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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네, 선배 맘이 그럴 줄

조회수 2017. 7. 1. 20: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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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대학시절에는 선배님이 그렇게 커 보였어요

07학번 언니, 참 오랜만이에요


기억나세요? 고등학교 급식을 뗀 지 2주 만에 20대 신입생이 된 저와 언니의 첫 만남이, 어언 6년 전 일이 됐네요. 저를 보며 파릇파릇하다, 귀엽다 했던 언니가 아직도 생생한데 저는 어느덧 ‘왕고’를 넘어 하나의 유물로서 캠퍼스에 남아 있답니다.


제가 2학년, 3학년이 되어도 마냥 애기 같다던 언니의 달콤한 말에 취해 있는 동안,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버렸어요. 이제 캠퍼스에서는 제 언니는커녕 오빠뻘조차 찾기 힘들어요. 최연장자의 입장이 되니 새삼 언니에게 죄송스러웠던 일이 많이 떠오르네요.

10학번이 붓을 들어 07학번에게 보낸 서찰이다



그땐 선배님이 참 그렇게 커 보였어요


본격적으로 신입생이 캠퍼스에 입장하는 3월, 2학년부터 복학생 오빠까지 모두가 ‘밥 사줄게!’ 외치고 다니셨던 것이 기억나요. 그 말이 3월 한 달 동안만 유효하다는 걸, 그다음부터는 언니에게도 부담이 된다는 걸 그땐 몰랐어요. 선배들은 나보다 어른이라 다 부자고 돈이 많은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사 준다 하시는 말씀에 거절 한번 해 본 적 없었고, 오히려 “선배님도 저희랑 밥 한번 드셔야죠!” 은근히 조르기도 했었고요.

출처: SBS
새내기가 헌내기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고 있다

처음 중간고사 기간을 맞았을 때도 “언니 OO학 전공이시죠? ㅋㅋ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로 시작된 카톡 벼락치기를 해서 죄송했어요. 전 당연히 저보다 시험을 한 번이라도 더 본 언니가 전공 지식이 풍부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질문한 거였거든요. 정말 다른 뜻은 없었고, 그땐 언니가 정말 ‘전공자’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 언니가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지금요? 지금이야 누구보다 잘 알죠. 결국 대학 시험도 벼락치기라는 걸, 돌아서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건 여기서도 똑같다는 걸 금방 알게 됐어요. 밥은 또 어떻고요? 집에서 용돈 받기 죄송해서 팀플, 과제, 스펙 쌓기 등으로 바쁜 와중에 짬 내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알았더라면, “밥 먹어요, 언니!” 하는 그 말을, 지나가는 말로라도 그렇게 쉽게 하진 못했을 거예요.

헌내기가 기말고사에 대비해 맥주를 마시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지금의 저처럼 그때의 언니도 배고픈데 짝지어 달려드는 후배들을 보며 “나 밥 먹고 왔어^^!”라고 어렵게 거절하신 것은 아니었을지, 당장 어제 본 시험도 가물가물한 마당에 후배들이 물어보는 전공 시험 족보 때문에 등골이 오싹하셨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이제야 반성해요. 언니를 향한 신뢰와 호기심 가득했던 저의 눈빛으로 부담을 드려서 죄송했어요.



그땐 선배도 우리랑 똑같은 세상을 사는 줄 알았어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다, 개총이다 뭐다 해서 갖은 행사로 신입생을 홀릴 때는 당연히 앞으로 4년 동안 모든 생활을 언니와 함께할 줄 알았죠. 그래서 학기가 시작하고서 갑자기 별로 볼 수가 없게 된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엘리베이터나 강의실 앞에서 잠깐 마주칠 때마다, 너무 아쉬워서, 언니한테 조르듯 말했었죠. “언니! 과실 좀 자주 오세요!”

헌내기가 작성한 학술세미나 불참 사유서이다

MT부터 종강총회까지 이어지는 각종 모임은 또 어떻던가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함께 불태워야 된다며 속 편하게 졸랐던 농활, 답사, 총MT, 새내기엠티, 학술대회, 대동제… 그나마도 막상 언니가 왔을 때, 우리는 언니를 잠깐 반기고는 금방 동기들이랑 돌아앉아 열심히 술 게임을 했었죠. 그땐 너무 신이 나서 눈에 뵈는 거 없이 마시고 춤추느라 언니를 신경 못 썼는데, 생각해 보니 언니는 저희에게 그 게임들을 가르쳐 주신 이후로 한 번도 그 게임을 저희와 직접 하신 적이 없었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저 편한 대로만 사느라 언니를 서운하게 해 드렸을 수 있겠더라고요. 3학년만 돼도 ‘꽤’ 선배 느낌이 나고 슬슬 먹고살 걱정도 되면서 학과 생활과 멀어지기 시작하잖아요. 뭐든 다 해 보고 싶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막 조급해지고. 축제는 고사하고 외박 한 번도 눈치 보이셨을 텐데, 시간표도 많이 다르고 과제도 더 많아서 정말 많이 바쁘셨을 텐데 말이에요. 사물함 근처만 가도 후배들 마주칠까 노심초사해지는 지금에 와서야, 언니의 불안한 눈빛이 기억나요.

헌내기의 MT 참석을 묘사한 상상도이다

저도 지금은 후배들이 과실이며 후문 쪽 민속주점에서 노는 걸 보고 있으면 ‘좋을 때지’ 하며 엄마 미소를 짓지만, 한편으론 씁쓸해요. 그때는 과실이 아지트이자 식당 같아서, 대학 생활이 언제나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언니랑도 함께 편하게 있고 싶어서 그랬어요. 언니는 하나도 편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자꾸 어렵고 어색한 그곳으로 오라고 옭아매서 미안했어요.



그땐 당연히 선배가 절 다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언니가 우리 나이를 자주 물어봤잖아요. 그땐 그게 이해가 안 됐어요. 저는 그 많은 언니 오빠들 학번이랑 나이를 딱 기억했거든요. 언니랑 나름대로 가깝다고도 생각했기에, ‘분명 내 학번이 10학번이라는 걸 언니도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물어보실까’라고 생각한 적도 많아요. 근데 언니, 이제 제가 그래요. 어차피 다 저보다 후배라서 저도 사실 후배들 나이가 헷갈려요. 심지어 학번까지도요. 제 밑으로 다 똑같은 것 같고…

왼쪽부터 (헌내기의 눈에 비친) OT 때 새내기, 1학기 때 새내기, 2학기 때 새내기의 모습이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요즘은 저도 신입생들 볼 때 왠지 애들 노는데 끼는 것 같아서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어요. 절 귀여워해 주던 언니를 보며, 원래 서너 살쯤 어린 동생들은 다 보고 싶은 줄 알았어요. 다 같이 노는 게 세상 제일 신나고 하는 것도 신입생 때 잠깐 동안이나 그렇다는 걸, 그땐 몰랐던 거죠. 저는 그냥 언니가 바빠서, 아니면 사실은 노는 걸 싫어하셔서 그런 줄 알았지, ‘동기들끼리 점점 친해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던 것일 줄은 몰랐어요.


저는 정말이지 학교생활이 언니 덕분에 정말 즐거웠거든요.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챙겨주고, 예뻐해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다만 그때는 제가 속없이 신난 신입생이어서, 저와 달리 한창 고민이 많은 시기였던 언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니, 전혀 알지도 못했죠.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온도차를 그때는 몰랐어요. 누구의 잘못이랄 건 아니겠지만요.

헌 내기들이 기말고사 시험 대체 과제를 정리하고 있다

지금은 만년 신입생일 줄 알았던 제가 ‘화석’ 학번이 됐어요. 그래서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던 그때의 기분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기분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괜히 후배들이 불편해할 것 같고, ‘저 선배는 눈치 없이 애들 사이에서 논다’ 생각할 거 같고. 그래서 그때 언니가 한사코 자리를 비키셨던 그것처럼 제가 요즘 그러고 살아요.



그런데요 언니, 저는 그때 다 진심이었어요


그때 제가 했던 자주 보고 싶다는 말, 같이 놀고 싶다는 말은 다 진심이었어요.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참 이상하죠. 우리도 한 번씩은 반짝이는 신입생이었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모두가 그저 학생일 뿐인데, 사회 나가면 누구나 ‘막내’들일 텐데.


따지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달라진 건 별로 없는데, 무엇이 당당했던 그때의 우리를, 왠지 작아진 지금의 우리를 만든 걸까요.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왜 이렇게 혼자 위축되고 눈치를 보게 된 걸까요. 우리도 여기서나 최고령이지, 사실은 여전히 어린 사람들인데.

그래서인지 요즘 유난히 소식이 더 궁금하네요, 언니. 지금은 언니나 저나 같은 “화석 학번”이니까 그때보다 더 가까운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겠죠? 언제 술 한번 먹어요. 이번엔 제가 살게요.


원문: TWENTIES TIMELINE / 필자: 이유진


특성 이미지 출처 : 동서울대학교 시계주얼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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