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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2017.08.16. 작성

미래 먹거리라던 ‘천연물신약’은 왜 사라졌을까

1조 원대의 연구개발 14년,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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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분명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한국에서도 꽤 익숙한 광경입니다.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유림’과 우유 섭취가 비인간 여성에 대한 착취라 주장하는 ‘비건’들이 공존하는 곳이니 해외에서 정의된 개념이지만 어쩌면 한국 사회가 이에 더 부합할지도 모릅니다.


약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다른 예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한동안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며 기대를 모았었지만 지금은 조금 초라하게 사라져 버린 ‘천연물신약‘에 대한 얘기입니다. 우선 익숙지 않은 개념인 천연물 의약품(botanical drug)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천연물 의약품이란 식물, 동물이나 곤충, 더 나아가 광물 등 천연물에서 유래한 물질을 이용해서 만든 의약품을 말하는데요. 사실 대부분의 의약품들이 식물 등에서 유래된 물질인 만큼 이 정의는 조금 이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협소하게, 천연물에서 추출한 ‘혼합물’을 의약품으로 사용하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이 특수한 분류군에 속하는 의약품의 정의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미국에서 승인받은 최초의 천연물 의약품인 베레겐®(Veregen®)은 생식기 사마귀 치료제로 녹찻잎을 물로 추출해서 정제·농축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의약품의 기준으로는 ‘녹차 추출물’이라는 혼합물이 아니라 녹차 추출물 내의 특정 성분을 정제하고 그 화합물의 안전성·유효성을 평가해 승인해야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벗어난 약인 셈이죠.

미국에서 최초로 승인받은 천연물 의약품 베레겐®

그런데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정보 없이 위 문단만을 읽으셨을 때 다음 중 어떤 것이 맞는 선지로 보이시나요?


  1. 화학합성 의약품이 아닌 자연에서 채취한 식물 성분을 추출한 약들이 몸에 더 좋다.
  2. 서양의학적 관점이 아닌 동양의학적 관점에서의 식물 약재들이 뒤늦게 우월성을 인정받고 있다.
  3. 화학합성 의약품으로 치료하던 질병들을 모두 천연물 의약품으로 치료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4. 집에서도 녹차 잎을 장시간 우려내서 증발시킨 다음 그 잔여물을 사마귀 환부에 바르면 비슷한 효과를 낼 것이다.


위의 선지 중 맞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의료 분야에서의 비동시성의 동시성, 즉 약물치료에 대한 현대적 인식을 갖춘 사람과 막연히 ‘화학 합성된 물질은 몸에 나쁘고 천연물이 좋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공존하다 보니 저런 오해를 하는 것이죠. 이런 기본적 이해를 깔고 의약품의 역사와 천연물 의약품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805년 현대의학에 있어서 꽤나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약사인 제르테르너(Friedrich Sertürner)가 아편에서 모르핀을 단일 성분으로 분리했거든요. 마약(?) 하나 분리한 그깟 일이 뭐가 대수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이는 현대의학의 개념 성립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확히 알 수 없는 ‘약초’의 영험한 효력이 아닌 약초 내 ‘특정 성분’의 약효로 사람이 치료된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거든요.

단일 약효 성분이 규명되고 그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약의 ‘정량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애매모호한 경험적 처방이 아닌 특정 양에서 특정 효과가 나타난다는 기준이 정립되었죠. 그를 근거로 한 유효성과 안전성(독성·부작용) 판단도 가능해지게 됐고요. 그렇게 단일 성분 → 단일 타깃(약물이 작용하는 수용체)이라는 현대의 약물치료 요법이 정립이 되었습니다.

아편에서 모르핀을 분리한 제르테르너.

그런데 이에 반해, 동양권에서는 단일 성분의 분리에 기반 둔 정량화와 안전성·유효성 평가 등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로 전통적인 의약품 처방(탕약, 환 등)이 지속되었습니다. 한국으로 한정하자면 한방처방인 한약들이 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의사는 ‘한국에만 있는 미개 풍습’ 정도로 과하게 비난하기도 하지만 독일 등지의 유럽권에서도 생약(Herbal medicine)은 별다른 검증 없이 경험적 의약품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보조적이고 경미한 질환에 처방전 없이 사용하는 일반의약품일 따름이지, 한국에서와 같은 지위가 아닐 뿐이죠.


전 세계 어디서건 질병 치료에 사용하는 가장 주된 형태의 의약품은 단일 성분으로 정제된 합성의약품입니다. 경험적 근거에 기반 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천연물 추출물이 아닙니다. 단일 성분의 안전성과 유효성 평가는 약물 사용의 기본이고 현재 그 입장은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조금 특이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단일 성분에 의한 단일 타깃 요법이 아닌 복합적인 성분들에 의한 복수의 타깃 요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 인류가 앓고 있는 대부분의 질병은 앞서 설명한 합성 의약품들과 단일 성분에 의한 단일 타깃 작용이란 패러다임 하에서 치료가 가능합니다. 감염성 질환은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항생제·항바이러스제 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고, 에이즈처럼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일상생활 영위가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여타의 중증질환들도 치매 정도만 제외하면 약물치료로써 치료·관리가 가능하고, 암 같은 경우도 바이오 의약품의 개발이 진전되면 거의 정복 가능해질 겁니다.

그런데 ‘그리 심각하지는 않으면서도 약물 요법에 의해 치료가 쉽지 않은 만성질환의 치료에는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냐’는 의견이 대두됐습니다. 어떤 단일 타깃에 대한 작용이 아니라 복합적인 타깃에 복합적 작용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에는 단일 유효성분의 규명이 난망하여 외면받던 천연물 추출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정확히 어떤 기작으로, 어떤 수용체를 대상으로 작용이 이루어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특정 조건으로 추출·정제한 천연물들이 일관적 효과를 보이며 그를 상쇄할 수준의 독성이나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혼합물 자체를 의약품으로 인정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죠.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의약품 승인기관인 미국 FDA도 별도의 천연물 의약품 분류를 만들었고 2017년 현재까지 두 개의 천연물 의약품이 최종 승인됐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SK케미칼의 골관절염 치료제 조인스정®을 시작으로, 한약재 처방들을 응용한 천연물신약 8개를 승인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자국의 유서 깊은 전통의학 데이터들을 이용해 아주 적극적으로 이러한 개발을 밀어붙이고요.


한때는 한국 제약산업을 먹여 살릴 차세대 동력이라고 각광받던 분야였는데, 현재는 ‘천연물신약’이라는 명칭마저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2015년, 감사원에서 식약처와 보건복지부에 감사를 진행합니다. 「천연물신약 연구개발사업 추진실태」라는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천연물신약 연구개발비 지원이 비상식적으로 이루어졌음에 더해 신약 승인 절차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받게 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현대 의약품의 기본은 성분 규명과 그에 대한 안전성·유효성 평가입니다. 해외의 천연물 의약품 역시도 어떠한 성분이 있는지, 그 성분의 혼합물이 안전성·유효성을 지니는지 비슷한 수준으로 규명을 요구하고요. 그런데 한국의 경우 최초의 천연물신약인 조인스정®을 제외하곤 그러한 절차를 대폭 생략해주는 승인 상의 이점을 업고 개발되었습니다.


한의학 문헌에 처방으로 사용된 기록이 있으면 그러한 안전성 관련 규명을 면제해주는 식으로 승인해준 셈입니다. 이게 해외에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기준이었던 것이죠. 사실 이러한 용인이 이루어진 것은 현재 한국에서 한약 처방 기준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적인 의약품과 달리 한약은 안전성·유효성 평가를 받지 않고 『동의보감』 등 몇 가지 공인된 한의서에 포함된 처방은 모두 임의대로 처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허술하고 한국에서나 정치적 이유로 용인되는 관행을 천연물신약 승인 근거로 인정했으니 수출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국내에서도 감사원 철퇴를 맞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7년엔 ‘천연물신약’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앞서 얘기했듯 세계 각국의 천연물 의약품 개발 시도는 이미 정립된 안전성·유효성 평가 방법론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전근대적인 전통의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14년간 1조 원대의 연구개발 예산까지 지원했던 천연물신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일련의 ‘한국형’ 사업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셈이죠.


그럼에도 천연물 의약품이라는 새로운 관점의 의약품은 주목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관리가 힘든 만성질환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도 있고, 개발할만한 것은 이미 다 나왔다는 한탄이 나오는 합성 의약 분야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 단일 성분의 효능 규명 방식으로는 밝히기 힘들던 약효가 최근의 방법론을 적용해서 여러 성분들의 복합적인 작용을 검토하는 방식으로는 입증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천연물 의약품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그지없는 장내 미생물(gut microbiome)에게 작용하여 2차적 생리 반응을 유도하는 현상이 규명될지도 모릅니다.

한국 역시도 누적된 전통의약적 지식에 기반 두고 돌파구를 열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재와 같은 전근대적 의약품에 대한 용인이 상존하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아직도 약초로 암을 고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절박한 환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최신 연구결과를 통해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질 리가 없지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고려할 때 적극적 논의가 힘들겠지요. 지금보다 조금 더 개선된 치료법을 얘기하려다가 ‘안아키’ 방식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오해가 퍼진다면 국민 건강을 위해서는 그냥 얘기를 안 꺼내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추후 세대교체와 더불어 인식개선이 나타난다면 이러한 논의도 탄력을 받아 현대 의학의 대전제 위에서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원문: Coldtongue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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