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움직이게 하고 싶다": 영상 기계의 혁명

조회수 2017. 5. 29.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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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분야는 과학기술과 예술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죠.

지금이야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게임 등이 흔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평범하고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지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욕망이었습니다.


그 욕망은 후기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발견됩니다. 18,500~14,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알타미라 동굴벽화에는 아래와 같은 멧돼지가 있습니다.

원시인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 동굴벽화를 그렸는지 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주술적인 목적으로 그렸다는 것 같습니다. 이런 녀석들의 몸에 창으로 공격한 자국 같은 것이 발견되었거든요. 그래서 구석기인들이 이 녀석들을 그려놓고 쉐도우 복싱하듯 헌팅 시뮬레이션을 하며 사냥의 성공을 빌었다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리가 8개라는 점입니다. 뛰고 있는 상황을 포착한 것이죠. 사냥이란 건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을 잡아야 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움직임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위에서 보듯 기원전 2000년 이집트 벽화에 표현된 레슬러들의 동작도 하나하나 마치 무슨 기술 교본처럼 시퀀셜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움직임의 흐름을 재현하려던 것이죠.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도록요.

한국의 경우에서도 목릉에 그려진 주작도 역시 다리가 세 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움직임을 재현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움직임을 재현하는 것, 그림을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지속적이었습니다.


1825년에는 존 에어튼 파리스(John Ayrton Paris) 또는 피터 마크 로제(Peter Mark Roget)가 소마트로프(Thaumatrope, Somatrope)를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카드 앞 뒷면에 다른 이미지를 그려 넣고 빠르게 앞뒤를 번갈아 보게 하여, 잔상효과로서 이미지가 합쳐진 것처럼 보이는 장치였습니다.

다들 어릴 때 한 번쯤 문방구에서 이런 장난감을 보았을 거라 생각합니다(1990년대 이후 출생하신 분들은 어떤지 자신은 없지만…). 양쪽에 고무줄 달린 형태도 있었고, 아래와 같이 스틱의 형태도 있었죠.

소마트로프는 환영(illusion)을 만들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움직임을 재현하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소마트로프의 장치에 영감을 받은 벨기에의 조세프 플라토(Joseph Plateau)가 1832년에 페나키토스코프(Phenakistoscope)를 개발했죠.


원반에 연속된 그림을 그려 넣고 원반을 거울에 비춘 채 돌리면서 틈 사이로 관찰하면, 연속된 그림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였습니다. 남들 다 잘 때 이런 거 하는 거 힘든 거예요.

1833년에는 윌리엄 호너(William George Horner)가 조트로프(Zoetrope)를 개발했습니다. 원통을 돌리고 틈 사이로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틈마다 분절된 하나의 이미지가 대응했죠. 그리고 틈과 틈 사이에는 이미지의 점멸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주 오래전 180년에 중국의 정완(丁緩, Ting Huan)이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조트로프의 이름은 ‘인생의 바퀴(Wheel of Life)’였습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창의력이 쑥쑥, 지능계발, IQ EQ 증진, 과학영재 씽크빅 장난감인 조트로프의 가격은 2.5달러로 당시로써는 비쌌네요. 조트로프는 지금도 전시 기법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소니가 브라비아 TV를 광고하기 위해 조트로프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조트로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죠. 요즘 조트로프는 이미지의 점멸을 ‘종이의 틈-종이로 막음’으로 연출하지 않고, 불을 껐다가 켰다가를 반복하면서 좀 더 보기 편하게 만들어줘요.

Sony Bravia Zoetrope

1868년에는 종이 묶음에 연속적인 그림을 순서대로 그려 넣어 빠르게 넘기면서 움직임을 재현하는 기법이 존 반즈 리넷(John Barnes Linnett)에 의해 ’키네오그래프(kineograph)’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받았습니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런 기법은 있었을 거라 추측되지만 일단 이것을 최초로 인정된 장르, 또는 기법으로서의 플립북(flip-book)으로 봅니다(한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플립북은 역시 교과서죠).

1877년에는 에밀 레이노(Emile Reynaud)에 의해 조트로프를 조금 개량한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가 나왔습니다. 조트로프 가운데에 거울을 달아서,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이 거울에 차례대로 비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로써 틈 사이로 볼 필요가 없어지고 좀 더 편하게 움직이는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방식의 특별한 점은 프리즘을 달면 움직이는 이미지를 대중들과 함께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영사기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아래는 프락시노스코프 극장입니다.

프락시노스코프 방식의 극장은 점점 장치가 거대해졌습니다. 대중을 위한 영사기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죠. 아래 그림을 보시면 필름을 꽤 길게 걸어놨어요. 한 바퀴 돌려서 애니메이션 한 동작 보는 것이 전부였던 정도에서 짧지만 나름 스토리라도 전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겠지요.

보고 영사하는 기술뿐 아니라 촬영하는 기술 역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878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는 12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달리는 말을 연속된 이미지로 촬영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연속사진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테오도르(Théodore Géricault)의 1821년 작품 ‘데비 엡섬에서(Le Derby d’Epsom)’를 보세요.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말이 달리는 모습을 대략 위와 같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다리와 뒷다리가 펼쳐진 채로 말이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이브리지의 연속 사진으로 확인해보았더니 말이 달릴 때 앞다리와 뒷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펼쳐지는 동작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나마 가장 펼쳐지는 순간에는 발이 땅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이 공중으로 부양하는 순간은 오히려 다리를 오므릴 때죠. 즉 말은 발을 앞뒤로 활짝 펼친 동시에 공중에 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사진을 찍어본 이후에나 알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테오도르의 위 작품은 마이브리지의 위업과 비교하기 위해 항상 등장하는 예시가 되었습니다.


마이브리지의 ‘움직이는 말(The Horse in Motion)’은 이전까지 세계에 대한 부정확하던 인식을 과학기술을 통해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시도에 가까웠습니다. 마레이(Étienne-Jules Marey) 역시 고속 촬영으로 사람이 뛰는 모습이나 새의 비행을 포착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움직임을 연속된 프레임으로 캡처해서 출력하는 기법을 크로노포토그라피(Chronophotography)라고 부릅니다. 크로노포토그라피는 1888년과 1890년 사이에 유행했는데, 이를 위해서 마레이는 1882년에 고정건판식 카메라인 사진총(Photographic Gun)을 개발하여 『라 나츄랄』지에 발표했고, 1883년에는 사진총보다 개선된 도구인 동사진 카메라 (chronophotograph camera)를 완성했습니다.

루시앙 불(Lucien Bull)도 크로노포토그라피의 개척자였죠. 그는 다음과 같은 고속 카메라로 연속된 사진을 찍었습니다.

고속 카메라가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움직임을 분해해 볼 수 있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움직임 속에 숨겨져 있던 분절된 동작은 사람들이 생각해오던 모습과 꽤 달랐죠.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오던 예술가 중에서는 아마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사람들에게 좀 더 ‘객관’이라는 신뢰를 주었죠. 이 과학기술의 객관이란 것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뒤통수를 맞지만 말입니다.


더 나아가 연속적인 움직임을 분절적으로 채취한 이것들을 빠르게 합친다면 다시 움직임으로 보이게 되리란 발상을 떠올리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손으로 그린 그림도 빠르게 돌려보면 움직이듯, 연속된 사진을 빠르게 돌려보기만 할 수 있다면 이제 ‘움직이는’ 세계를 보이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속 촬영 기술은 영화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1888년에는 이스트만이 종이를 바탕으로 한 필름을 완성하여 ‘코닥(Kodak)’이라는 이름을 등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필름까지 준비가 끝났습니다. 1893년, 발명왕 에디슨도 무언가를 했죠.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 (Kinetoscope)를 발명했습니다. e가 없는 키네토스코프(kinetoscop)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은 프락시노스코프인 아래와 같은 장치도 있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에디슨의 장치를 키네토스코프라고 합니다.

이것은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해서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를 보는 장치였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상단에 있는 구멍을 통해 보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건 영사하는 장치는 아니었지만, 영사기 방식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이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내부 설계도를 보시면 필름을 톱니장치에 걸어서 돌아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게 이미지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명되어 왔습니다. 움직임을 찍는 장치와 이미지를 움직이게 하여 보는 장치로 말입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보는 장치에 속했죠. 하지만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1892년에도 최초의 영사기를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그것 역시 묻혔어요.


뤼미에르 형제(Auguste, Louis Lumière)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 오귀스트(Auguste:1862~1954), 아우 루이(Louis:1869~1948)로 구성된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이라고 알려진 해에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라는 장치를 발명합니다. ‘시네마’란 단어의 시작이죠.


이 장치는 움직임을 찍는 모드와 이것을 영사하는 모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즉 카메라이기도 하고 영사기이기도 했지요. 게다가 사이즈가 꽤 콤팩트하기까지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에디슨이 내놓은 장치, 거대한 크기 때문에 ‘블랙 마리아’란 별명까지 붙었던 키네토폰(촬영기), 키네토스코프(영사기)보다 단연 인기가 있었습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최초의 무빙 픽처(moving picture) 장치는 아니라고 하고 최초의 장치는 누가 발명했는가에 약간의 이견들이 있는 모양입니다만, 일반적으로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를 영화의 시초라고 봅니다.


이들은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à La Ciotat)’이란 최초의 영화를 제작하여 1895년 12월 8일, 파리의 ‘인도살롱’이라는 홀에서 일반 관객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시네마토그래프로 상영했습니다.

L'arrivée d'un train à La Ciotat (1895) - frères Lumière

그저 열차가 도착하는 순간을 찍은 것에 불과했고 당연히 소리도 없었죠. 하지만 이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열차가 다가오는 모습에 놀라서 상영관을 뛰쳐나가 피신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의 재현을 본다는 것에 대한 시각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이미지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많은 과학자, 예술가, 발명가들이 이를 위해 노력했죠. 우리는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해 좀 더 찬양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애니메이션을 무시해?).


시간을 뛰어넘어서 2012년 시그라프(SIGGRAPH)에 소개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이런 것들이 현재 애니메이션에 사용되는 기술입니다.

SIGGRAPH 2012 : Technical Papers Preview Trailer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과학기술과 예술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예술적일 정도로 과학적인’ 등의 말이 성립되는 것이죠.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대 이후 이과와 문과 예체능으로 나눠가며 대립시킨 이 분야들은 다시 철학자가 과학자고 예술가가 철학자였던 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때와는 디테일에서 많이 다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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