교: 스타가 되면, 혐오하는 사람도 생기죠. 사실 저 때문에 노무현이 됐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선거에는 시대의 운, 시대정신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도보다 중요했던 게 당시 시대정신이 노무현 정신이었다는 거죠. 국민참여경선은 기폭제, 윤활유 역할을 한 거고요.

국민참여경선은 ‘노풍’을 폭발시켰다 (물론 후에 후단협으로 파괴되지만)

리: 노무현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정창교: 새로운 정치, 지역구도를 타파하기 위한 무모한 도전, 바보 같은 정신이었죠. 그 열망을 다행히 그 제도가 담아낸 거예요. 첫 경선 지역이 제주도였는데, 인구가 40만 정도였는데 10만 명이 모집되었어요. 후보들이 그만큼 열심히 해 주었던 거죠. 이후 노무현 후보가 울산에서 이기고, 광주에서 역전하면서 모집 인원이 백만명으로 늘어나더라고요. 결국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죠.


리: 하지만 정작 본인은 왜 그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으로 가지 않은 거죠? 나름 공도 있는데.


정창교: 사실 성향상 열린우리당으로 가는 게 맞았고, 저도 탈당계를 냈어요. 그런데 그걸 최종 접수하는 사람이 빼 버렸어요. 넌 열린우리당에 오지 말라고… 제가 오는게 부담스러운 거예요. 반대로 민주당에서는 절 보고는, 분명히 열린우리당에 갈 놈인데 여기 남아있는 게, 간첩이다, 이래서 저를 제명처분을 했어요.


리: 뭐 하는 짓이죠? 선거는 어떻게 나갔어요-_-?


정창교: 아까 정당은 자기 선택이 아니라 인맥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 했잖아요. 제명 처리만 됐어도 자연스럽게 열린우리당으로 가서 출마를 할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민주당 당무위원회에서 이런 친구를 제명하면 안된다, 하고 다시 살리더라고요. 그렇게 선거 나가서 패가망신을 했죠.


재수가 없는 게, 감옥을 세 번 갔던 보상금이 그 때 나온 거예요. 후보는 선거 때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쓰게 돼 있거든요. 5천만 원이 나왔는데 하루만에 없어지더라고요.


리: 선거전문가로서 본인이 나갈 때 아마 떨어질 거라고 생각은 했겠죠?


정창교: 전혀 안했죠. 제가 그래서 책을 쓴 거예요. 제 선거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웬만하면 출마하지 말라고 썼죠. 이게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사실이에요.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누가 될지 뻔히 보이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다 나름대로 희망과 근거가 있어요.

모든 후보자들의 심리상태

리: 정말 눈물 나는 인생사군요…


정창교: 그 후 빚을 갚기 위해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취직했어요. 낙선했지만 쪽팔림을 무릅쓰고, 먹고 살아야 되니까요. 그러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 원내기획실장으로 들어가서, 민주당에 모바일 투표를 제안했죠. 일본이나 영국에서 우편투표로 당원 투표를 독려하는 것을 보고, 우편투표보다 보안상 뛰어난 모바일 투표를 생각해본 거죠. 그게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져오고 있고요.



다른 모든 구청이 본받을 관악구를 만들겠다는 공약


리: 그리고 드디어 관악구로! 8년간의 정책실장 생활이 시작됩니다


정창교: 유종필 청장님 선거를 도우면서 구청 정책실장으로 자연스럽게 합류했죠. 사실 2010년 이후에 지방자치단체의 패러다임이 아예 바뀌었어요. 그 전엔 대부분 보수 정당 일색이었는데, 민주당 내의 개혁적인 인물들이 구청장에 많이 당선이 되었거든요. 새로운 시도, 혁신을 많이 시도했지요.


리: 정치인들은 참모의 공적을 내세우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 구청장님은 정 후보자님의 자리도 만들어주고, 공적을 밝힐 수 있는 토대도 마련해주었는데, 어떻게 그런 관계가 가능했던 거죠?


정창교: 한 40년 같이 있다 보면 그렇게 되죠. 서로 믿고 신뢰하니까. 저도 청장님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겠다, 그런 소명이 있을 정도니까요.

“한 40년 같이 있다 보면 믿고 신뢰하게 되죠” (이 대사는 본 사진과 관련이 없습니다)

리: 8년동안 있으면서 제일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책은 어떤 게 있을까요?


정창교: 도서관이죠. 취임 전에는 5개였는데 43개로 늘려서, 접근성이 좋아졌거든요. 2014년에는 독서동호회 지원사업을 공약했어요. 관악주민 5명 이상이 모여서 한달에 한번 책을 읽겠다, 라고 신청을 하면 저희가 연간 50만원의 책값을 지원해줬어요. 책을 매개로 해서 이웃끼리 소통할 수 있는 마중물을 주자는 취지였죠.


리: 사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모임을 만드는 게 쉬운 구상이 아니었을 텐데요. 어떤 식으로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거죠?


정창교: 홍보가 가장 중요하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거니까요. 2013년도에 그런 독서토론회가 30개였는데, 지금은 469갭니다. 제 공약은 구청장 임기 4년 안에 1000개로 늘리겠다는 거예요.


리: 책 안 좋아하는 사람은 어찌(…)


정창교: 꼭 책이 아니어도 연극 등 생활문화 동호회도 만들 수 있겠죠. 다만 지역 제한은 두는 거죠. 관내에 있는 청년 예술인들이 하는 공연장들이 많이 있거든요. 여기서 여는 연극 관람을 지원해주는 방식이죠. 얼마나 품격있는 동넵니까. 공동체 의식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는 거죠. 그걸 구청에서 50만 원을 통해서 마중물 역할을 해주겠다는 거에요.


리: 구청 예산으로 크게 부담스런 수준은 아닌가요?


정창교: 토목예산을 빼면 얼마든지 예산은 생겨요. 예로 제가 사고쳤던 예산사업 중 하나로 관악창의영재예술교육원이 있어요. 6학년 아이들 50명을 선발해서, 서울대 미대 조교들이 거의 무료로 미술교육을 시켜주는 거예요. 그 사업 하나에 5천만원 이상이 필요하거든요.


리: 예산 확보를 어떻게…


정창교: 예산 확보를 위해 연가보상비를 잘라버렸어요. 공무원들이 1년에 연가가 20일이거든요. 다 안쓰고 보통 15일 정도는 연가보상비를 받아가요. 그런데 연가보상비의 원래 취지는 휴가를 가라는 거지, 돈을 받아가라는 게 아니잖아요. 휴가 갈 거 제대로 가라고 한 거죠. 15일 보상비가 나오던 걸 10일로 줄여서, 그렇게 5억이 나왔어요. 창의영재예술교육원 뿐 아니라 다양한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죠.


리: 창의영재예술원은 다른 지역에서도 주목을 받은 걸로 아는데요, 이를 다른 교육으로도 확대시킨다는 공약을 발표하셨어요. 서울대생의 참여를 지속적으로 이끌 인센티브가 있을까요?


정창교: 도쿄대에는 지역기여학점제 3학점이 있어요. 졸업을 위해선 도쿄 지역 지역사회에서 뭔가 활동을 해야 해요. 서울대 같은 경우, 사범대에만 1학점이 있어요. 이걸 전면적으로 도입하자고 협상을 하려고 해요. 관악구에 중학생이 8천명이에요. 1학년은 시험을 보지 않는 자유학기제로 운영돼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적성을 찾으라는 취지죠. 제가 보기에, 관악구에서 제일 좋은 자극은 서울대 학생들이라고 생각해요.


리: 이 정책은 관악구 뿐 아니라 다른 구로도 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요?


정창교: 가장 대표적인 게 경로당이에요. 관악구에 청년이 40%에요. 그런데 청년들의 주거가 대개 열악하죠. 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 공간이 없거든요. 그런데 경로당을 보면 공간 이용이 굉장히 비효율적이에요. 2~30명 어르신이 11시쯤 나와서 점심 먹고 고스톱 치다가 문을 닫아 버리잖아요. 그 공간을 공유하는거죠.


리: 음… 사이즈가 나오려나요? 경로당 작은데…


정창교: 동마다 3개 정도 있는 구립 경로당 중 두 개를 팔아서, 그 매각 자금으로 하나의 경로당을 넓게 지으려고 해요. 지하에는 공연장을 만들어서 청년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쓰되, 어르신들에게는 공연비를 무료로 하거나 연극 지도를 해 주거나 하는 식으로 상생하는 거죠. 또 오후에는 주부들이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저녁에는 청년들이 모여서 식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요. 윗층은 청년들의 셰어하우스로 쓰면서, 싼 가격에 임대하되 청소를 맡긴다든가 하고요.


리: 청년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취업, 자기 커리어 개발인데요. 그쪽 측면에서도 뭔가 구에서 대책을 내놓으실 생각이 없나요?


정창교: 청년 창업문화 공간을 만들 계획이에요. 관악구 뿐 아니라 서남권을 망라하는 창업 혁신 센터죠. 현재 추진중이고, 용역 들어가 있어요. 지금 예상대로라면 3년 후에 만들어질 거예요.

리: 유 청장님의 관악구는 독서의 관악구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잖아요. 후보자님의 관악구는 어떤 관악구로 만드실 건가요?


정창교: 당장 지식도시, 도서관 도시를 잘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제 브랜드를 드러내는 건 3-4년 지나야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도 욕심이 있다면 저는 교육구청장 브랜드를 가지고 싶어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게,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을 구청에서 지원하는 거죠.



마무리


리: 제가 지금까지 봤던 대부분 후보자들은 현수막을 보면 항상 문재인과 같이 있어요. 그런데 후보자님은 그런 걸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요.


정창교: 그런게 바람직한 정치일까 하는 회의가 드네요. 예산을 끌어오는 건 친소관계가 아니라 사업의 적합성, 창의성이라고 생각해요.


리: 그래도 슬로건에는 보통 문재인을 넣잖아요?


정창교: 근데 전 문재인 대통령하고는, 구청 공무원이다 보니까 연관이 있을 수가 없는 거니까.

모르는데 어떻게 넣어요…

리: 그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슬로건이 정직해지신 건가요…


정창교: 제 책에도 나와있지만, 최고의 선거전략은 진심이니까. 있는대로 해야지, 꾸며서 되겠어요?


리: 선거에 떨어진다면 상대 후보를 지원할 생각이 있으세요?


정창교: 당연하죠. 살다보면 선거 이기고 질 수도 있는거지. 사주팔자잖아요 그거. 내가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쪽팔리지만 도와줘야죠. 어차피 같은 당인데. 선거의 당락이 인생의 당락은 아니잖아요.


리: 선거 전문가가 사주팔자라고 하면 어떻게…


정창교: 수없이 지켜봤는데 진짜 사주팔자더라고요. 운빨이 최고야.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죠.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즐겁게, 최선을 다해서 하고, 되면 좋은거고 안 되면 마는 거죠 뭐. 인생이 어찌 될지 몰라요.


리: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 잘 했다, 정말 멋있었다 하는 순간이 있다면요?


정창교: 딱 하나죠. 결혼. 그게 정답이야. 왜냐하면 다 볼거거든요.

지켜보고 있다…

리: 따님이 사랑스러우세요, 아니면...


정창교: 당연히 이 나이엔 딸이죠. 솔직해야 하잖아요.


리: 홍보물 첫 페이지가 딸이 쓴 편지였어요. 딸이 어떻게 컸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으세요?


정창교: 편지 쓰는 것도 힘들어요, 맛있는거 많이 사줘야 되거든요. 딸이 스무살 때, 4년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갔어요. 하루 8시간씩 계속 걸었죠. 걷다 보면 대화를 할 수밖에 없어요. 제 인생에서 딸과 가장 대화를 많이 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리: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다면요?


정창교: 뻔하죠.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 딸은 나도 아빠 사랑해. 대화의 모든 게 그거였어요. 그런 얘기를 이렇게 진실하게,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어요. 다른 분들도 추천해요. 부녀관계 뿐 아니라 부부관계도,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은 산티아고 길을 걷다 보면 손을 잡게 되어 있어요.


리: 사실 저는 공약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요. 후보자가 살아온 삶이 그 사람을 훨씬 많이 보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이거 하나 만큼은 꼭 지키겠다 하는 공약은 무엇입니까?


정창교: 현재 예비홍보물 중 4페이지를 공약으로 쓰도록 법을 만든 게 저에요. 그것도 매니페스토에 입각해서. 그런데, 비교해보면 다른 후보들은 이걸 잘 이해를 못해요. 예를 들어 소상공인 종합센터를 설립하는 데 30억이 들거든요. 건물 하나를 지으려면요. 그 예산에 대한 내용이 없어요. 예산 없이 공약만 내세우는 걸 누가 못하겠어요.

정창교 후보 홍보물을 보면 재원조달이 매우 명확히 써있다

리: 사실 역으로 얘기하자면, 써봤자 사람들이 안 보니까 그러는 거 아닐까요.


정창교: 언론의 책임도 있어요. 일본 같은 경우, 지역 언론이 공약을 쭉 기사화하고, 시민사회단체가 이를 평가해요. 그만큼 유권자에게 많은 정보가 가는 거죠. 당신의 매니페스토는 무엇입니까, 그 예산은 얼마나 나옵니까, 어떻게 조달할 것입니까를 물어보는 게 유권자의 의무에요. 그러면 후보자도 공부를 하게 되어 있거든요. 후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비중이 갈 수밖에 없는 게, 공약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잖아요. 매니페스토를 하고 공약을 믿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야 해요. 그런데 선거가 너무 힘든 게, 정책토론회를 제안했는데 다들 거부했어요.


리: 그런데 일본 정치는 왜 이렇게 엉망인거죠?


정창교: 일본 정치의 특징이, 지방선거 투표율이 총선보다 높아요. 일본은 국세와 지방세의 예산 구조가 5대 5에요. 지방선거에선 매니페스토도 발전했지요. 그래서 일본 주민들은 지방선거 투표 여부에 따라 자기 삶이 바뀐다는 걸 많이 체험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지방선거 투표율이 높아진 거예요. 중앙정치가 엉망인 것과 별개로요.


리: 내가 만약에 구청장이 된다면, 물러날 때 사람들이 나를 무엇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있나요?


정창교: 스티브 잡스요. 혁신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를 남겼잖아요. 혁신이란 건 별 게 아니에요. 기존에 있던 것들을 융합한 거잖아요. 제가 모든 걸 다 아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늘 하는 얘기가 당사자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당사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기존 행정은 그걸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제 저는 경청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듣고 협치함으로써 조금씩 무언가를 좋아지게 만드는 그런 구청장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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