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의 수많은 논의가 공회전하는 이유 중 하나

조회수 2018. 8. 6. 11: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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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논의의 층위와 범위를 제대로 다룰 날이 올까?

논의의 기본은 논제의 범위와 층위를 한정하는 것이다. 토론이든 토의든 논제가 정해지면 그에 맞는 전제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결정된다. 대선 토론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토론자들이 다루는 논제는 다 ‘국가/국민 단위’의 층위에서 생각하게 된다. 토론 중에 갑자기 토론자들끼리 사는 동네 이야기를 한다거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범위와 층위를 착각하고 토론에 임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토론자들이 좋은 토론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단순한 논의뿐 아니라 법 제도도 마찬가지다. 사회문제를 다룰 때와 개인의 범죄나 책임을 다룰 때, 현대 사회는 둘의 얽힌 관계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정교한 법 제도를 만들어냈다. 누군가 가난에 쪼들려 돈을 훔치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사회 문제를 토론하는 동시에, 그에게 100% 합리적일 수는 없겠지만 적절한 수준의 처벌을 가하는 시스템을 적용한다. 그렇게 사회와 개인, 문제의 범위나 층위에 따라 나눠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체계로 작동한다.


하지만 트위터 같은 SNS는 어떤가? 이곳은 위에서 말한 층위와 범위가 발산하는 곳이다. SNS의 특성은 대다수 발언이 1대 다수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내가 말할 때는 나는 개인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수는 SNS가 없었던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많다. 평범한 개인이 몇백, 몇천, 몇만 명에게 한꺼번에 자신의 말을 전달한 적은, 적어도 20세기에는 없었다. 반대로 개인이 몇백, 몇천, 몇만 명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한꺼번에 듣던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SNS에 참여하는 개개인은 이 층위와 범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사실상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SNS에 툭 뱉은 한 마디는 내게 별 의미 없는 그냥 평소의 혼잣말 같다. 하지만 남이 SNS에 지나가면서 던진 말은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거대 권력처럼 보인다. 문제는 SNS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느낀다는 점이다. 이런 특성으로 생겨난 문화가 ‘조리돌림’과 ‘박제’ 문화일 것이다.

조선 시대 조리돌림을 그린 김윤보의 〈북 지워 조리 돌리다〉와 300년 전 스웨덴 사자 박제(적절한 짤을 찾기 어려워 사전적 의미의 짤로 대체합니다)

SNS, 특히 트위터의 사람들은 타인의 말, 아마도 말한 그 사람은 개인적 발언이었을 말을 박제(캡처)해 주위에 전시하면서 마치 정당의 대변인이 말한 공식 발언인 것인 양 해석하고, 그 모순과 문제점을 조리돌림(성토)한다. 사람들은 그 ‘개인’의 말이 사회문제의 압축판이며, 그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근본 원인이며, 그 사람은 그 사회문제를 해결 못 하게 만드는 권력자로 생각한다. 반면 그를 비난하는 자신의 말은 인격적 모욕이더라도 ‘서민의 정당한 분노’ 정도로 여긴다. 


“네가 도둑질을 했으니 세상 모든 도둑을 대표해서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한다”와 “도둑질을 한 너를 내가 모욕하는 것은 당연하다”가 공존한다. 사회적 책무가 막대한 정치인이 대상이라면 이 논리가 유효한 면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SNS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를 빼놓고는 모두가 평범한 개인이라는 점이다. 개개인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SNS의 1대 다 커뮤니케이션 구조 내에서, 한 개인이 받아야 하는 비난의 양보다는 분명히, 아주 적다.


이런 문화가 반복되면 개인이 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일까? 하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뭔가 말하고 싶어서 모인 곳이니 목적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둘째는 개인보다는 어떤 집단에 속하는 것이다. 집단의 일원이 되면, 혼자서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비판의 양을 집단으로 분산할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항상 주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더 편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커뮤니티를 이루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부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할 때는 확증편향과 진영논리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 실제 오프라인 관계보다 익명의 관계가 더 중요한 트위터에서 이런 흐름이 발생한 것은 돌아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선언’의 의미가 강조되었던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었을 수 있다.

오랜 기간 트위터를 하면서 본 수많은 사람이 위에서 말한 두 갈래로 많이 나뉘었다. SNS를 때려치우거나, 진영논리에 빠지거나. SNS 같은 개인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미디어에서, 사람들이 이야기의 층위와 범위를 제대로 다룰 날은 올 수 있을 것인가?


원문: cfr0g ; 괴골 [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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