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거는 기대는 때로 무섭다

조회수 2017. 10. 27. 09: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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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타인의 생각을 알아맞힌다는 것


사실상 초능력에 가까운 이것은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학문에 대해 대중이 갖는 기대의 대부분이라 할 만하다.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심리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설명 도구를 쥐여주어야만 하는 것이, 대중이 생각할 때 심리학이 으레 지녀야 하는 중대 사명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심리학자들은 ‘내 마음을 맞춰보실 수 있느냐?’ 는 질문에 대해 고개를 젓는다. 심리학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라 말하며 더 이상의 자세한 논의를 거부하는 학자도 있는가 하면, 씁쓸한 표정으로 ‘우리도 그것이 가능했으면 좋겠어요…’ 라고 체념하듯 말하는 학자도 있다.


지금부터 ‘인간의 심리를 읽는 일’, 그 속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 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쉽게 읽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결과적으로는 더 다행스러운 일일 수 있음을 말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아직 심리학에 정복당하지 않았다. 복잡하고 또 복잡한 인간의 심리는, 심리학자들에게 끝내 금단(禁斷)의 길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심리학을 공부했음에도 여전히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읽는 일에 주저한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알던 것보다는 모르던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일이 더 많다.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한편으로 아쉽다. 심리학에 기대한 것이 많았건만, 정작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마음 하나조차 읽어낸다는 것이 이리도 버겁다니.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때려 맞추는’ 학문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심리학은 정녕 무엇을 위한 학문이란 말인가. 하지만 심리학을 바라보는 우리는 마냥 아쉬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심리학의 약진이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은 데이터와 확률로 이야기하는 학문이다. 사람들은 심리학으로부터 독심술을 기대하지만 정작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알아맞히려면 그전에, 마음을 읽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데이터를 부지런히 수집하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성별, 나이, 성장배경, 가족력, 신념과 가치관, 성취, 직업, 가족, 소득, 성격적 특성, 주위 대인관계 등등 다양한 출처로부터 부지런히 습득된 정보는, 대상이 지닌 생각과 행동의 패턴(pattern)을 확률적으로 추론되는 데 활용된다.


심리학 이론이 가리키는 핵심 정보들에 가까워질수록, 의미 있는 데이터의 양이 증대될수록 생각/행동에 대한 추론은 보다 정교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심리를 읽는 일’이 내포하고 있는, 어두운 면을 마주하게 된다.


심리를 읽기 위해서는 보다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공공연히 나도는 정보를 추론 도구에 포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당도와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더욱더 은밀하게 감추어진 정보들이 사실 더욱 필요해진다.


인상 관리를 위해 개인이 내보이는 가면 속에 숨겨진, 은밀한 개인적 정보들. 그것들이 촘촘히 더해질 때 인간의 심리를 맞추려는 대담한 시도는 비로소 현실성을 더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인간에 대한 빅데이터’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의도치 않게 그에 관한 지극히 은밀한 정보들까지 손에 움켜쥐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도 내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적인 방에서의 흔적들까지도 들쑤실 수 있는 정교함과 대담함이다.


인간의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맞출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어떤 사회일까? 아마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남겨두어야 할, 차마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런 정보들이 공공재인 양 떠도는, 지배와 감시가 만연화된 그런 사회는 아닐까?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이러한 존재다.’, ‘인간은 특정 상황에 닥쳤을 때, 이러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등등. 심리학자들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인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말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심리학자들이 절대 빼놓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예외’의 존재다. 통계를 주 무기로 삼고 있는 심리학은 확률을 기반으로 하기에 심리학적 지식을 곧 절대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어떤 하나의 가능성이다. 집단 영역에서는 들어맞는 이론이더라도,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의 영역에 들어서면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기에 심리학 이론은 적어도 개인에게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고 따라서 다수에 통용되는, 거대한 질서에 반항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만이 가진, 삶의 법칙대로 살아갈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개개의 독립 변인 – 종속 변인의 쌍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상황에서도 이는 결코 예외가 아니다. 기존 연구에서는 A-B를 이야기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여타 조건에 따라서 A는 C로도, D로도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즐겨 활용하는 조절 변인(moderator)의 함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일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다. 복잡 다양한 인간의 생각은 결코 일차원적 방정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래서 경우에 따른 예외 상황은 끊임없이 가정되어야 한다.


독립 변인이 종속 변인에 미치는 영향을 조절하는, 제3의 변인은 과연 무엇일까? 심리학자들의 관심은 바로 그곳에 머물고 있다.


심리학 연구들 속에 조절 변인이 차고 넘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절 변인의 수가 많아질수록, 구조 방정식 속에 조절 변인의 투입 양태가 보다 고차원적으로 반영될수록 그것은 곧 인간의 심리가 그만큼 단순한 것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절 변인의 존재는 인간의 심리를 알아맞히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곧 ‘건강한 사회’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만큼 무수하고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과, 신념과, 철학과, 느낌과, 사고들이 우리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을 손쉽게 읽어내는 것이 가능해진 사회를 살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인간적 다양성이 거세되고 지극히 단조로워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황홀하다. 하지만 상대의 생각을 쉽사리 읽을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 또한 분명 가치 있다.


누구에게나, 결코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쯤은 존재하는 법이다. 심리학에도 ‘매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비밀을 소중히 간직하도록 지켜주는 일일 것이다. 그의 통제감, 의지, 정체성이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속 비밀의 영역을 남겨두는 일일 것이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가치는 인간의 생각들을 낱낱이 까발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통제 불능의 존재인지를 새삼 인식시켜주는 것에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나는 때때로 즐겁다. 내 앞에 있는 누군가의 생각을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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