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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2017.08.16. 작성

엄마에게 필요한 건 죄책감 다이어트

몸만 다이어트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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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필요와 호기심에 의해 열심히 보고 있는 육아 서적이나 강연, 그리고 이에 관련된 자기 성장을 위한 컨텐츠들. 100%는 아니지만 메모도 하고 되새김질도 하며 열심히 보고 있다.


직간접 경험을 통해 아이에게 부모가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아이의 애착이나 자존감이 어떤 원리로 인해 형성되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해 느낀 것은,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무겁다>였다.


부모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영유아기엔 특히 더,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다. 어릴수록 부모(주양육자)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생존환경이자 모방 대상이기에 그렇다. 


부모는 아이에게 ‘양육 환경 그 자체’이다. 어떤 물건을 쓰고 어느 지역에서 어떤 유치원을 다니고 하는 것이 환경이 아니라, 부모가 그냥 환경 100%다.


그런데 부모의 ‘환경으로서의 역량’은 그 중요성만큼을 따라가질 못한다. 너무나 당연하다. 프로 부모 같은 것은 없다. 육아 자체가 성장의 과정이기에 그렇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고 그때그때 대응해야 하는 생중계 방송이기에 그렇다. 부모가 중요하긴 하지만, 책대로 메뉴얼대로 잘할 수는 없는 건데, 그 부분이 간과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부모는 채찍만 맞고 있다는 생각이다. 시간적 여유가 많고 양육에 대한 배려가 사회적으로도 잘 되어 있는 서구 어딘가의 사정과 우리나라의 사정은 또 다른데에도, 같은 수준의 잘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놀아주고 받아주고 공감해줘야 한다 등 해야 할 일, 참아야 할 일이 잔뜩 요구된다.


물론 부모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렇게 자식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진 존재인 것이 맞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모는 적은 게 현실이다.


‘올바르고 바람직한 육아 컨텐츠’를 보면서 느낀 솔직한 개인적 감상은, 이렇게 노력해야겠다고 하는 <각오>와, 이렇게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지?하는 <두려움>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중이라면,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죄책감>’이 동반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아프기만 해도 내 탓인 것 같아 눈물짓는 것이 엄마다. 그런데 내가 선택해서 아이에게 한 행동이 아이를 아프게 했다면, 그래서 아이가 잘못된 것 같이 느껴진다면 그 괴로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너무나도 많은 하소연에 그런 것이 포함된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화가 나서 소리 질렀어요. 상처 준 것 같고, 내가 너무 못난 엄마 같아서 죄책감이 들어요.”

“난 모성애가 없는걸까요? 오늘도 못 참고 아이 엉덩이를 때려버렸네요. 제 자신이 싫어져요..”

“남들은 아이만 봐도 마냥 이쁘다는데, 아이를 봐도 웃음이 나질 않아요. 떼쓰고 우는 걸 보면 내 자식이지만 밉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엄마 자격 없는거죠?”

비슷비슷한 하소연을 놓고 엄마들끼리 위로를 교환한다. 엄마도 사람이에요, 완벽할 수 없어요, 우리 힘내요. 등등 그리고 또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 기대하며 아이에게 미안한 만큼 더 잘해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늘 쳇바퀴에 선 다람쥐마냥 비슷한 일상을 반복한다.


대체 왜일까? 정말 내가 ‘모자란’ 엄마라서, ‘부족한’ 아빠라서일까? 자기 성장 측면에서 부족한 것은 맞을것이다. 하지만 평생 가도 자기 성장은 계속되는 것이라 그 단어 앞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부족’이라는 단어는 잊어도 좋다.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다. <죄책감>이 그것이다. 하나같이 죄책감을 언급한다. 엄마가 되면, ‘엄마’라는 묵직한 무게의 역할이 하나 더 생긴다. 얼마나 무겁냐 하면, ‘바람직한 모성애’라는 틀 안에서 거기 맞추지 않으면 내가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의 무게이다.


몸이 피곤하면 짜증이 날 수도 있는데, 모자란 잠을 꾹꾹 눌러 참아가며 아기를 돌보다가도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면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엄마 자격이 없어!’라고 스스로 채찍질을 할 만큼의 무게이다.


‘엄마 역할’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이고, 잠깐이라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금방 <죄책감>이 올라온다.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임에도 바로 죄책감으로 연결지어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 정신 차리라고 일갈할 만큼의 무게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엄마가 된 여성은, 자기 안에 형성된 고정된 ‘엄마 상’과 외부에서 요구하는 ‘좋은 엄마 상’의 사이에서 꼼짝 못 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잘 해보겠다고 정보를 모아도 불안해지거나 미안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는 워킹맘은 더할 것이고, 전업주부이라고 마냥 자신감 넘치지도 않는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화된 것에 편승하는 걸 더 안정적이라 여기는 성향이 있기에, ‘엄마란 이래야 해’ 같은 관념이 진리인 양 요구되는 현상이 더 심화된다.


엄마는 이래야 해-라는 관념 속에서, 이를 해내지 못했을 때 갖는 과한 <죄책감>이 육아를 힘들게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과한 죄책감은, 과한 자기표현과 감정 과잉으로 나타난다. 마치 하소연 속 엄마들의 자책처럼.


당장 어떤 역할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적절한 역할 수행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엄마 역할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것은 개인 심리 차원의 문제다. 이런 경우는 엄마가 아닌 그 어떤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보인다.


딸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등 여러 역할에 있어서 잘해야 하고, 인정받고 싶고,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과하던가, 아니면 역할과 나를 너무 동일시해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나’가 아니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거리를 갖고 있지 못할 만큼 내면이 공허한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자기 성장의 과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이런 면에서 자유롭고, 유연하게 자기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이라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라며 편하고 차분하게 육아에 임할 것이다.


그런 이들은 역할은 삶의 과정에서 잠깐 주어지는 무언가이며, 얼마든지 생기거나 없어질 수 있는 유연한 것임을 안다. 삶에 여유가 있는 셈이다.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역할에 불편할 만큼의 무게를 싣고 있다면, 어깨에 힘을 빼길 권한다. 그 불편함과 부담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편하지 못한’ 아이를 키워낸다. 잘하려다가 되려 아이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부모에게서 잘 자라는 아이가 나온다.


<죄책감>은, ‘지금-여기의 생생한 삶’과 거리가 멀다.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느낀 순간적 감정에, 자신의 내면에 얽혀 있는 경험과 기억이 버무려져 쓸데없이 과한 옷을 입고 등장한 불청객과도 같다. 그것은 과거의 망령이지 현재의 생기가 아니다.


내가 아이의 욕구를 잘 들어주겠다고 다짐했다가, 이것을 잘하지 못해서 아이가 움찔했을 때, 그때 느끼는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미안함’인 것이 맞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다르다. 미안한 것은 현장에서 상대에게 향하는 에너지이다.


‘내가 <상대>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해서 상대가 괴로움을 느꼈다, 미안하다’는 것에는 과한 심각함이 없고, 지금-여기에서의 상호작용을 인식하여 파악한 것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죄책감은 그 성질이 조금 다르다. 이것은 내가 나를 해석하는 총체적인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무엇을 해서->상대가 무엇을 느꼈다’ 하는 상호작용 속에서의 이해보다는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밖에 못했어, 이런 잘못을 했어, 나는 역시 안돼’ 같은 자괴감과 연결되어 내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무거운 의미가 깔려 있다. 죄책감은 그래서 육아뿐 아니라 삶의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의 독이다.

<죄책감>을 ‘미안함’,’안타까움’ 등으로 바꿔서 생각하고 말하길 권한다. <역할을 못 했다>,<자격이 없다>를 <이번에 내가 잘못을 했다>로 바꿔서 생각하고 말하길 추천한다. 불필요한 무게감은 내 안에서, 내 말에서부터 덜어내야 가볍고 편해진다.


그렇게 바꿔 말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상황을 미화하거나 덮어두는 것이 아니다. 잘못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차분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가 상황을 과하게 부풀리고, 내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해서 해석해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정신적 여유가 없고 자기 성찰력이 부족할수록 감정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본인도 주변도 불편하게 하는 일이니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감정과잉적 표현을 고치는 것이 좋다.


단, 단어에 담긴 무게감을 덜어내는 대신, ‘내가 한 행위 뒤에 있는 내 욕구 관찰’을 추가한다. 그리고 뒤에 꼭 ‘다음부터는’을 붙여서 미래지향적인 다짐이 담긴 말을 첨가하고 자신을 격려하는 연습을 해본다.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는 법이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화가 나서 소리 질렀어요. 저에게 울컥하는 면이 있더라고요. 아이가 놀라고 상처 받았을 거라 미안해요. 아이를 얼른 달래고 사과했어요. 이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으니 다음번엔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겠어요.”

“오늘도 잘못을 했어요. 못 참고 아이 엉덩이를 때려버렸네요. 미안하고, 우는 아이를 보니 안타까웠어요. 저에게 참지 못하고 손부터 나가는 면이 있었나봐요. 다음엔 한 번 더 아이 눈을 보고 말을 건네겠어요.”

“남들은 아이만 봐도 마냥 이쁘다는데, 아이를 봐도 웃음이 나질 않아요. 떼쓰고 우는 걸 보면 내 자식이지만 밉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나봐요. 좀 더 기다렸어도 되는데 미안했어요. 다음부터는 바로 아이에게 뭘 하려고 하기 보다는 저부터 마음의 여유를 찾게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다시 아이를 쳐다봐야겠어요.”

한 행동, 즉 일어난 사건에는 변화가 없지만, ‘내가 이런 면이 있더라, 내 상태가 이렇더라’ 하는 관찰과 성찰이 있고, 그때의 감정에 과한 무게추를 달지 않아 현장감이 느껴진다. 내가 뭔가 잘못했으니, 미안한 것이다.


심플하다. 나라는 인간은 이거밖에 안 된다느니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스스로 자존감 깎아 먹는 문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내 상태를 묘사할 수 있다.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고 싶다면 처절한 단어 사용을 즐기면 된다. 그러면 과도한 감정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어, 아이가 앞으로 자기표현을 더욱 과하게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쪽이 더 무섭지 않은가…)


그리고 성찰이 있기에 대책도 나온다. 나 자신의 내면이나 상태를 관찰하는 습관이 들면 아이의 그것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면의 것을 관찰해서 뜻을 읽으려는 시도가 공감의 시작이다. 내면 성찰도 하고, 쓸데없는 죄책감을 덜어내서 멘탈 관리도 하고, 공감 연습까지 되니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다.


육아에 있어서의 죄책감 다이어트는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몸만 다이어트할 것이 아니라, 감정도 다이어트를 해서 가벼워지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원문: 율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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