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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성향을 좌우하는 것은 신앙일까? 자본일까?

조회수 2017. 11. 30.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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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먹고사는 문제와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독서모임에서 재미나게 읽는 책이 유시민 씨의 『국가란 무엇인가』(2017 개정신판)다. 국가에 관한 여러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개념을 차근차근 짚어주면서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 책은 다양한 생각 거리와 토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분들에게 추천할만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성향에 대한 아래 이야기는 깊이 공감이 갔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가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 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의 유연함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내부적으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배움의 노력을 해야 하며, 외부적으로 그런 내적인 노력이 가능한 여유와 쉼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일단 그 정도의 사유와 성찰이 가능한 경제적 안정이 필수적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헉헉대는데 ‘이웃의 고통을 해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든지 ‘무엇이 옳은 것이고 정의로운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것에 커다란 압박을 느끼지 않는 사회적 안전망과 경제적 안정 내지는 풍요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자입니다


최근 어떤 세미나에 참석한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개신교인의 정치적 성향과 여러 가지 요인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조사한 목사님의 발표를 들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개신교인일수록 근본주의, 문자주의, 창조과학 등에 깊이 경도되어 있고 진보적인 분들은 뚜렷하게 반대성향을 지니고 있었단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측한 결과인데 그다음 조사 결과가 흥미로웠다. 개신교인의 연간 수입과 정치적 성향을 조사했는데 여기서는 수입이 높을수록 그 사람의 신앙관과 상관없이 뚜렷하게 전부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고 한다. 근본주의건 자유주의건, 창조과학을 지지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수입이 높을수록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목사님은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자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편으론 깊이 공감 가면서도 씁쓸한 이야기였다. 결국 신앙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돈’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신앙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미미할 수 있다는 솔직한 통찰을 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우리는 근본 신앙 중심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할지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도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따라 정치적 성향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는 지인들이나 친구들을 많이 목격한 걸 보면 신앙이 ‘삶의 가치 판단’에 절대적이라 믿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어쩌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지 모른다. 만화 ‘송곳’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걸까?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많아진다. 결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먹고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부자 되세요!’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덕담으로 선언하기보다, 최소한 자신의 삶에 이웃과 공동체를 생각할 여유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상생’의 생태계를 만드는데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가난은 신앙의 미덕일 수 있지만 모두가 처참한 가난에 찌들어 노예처럼 살게 만드는 사회의 구조와 악의 시스템에 무관심하고 개인 영성만을 추구하는 것도 또 다른 악의 방관자라 생각한다. 그것이 기독교적이며 깊은 영성이라 주장하는 태도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하고 재미난 일은 ‘나의 세계’ 안으로 모든 관심사를 좁혀놓는 일일 테니까.


‘이웃’이 내 눈에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이웃의 고통’을 유발하는 ‘구조와 시스템’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 구조와 시스템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것은 아무리 현란한 종교적 수사로 꾸밀지라도 ‘기독교인의 배임(背任)’이다.


이웃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게으름과 사랑 없음’을 그럴듯하게 거룩한 영성으로 포장하는 아주 역겨운 짓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은 것이 한국 개신교의 근본적 문제가 아닐까?


원문: 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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