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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기 전에 '블레이드 러너'를 봐야하는 이유

조회수 2017. 11. 3. 1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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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미래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단언할 수 있는 건, 우리는 도통 그것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으로, 누군가에게는 희망적으로, 때문에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때론 대책 없이 낙관적일 수도 있고, 때론 너무하다 싶을 만큼 냉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그것도 가깝고 현실적으로 상상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극히 호불호 갈리는, 또는 철저한 마니아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SF 장르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인기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일 수도 있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기다리는 마음속 기대는 몇 가지 요인에 기인했다. 이 영화의 전작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 드니 빌뇌브의 이전 작품들에서 보아왔던 신들린 미쟝센과 가차 없이 사실적인 내러티브, 그리고 인중이 매력적인 남자 라이언 고슬링까지. 


무엇보다도 필자를 설레게 한 것은 메인스트림에 침투한 또 다른 사이버 펑크를 만나게 된다는 장르팬으로서의 감정이 가장 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은 남아있었고, 역시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 모든 나라에서 흥행에 실패했고, 대중의 평가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솔직히 팬으로서 눈물 나는 상황이지만, 영화의 성공이란 결국 보편적 취향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로 결정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이 영화를 세 번 봤고, 그걸 인생의 ‘잘했다 리스트’ 상위권에 올려놓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가 그렇게 각별하게 다가오는지, 21세기 한국 서울에 거주하는 사이버 펑크 팬으로서 한 번 써보고자 한다.

현대적 사이버펑크 미술의 집합으로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초반부는 마치 컨템포러리 아트의 영상작업을 보는 것만 같다. 높은 무질서도를 내보이지만 그러나 유의미한 연결로 이어져 있는 각 장면들이 보여주는 2049년의 로스 엔젤레스는 그저 숨이 막힌다.


영화에서 첫 어둠이 걷히고 K가 영화상의 첫 ‘살인’을 저지르기까지의 장면들은 좀 익숙하기도 하지만, 그 뒤 K가 집으로 돌아와 다시 호출받기까지의 그 모든 장면은 어쩌면 네온 빛 진한 한편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특히 숨 막힘의 절정인, “검은 핏빛 공허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로 시작하는 기준선 테스트는 아직도 뇌리를 맴돈다.

사이버 펑크가 다양한 서사 장르 중에서도 유독 독특한 점은, 바로 시각적 이미지가 절대적인 입지를 가진 장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이버 펑크를 기억할 때 어떤 문장이나 플롯의 특징보다 가장 먼저 이미지로서 기억하고, 소비한다. 때문에 소설 같은 텍스트 매체보다도 영화나 게임 같은 복합 매체에서 보다 주류로 소비된다.


사이버 펑크의 확고한 시각 요소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정립되어 왔다. 네온 싸인, 합성수지로 된 옷, 스모그, 조화롭지 못한 마천루, 대기업들의 심볼, 우중충한 비 내리는 날씨, 때 묻은 금속 물건들, 미니멀하고 금속 혹은 수지로 된 가구, 다분할 디스플레이, 다층화된 도시, 동아시아식 노점, 마름모꼴 박스에 담긴 국수와 젓가락, 퇴폐업소의 불빛, 비행 차량, 비좁고 자동화된 집안.


이는 그 어느 문화 기류보다도 시각 이미지가 잘 정립되어 있는 것이고, 사촌이라 할 수 있는 SF 하위 장르인 스페이스 오페라, 테크노 스릴러들과 궤를 달리하는 특징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 는 그런 사이버 펑크적 외형이 가지는 모든 시각적 클리셰를 모두 드러낸다. 미쟝센을 잘 다루는 것은 영화를 연출하는 데에 당연시되는 덕목이지만, 드니 빌뇌브는 어쩌면 미쟝센에 있어 이 시대 최고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감독의 전작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에서 단순히 하수구 입구만을 비추고 오히려 인물을 아예 지워버리고도 어떤 일들, 예컨대 고문 따위가 벌어지는지 상상케 하는 그 장면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K가 사무실로 돌아오고, 다시 호출을 받기까지 보여지는 수십분 간 쏟아지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그런 드니 빌뇌브의 연출 능력을 최대로 뽐낸다.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그저 일상으로 쏟아내는 이 장면들은 과연 K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세상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K가 어떤 존재로 대우받고, 어떻게 자기 영역을 지키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더할 나위 없이 쿨하고, 정보의 양 자체도 충분하며, 조금의 아쉬운 뒷맛을 남긴다. 그리고 이 아쉬운 뒷맛이 바로 최고의 부분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이 세계를 알아가길 갈구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일방향 상상이었던 사이버 펑크는 그 당시 상상했던 시간대에 우리 세대가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소통의 결과물로 변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21세기 들어 사이버 펑크 그 자체로 불리우는 나라에 살고 있다. 바수어 휘날릴 수조차 없을 만큼 단단하게 황폐한 도시와 그 안의 견고한 고독은 현재 우리네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Cyberpunk is Now’라는 현대 사이버 펑크 팬들의 표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미 그 시대의 상상을 너무 닮아 있고, 사이버 펑크 또한 우리의 삶 그대로를 투영한다. 수없이 많은 개인 속에서 서로에게 침투할 수 없는 우리는 각자의 욕망을 각자의 방식으로 푼다.


이는 우리가 서울 관악구, 마포구 등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풍경의 진화 판이며,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소름 끼치게 의미심장하고, 단순히 ‘멋지고,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양가적이다.

질문 : 영혼은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사람들이 사이버 펑크에 대해 논할 때, 그 정형된 이미지 외에 이 장르의 핵심으로 꼽는 것 하나는 바로 주제의식이다. 주로 선택되는 주제의식들은 네트워크와 기계화 속에서 훼손당하는 인간성, 그리고 그 인간성의 재정립, 인류의 발전과 개인의 몰락이라는 모순된 구조 등등, 특유의 테이스트를 가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작품들이 인간의 자기결정권은 스스로를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는지, 그 결정이 과연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개인적이고 미래적이며 기존의 정립되어 있던 인간적 정의를 비틀어버리는 것이 사이버 펑크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의 발전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선천성을 뛰어넘는 후천성을 가지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최초에 가지고 태어난 육신과 정신이 그야말로 보잘것없었던 인간은 후천적 도구로 그를 만회하며 진화해왔다.


창과 활, 칼을 만들어 냈고, 문자와 책, 언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는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 새로운 세대마다 그 이전 세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가진다.

<블레이드 러너 2049> 는 그런 궁극의 ‘만들어진 후천성’ 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그렇게 만들어낸 우리의 창조물, ‘만들어진 후천성’이 단순히 기존의 인류를 보강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모자라서 아예 대체할 수 있음이 밝혀지면서 이 영화의 사건은 시작된다.


이제 ‘폐기’ 당해 마땅한 것은 그 어떤 것에서도 우월성을 찾을 수 없는, 더불어 탄생 과정의 적통성이라는 마지막 보루마저 잃어버린 인류인 것이다.


이는 인류가 그동안 그 우월성과 적통성을 토대로 레플리컨트를 박해해 왔기 때문에, 그 박해와 학살의 역사가 이제 입지를 잃어버린 인류를 향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K의 상관인 조쉬가 느끼는 위기감은 전적으로 이런 자신들의 지난 죄악에 대한 자각에서 온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최후의 흑막으로 등장하는 니앤더 월레스는 그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조쉬 반장으로 대표되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레플리컨트와 자신들의 존재를 구분 짓는 마지막 벽이 무너지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니앤더 월레스는 과연 레플리컨트를 마지막 단계까지 진화시키려고 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정말 그의 말대로 값싼 노동력에 눈이 멀어 인간의 독보적인 존엄성을 포기하는 인물인가? 만약 후자라면, 영화 전체가 함유하고 있는 “레플리컨트는 과연 영혼이 없는 존재인가?”라는 이의 제기에 갑작스레 탐욕이란 방해꾼이 끼어든 느낌이다.

이런 주제의 일관성 문제는, 니앤더 월레스가 레플리컨트라고 전제한다면 모두 해소된다. 특히나 극 중 니앤더 월레스가 다른 레플리컨트를 ‘신제품’ 이라 칭하는 러브에게 “새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나?”라며 타박하는 장면과, 그 ‘신제품’에게 “번식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를 굉장히 자의적인 태도로 말하는 장면에서 그런 심증은 굳어진다.


이는 아마도 ‘데커드가 과연 레플리컨트인가?’ 하는 물음 만큼이나 의견이 분분한 부분일 것이다. 일단 글쓴이는 둘 다 레플리컨트일 것이라 믿는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은 결국 탄생의 적통성이 아니라, 후의 행동 과정과 그 결과가 말해준다는 키워드는 이미 그동안 다양한 서사물에서 꾸준히 다뤄온 주제다. 같은 SF 장르들뿐만 아니라 사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도 이 주제로 편입할 수 있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우리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특별해진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한발 더 나아간 화두를 던진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정의해야 하는가?”

전작을 뛰어넘어 이런 한발 더 나아간 화두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은 조이(Joi)다. 인간, 혹은 레플리컨트와 AI인 자신의 유일한 차이는 A, C, G, T 의 염기서열과 1, 0 의 코드 뿐이라 주장하는 이 인물은 우리의 가치판단 자체를 흐려버리는 존재다. 대량 생산된 공산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AI는 진심을 다해 K에게 사랑을 말한다.


과연 그녀가 AI라고 해서, 또 수백 수천만의 복제품 중 하나라고 해서 그녀와 K 사이에 이어진 붉은 실이 가짜라 할 수 있는가? 보여진 현상이 아니라 근거인 탄생의 방식만으로 그걸 폄하할 수 있을까?


조이는 K에게 ‘조’라는 이름을 두 번 부여함으로써, 첫 번째에는 그를 하나뿐인 진짜로, 두 번째에는 그를 전혀 특별하지 않은 가짜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자신의 탄생의 특별함이 부정된 시점에서 K는 자신을 진짜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한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따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조이가 내뱉는 마지막 말은 K의 마지막 선택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K의 조이를 수많은 복제품 중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녀가 K와 한 사랑, 조이와 이어진 K라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그녀는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연인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인 것처럼.


극 중, 조쉬 반장과 K는 이런 대화를 한다.


“그렇게 태어난 존재라면, 영혼이 있지 않을까요?”

“넌 그런 것 없이도 잘 살아왔어. 영혼말이야.”

우리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남발하고, 또 혼용한다. 인간성, 인간의 고결함, 생명의 증거 등등 수많은 다른 말들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과거 SF 명작 중 하나인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인간임을 인정받고 최후를 맞는 로봇 앤드류의 옆에서 그의 아내 포샤는 “나도 곧 갈 테니, 기다려요.”라고 말한다. 과연 영혼만이 남아 갈 수 있는 사후세계란, 인간이 되기 위해 로봇의 불멸성을 포기한 존재에게도 열려 있을까?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최후의 보루가 영혼의 유무라면, 우리의 영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인간성, 우리의 고결함이 그걸 간신히 증명할 수 있다면, K가 마지막에 지켜낸 스스로의 고결함은, 비록 타인이 기억하고 간직하지 못하더라도, 그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미래상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둘 다 발표 시기로부터 약 30년 후 즈음을 그리고 있지만, 그 시간 차이 때문인지 몰라도 두 미래사회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 당시의 거추장함과 우악스러움은 이제 현대의 미니멀리즘, 슈퍼플랫으로 변했다.


공통적으로 ‘발전했으나 동시에 몰락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지만, 단순히 세계관 내에서의 시간 흐름 이상의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결국 미래상이란 현재의 반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2049의 미래는 훨씬 개인적이며, 외연적으로도 내연적으로도 모두 고독하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바 테이블에 줄줄이 앉아 서로 찻잔을 나누고 웃으며 주인장이 내어주는 밥을 같이 먹던 이들은 이제 각자 나뉘어진 테이블에서 혼자 말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자판기가 내주는 밥을 먹는다.


사람이 가득하고 형형색색으로 빛나던 도시는 회색으로 슬럼화되고 스프롤화 되었으며, 누군가의 번영 뒤에는 다른 누군가의 참담함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깔끔해진’ 모습이 사이버 펑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사이버 펑크다움’ 역시 30년 동안 변화해 왔다는 점 때문에, 이 영화가 80년대 초기 사이버 펑크 물과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건 영화를 비롯한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현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보여지는 K의 삶은, 비록 과장되어 있지만, 우리 현대 도시인들의 삶과 그토록 닮아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가 사는 모습이 그 시대의 것을 많이 닮아 있듯이 말이다. K의 방을 보며 우리가 사는 자취방이 생각나지 않는가?


텅 빈, 정말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 만을 두고 그 안에서나마 안식을 찾겠다고 창문을 보게 식탁을 놓고, 수많은 군중 속에서 개인에 대한 존중 혹은 따뜻한 온기 하나 없이 혼자 밥을 먹는다. 위안거리 또한,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불가능한 것에 불과하다.


그게 지금 우리의 삶이 아니면 무엇인가. 요즈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의 고결함이나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존감을 얻기보다는 그걸 잃어버릴 일이 더 많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K의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새로운 미덕이 될 수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우리 시대에서 계속해서 기억되고 향유되었으면 하는 많은 것들을 대변하고 있다. 부디 미국 국회도서관 영구소장 목록에 하루빨리 올라가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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