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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박정희의 제3공화국 출범하다

영원을 꿈꾸며 시한폭탄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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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작성일자2018.01.12. | 4,857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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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 19개월 후 박정희, 권력의 정점에 오르다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 선거(1963.10.15.)에서 당선된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한국의 세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인 제삼공화국이 출범했다. 1962년 12월 1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된 개정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와 제6대 국회의원 선거(1963.11.26.)를 거친 뒤였다.


이로써 박정희는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만든,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 통치기구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실시된 군정 1년 7개월 만이었다.

1963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서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1962.12.17.)에 부쳐 이를 확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그가 주도한 군정 19개월은 권력에 정점에 오르는 일련의 준비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행정부 우월주의’의 5차 개헌안


개정헌법은 제2공화국의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부통령을 없애는 등 제1공화국의 대통령중심제보다는 미국식에 가까운 대통령중심제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긴급명령권, 긴급재정·경제처분권 등 강력한 권한을 가졌고, 사실상 정당 지도자로 정당을 통해 국회를 지배하는 ‘행정부 우월주의’의 대통령중심제였다.


또 간접선거로 선출했던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선거로 뽑도록 바꾸었다. 종전에는 의결기관이었던 국무회의를 단순 심의기관으로 해 대통령은 거기 구속되지 않게 되었다. 국무총리도 국회의 동의 없이 임명할 수 있게 하는 등 전반적으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또 양원제 국회를 단원제로 환원했고, 정부의 국회해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국회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불신임권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해임건의권만을 인정했다. 국회의원은 무소속 출마를 불허하고 정당의 공천을 받도록 하되 국회의원이 당적을 이탈하면 자격을 잃게 했다.


이는 정당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권자의 안정적인 집권과 소속 의원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당국가화 경향은 국회의 활동을 매우 약화시켰고, 국회는 상임위원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박정희의 전역을 다룬 당시 기사. 박정희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후 바로 민정에 참여했다.

헌법재판소를 없애고 대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과 정당해산권을 부여했다.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 임명에는 법관추천회의 제도를 채택했고, 일반 법관은 대법원판사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게 했다. 


개정헌법은 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모든 국민이 갖는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더욱 명확히 규정했다. 또한 직업 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추가로 규정했다. 또 중립적인 역할의 선거관리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헌법의 개정에는 국회의 의결 뒤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하도록 했다.


미국식 대통령제에 가까운 이 헌법안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실제 운영에서는 ‘공작정치, 선거부정, 국론분열 등 전형적인 후진국 정치의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이 헌법으로 태어난 제3공화국은 이후 3선개헌에 이어 박정희 장기집권으로 이어졌다.



제3공화국의 명암


박정희는 1963년 8월, 과업이 성취되면 정권을 이양하고 군에 복귀한다는 ‘혁명 공약’과 달리 강원도 철원의 제5군단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치르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혁명과업의 완성을 위해 민정 참여를 결심했다’며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유명한 전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이후 전개된 18년간의 독재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전역과 동시에 민정에 참여한다고 발표한 박정희는 곧바로 사전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에서 박정희는 46.6%를 획득해 45.1%를 획득한 윤보선에게 1.5% 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두 후보의 표차는 15만 6026표, 한국의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한 표 차였다.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1.5% 표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며,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공항 등의 사회 간접 자본을 확충하고 식량 증산에도 힘썼다. 제3공화국은 1970년대 초부터 새마을운동을 펴 농촌의 근대화를 견인했고, 경제 개발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국가주의적 산업화 체제인 ‘개발독재’를 통해 근대화에 주력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10월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고 비전투 병력에 이어 1965년부터는 전투병력을 파견했다. 또 학생들과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해 1965년 6월 기본조약과 부속협정을 체결했다.


1967년 제6대 대선에서도 승리한 박정희는 1969년, 국민 투표를 통해 제6차 개헌안(3선개헌)을 통과시켜 3선의 기반을 만들었다. 1971년,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3선에 성공했다.

6대(1967)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3선개헌 뒤 7대(1971) 대선에서도 승리해 첫 3선 대통령이 되었다.

헌법상의 마지막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북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해 발표한 이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통일 논의는 남북 양측에 의해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그해 10월 박정희는 ‘그동안 진행해오던 국책사업의 안정적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안정적 국정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했던 것이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제시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3공화국은 막을 내렸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해 유신체제로 전환하면서 제3공화국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3선을 허용했던 국민들에게는 삼권분립을 파괴하고 견제장치를 모두 제거한 반민주적 헌법인 ‘유신헌법’에 의한 억압과 통제, 이른바 ‘유신체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을 우선으로 하는 개발독재는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불법구조를 만듦으로써 시장 경제를 병들게 했다. 산업의 수출의존도가 심화되면서 민주주의 억압,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노동자와 농민의 소외 같은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다. 


1970년대 들면서 경제 발전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 운동이 확산되고 독재에 저항하는 야당과 재야 정치세력의 비판과 저항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영구 집권을 꿈꾼 박정희의 제4공화국은 그렇게 시한폭탄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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