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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타락과 반교육의 문화

조회수 2018. 2. 13. 17: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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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도 교양인도 아닌 전문가들

지성(intellect)과 지적 능력(intelligence)의 차이를 어떻게 정리할까. ‘지혜롭다’와 ‘똑똑하다’ 같은 형용사로 이들을 대별할 수 있을까. 지성적인 사람과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어떻게 구별하나. 지성과 지적 능력의 관계는 상보적일까 모순적일까.


리처드 호프스태터 컬럼비아대학교 특훈교수는 1964년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의 반지성주의』(2017, 교육서가)에서 지성과 지적 능력을 이렇게 구별했다. 

  • 지성은 두뇌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인 측면이다. 음미, 숙고, 의문시, 이론화, 상상이 지성과 함께한다. 평가를 평가하고, 여러 상황의 의미를 포괄적인 형태로 탐구한다. 지성은 인간의 한 자질로서 높이 평가되는 한편 비난도 받는다. 

  • 지적 능력은 아주 좁고 직접적이며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적용되는 두뇌의 우수함을 가리킨다. 사안을 파악하고 처리하고 조작하고 조절하고 정리하는 등의 실질적인 특질로서, 가장 뛰어나고 소중한 동물적 장점의 하나이다. 그것은 명확하게 한정된 목표의 틀 안에서 작동한다. 지적 능력은 쓸모없어 보이는 사고방식을 재빠르게 삭제해버린다는 점에서 무척 실용적이다. 
리처트 호프스태터

변호사, 편집인, 기술자, 의사, 일부 작가, 대다수 대학교수 등은 보통 전문가나 전문직 종사자로 분류된다. 호프스태터는 이들이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에 의존해서 산다”라고 했다. 직업적 역할이나 직업적 기능이 지성적인 지식인을 만들지는 않는다면서 그들을 ‘정신노동자이고 기술자’라고 규정했다. 


호프스태터의 논변을 좀 더 따라가자. 전문가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단순한 정신노동자나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일 수 있다. 이때 지식인은 ‘지식을 위해’ 사는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정신의 삶에 대한 헌신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지식인이기 위해서는 지적 숙련도 외에 치우침 없는 지적 능력,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자유로운 사색, 참신한 관찰, 창의적인 호기심, 근본적인 비판력 들과 같은 여타의 자질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 ‘정신노동자’들은 언제든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두뇌를 자유로운 사색이 아니라 직업상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이들 정신적 노동자들은 외부에서 결정된 이해관계나 견해에 따라 일의 목표가 정해지는 시스템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의 관념에만 집착하면서 사는 광신자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문제 삼는 것은 미국 역사에서 하나의 국민 문화처럼 꾸준히 이어져 온 반지성주의다. 그것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과 적대다. 반지성적인 태도는 지성적인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을 보이는 특징이 있다.

미국 반지성주의의 연원은 20세기 이전의 미국 문화 근저에 깔려 있던 원시주의, 복음주의, 실용주의, 평등주의로 이어진다. 여기에 대중의 열광, 직관과 감정에 호소하는 근본주의 그리스도교, 이상주의적인 개혁가나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우파 정치가들의 공격성, 벤저민 프랭클린 유의 기업가들이 갖는 실용주의, 냉전 초기인 1950년대 미국 정치를 황폐화시킨 극우 반공주의가 타락한 반지성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하였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본 대목은 제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이었다. ‘학교와 교사’ ‘생활 적응의 길’ ‘어린이와 세계’ 3개 장으로 이루어진 제5부에서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미국인들이 교육에서 지성의 가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을, 저인망으로 해저를 훑듯 다채로운 사료 창고의 깊은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찾아 우리 앞에 내놓았다.


가령 미국 역사에서 교직은 부적격 교사들의 천국이었다. “만약 주립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도덕심을 지닌 젊은이라면, 교사 자격을 얻는 데 아무 곤란이 없을 것”이라는 19세기 초의 기록을 보라. 교직이 생활상의 돈벌이였다거나 정식 직업을 얻기 전에 임시로 하는 일이라고 보는 이들이 교직에 입직했다는 등의 진술은 미국 교육학자 댄 로티가 『교직 사회와 교사의 삶』에서도 비중 있게 소개하는 내용이다.


심각한 문제는 미국 교사들이 학생 집단 전체와 더불어 특별히 지적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능한 학생들은 꾸준히 교직을 기피했다. 낮은 교사 보수, 형편없는 교사 (양성) 교육이 중요한 배경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럴수록 사회는 더 값싼 교사를 찾았다. 당시 미국의 평등주의 철학은 학교 교사가 공무원이고, 공무원의 급여는 지나치게 높아서는 안 된다는 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직업교육에서 나타난 반지성주의 운동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개괄도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는 더 많은 사람을 더 긴 기간에 걸쳐 획일적인 시스템 아래서 교육시킨다. 저자는 이런 방식이 더 보편적이고 민주적이지만, 엄격하지도 않고 부질없는 경우도 많다고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그는 미국식의 보편적인 의무 공교육의 확대를,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반지성적인 ‘생활 적응의 길’을 가르치게 한 역사적인 배경처럼 분석한다. 


학교는 그저 법률에 따를 뿐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청소년이 가능한 한 장기간에 걸쳐 자발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매력을 제공해야 했다. 교육자들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전통적 교육의 기준에서 보면 그 효과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청소년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교육과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가 제공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유형의 지성이나 교과과정의 학문적인 면은 관심에서 멀어졌다(447쪽).


생활 적응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미국식 직업교육은 대중적인 중등교육 제도에서 학문적 성격을 띤 엄격한 학습을 어느 정도의 수를 넘어서는 학생들에게 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교육 불가능한 학생의 비율이 60%였다고 한다.


이들 ‘새로운 교육’의 주창자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학생들의 관심사를 교육과정에 바탕에 두는 것에 만족했다. 그 한편에 엄격한 지적 탐구를 즐기는 일이 병리적인 현상처럼 간주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이라는 표현 기저에 분명 은근한 반어적 어조가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존 듀이를 문제의 원흉(?)으로 삼아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어린이와 세계’를 보면서 그런 심증이 더 굳어졌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루소와 페스탈로치와 프뢰벨과 엘렌 케이(20세기 초 『어린이의 세기』를 지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웨덴 교육자) 등에게서 만들어지고 확대된 개인의 발달, 어린이 개념 들은 듀이가 집대성한 신교육의 핵심을 차지한다. 신교육론은 개인의 발달과 사회 질서의 필요성을 대립항으로 놓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그들은 인위적인 사회에 맞설 자연 그대로의 어린이들에게 빠져들었다. 교사들의 신성한 임무는 어린이들에게 규칙을 들이미는 시도에 가담하지 않고 그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제 어린이와, 어린이를 중심에 놓는 교육이 교육자들의 신성한 임무가 되었다.


호프스태터는 미국 교육이 “단순하고도 뻔뻔하게 지식인도 교양인도 아닌 전문가들을 배출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정부나 기업, 또는 대학에 취직한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이 진정한 지식인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정치의 타락은 반드시 지성이 타락한 결과다. 타락한 지성은 반교육의 문화를 배양한다. 타락한 정치 문화가, 그대로 우리나라가 교육에 관한 한 절망적인 반지성주의 문화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든 악순환의 고리다. 


지금 우리는 도저한 출세주의 동학 아래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지성적이거나 학구적인 태도가 아니라 세속적인 성공이다. 지성적이거나 학구적인 태도가 유일무이한 정답일 수는 없겠다. 다만 우리나라의 미래가 타락한 정치와 반지성의 문화 아래서 펼쳐져서는 안 되지 않을까.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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