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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2017.08.12. 작성

거절을 좀 더 일찍 배웠더라면

일 의뢰하는 순간은 프로와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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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는 분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는데 단칼에 거절했다. ‘재능기부, 비영리단체, 좋은 일, 맛있는 밥’ 등 무료 부탁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줄줄이 나오길래, “저는 돈 안 받으면 일 안합니다” 라고 잘라버렸다.


속이 후련했다. 이 거절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더라면 인생이 훨씬 편했을텐데…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2.


오래전 미국서 기차여행을 하다 폴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열차에 문제가 생겨 한참 연착될 상황이 생겼는데 ‘에고 어쩔 수 없지’ 하고 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 “보상해달라. 책임져라” 하며 큰 목소리를 냈던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폴과 나다. 우린 전우 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금방 친해졌고 나중엔 초대까지 받아 폴의 집에 며칠 머물게 됐다.


돌돌 말아 올린 수염, 분신처럼 품고 다니던 우클렐레 등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끼긴 했는데 집에 갔더니 폴은 엄청난 아티스트가 아닌가. 빈티지 캐논부터 니콘, 라이카 등 카메라가 약 스무대, 렌즈는 더 많고 각종 기타와 악기뿐 아니라 방 안은 물감과 캔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상상에 그리던 아티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폴의 친구가 찾아왔을 때였다. 백지의 카드에다 쓱쓱 축하 글씨를 써 주더니 $15불을 자기 페이팔(미국에서 쓰는 온라인 결제 서비스)에다 넣으라 알려주는 것이었다. 난 속으로 ‘친구끼리 저 글씨 하나 써준 것 갖고 돈을 다 받네. $15이면 만 오천 원인데 그냥 해주지…’하고 생각했다. 폴은 이어서 티셔츠에 아주 간단한 그림을 그려주고 이건 $20이라고 했다.

와, 미국 사람들은 정말 이런 계산이 정확한가보다. 참 정없네.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때가 바로 ‘아티스트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가는 법’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알아보지 못하고 걷어찬 첫 번째 순간이다. 프로의 작품을 구입하는 건 당연한 건데 난 어리석게도 그걸 인간미 없는 미국문화의 단면이라고 치부해버린 것이다. 왜 난 이때 공들인 시간과 노력은 실제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액수가 크건 작건 이 부분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걸 왜 보지 못했을까.



3.


다음은 내 부끄러운 기억. 중요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할 일이 있어서 2세 친구에게 부탁한 적 있다.

야 이거 엄청 짧고 간단한 건데 좀 해줄 수 있어? 완벽하게는 안 해도 되니깐 좀 해줘. 너한텐 엄청 쉬운 거야.

구역질 나는 부탁이다. 내가 뭔데 이게 간단하고 쉽다고 판단한단 말인가. 친구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짧은 문서라는 이유로, 친구는 영어가 더 편한 2세라는 이유로 내 마음대로 짐작해버린 것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내가 심각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누군가에게 똑같은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

야 히바야, 이거 영상 진짜 짧은 건데,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막 화려하고 멋지게 안 해도 되니깐 이거 편집 좀 해줘.

영상은 길이가 짧다고 쉬운 게 아니다. 이건 어떤 느낌이냐면, 구구절절 설명보다 다른 예를 들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최 변호사, 이거 뭐 딱히 크게 이기지 않아도 되는데, 간단한 재판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좀 맡아줘. 뭐 최변 맨날 하는 민사재판이니 별거 아닐 거야.
김 친구, 울 회사 와서 강연 한 번 해줘. 뭐 직원들 눈물 콧물 안 빼도 되니깐 그냥 편하게 하면 돼. 너 맨날 하는 이야기 있잖아. 그거 그냥 한 시간 반 정도만. 너무 애쓰지 말고.
박 회계사, 아 이번에 폭탄 맞았네. 이거 어떡하나. 영수증이랑 자료 보내줄테니깐 조금만 줄여줄 수 있을까? 뭐 세금 안 낸다는 건 아냐. 그냥 너무 많아서. 좋은 데 가서 술 한 번 살게.
어이 이포토, 이번에 우리 누나 결혼하 는데 와서 사진 좀 찍어주면 안 돼? 예쁘게 안 찍어도 돼. 그냥 너 좋은 카메라 있으니까, 신경 많이 쓰지 말고 몇 장만 찍어 달라는 거지. 아, 뽀샵도 조금… 괜찮지?

물론 이 예들은 ‘노 페이’를 기반으로 한다. 과장된 것 같기도 하지만 난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내 경솔한 행동에 깊이 반성했다.



4.

우리나라는 아직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예술, 기술 분야에 보수를 지불하는데 인색하다. 지나치게 빨랐던 경제 성장에 비해 문화나 국민 의식 수준 고양 속도가 못 따라가기도 했고, 처음부터 무료로 음악, 영화 등을 다운 받는 방법이 범국민적으로 전파된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러니 ‘왜 다들 내 기술을 공짜로 쓰려는 거지’ 하며 분통만 터뜨리고 있을 게 아니라 스스로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시간당 얼마, 작품당 얼마 하고. 가족, 친구, 지인 등 어느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그런 기준 말이다.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는 길이요,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다. (나도 아직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액수보다 관계의 문제, 자존감의 문제다. ‘혹시 이 부탁 안 들어주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돈만 밝히는 놈이라 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휘둘리다 보면 이내 불행에 빠진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무게 중심이 항상 내게 있어야 하는데 맨날 남 눈치를 보다 내 마음만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거 해 주면 나중에 제대로 된 일 줄 것 같아서 맡고, 지금 잘 보여놓으면 다음에 큰 도움 될 것 같아서 그냥 해주고. 이렇게 신기루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물가에 가기도 전에 탈수증상이 찾아올 수 있다.


우리가 남이냐고? 남은 아니지. 일을 의뢰하는 순간만큼은 프로와 고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5.


아티스트. 평소에 자존심 센 척, 자기가 최고인 척, 맨날 즐겁고 행복한척 하지만 사실은 악플 하나, 전해 들은 말 하나에 쉽게 바스러져 버리는 예민하고 약한 인간일 뿐이다. 당신처럼.


너무나 짧은 인생, 아닌 것 같으면 당당히 거절하자.


원문: Hiba Kim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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