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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

조회수 2017. 5. 26.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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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으로서 '내가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을 내려놓지 않아야 합니다.

교직경력 20여년 되는 선배교사랍시고 후배선생님들이 보다 신명나고 보람있는 교직생활을 영위하시기 위해 약간이라도 도움 되고자 하는 뜻에서 조언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든 경험이 일천한 분들이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듣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이 될 수 있나?”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사 중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주위에 자신이 신뢰하는 선배교사가 있다면 같은 질문을 건네기도 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아끼는 후배가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온다면 저는 답하기가 무척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대신 저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몇 가지 일러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페이퍼워크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나라의 교사들도 당연히 문서작업을 하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교육의 본말이 전도될 지경이어서 그 폐해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문서작업’이라는 순화된 용어보다 ‘종이쪼가리 찍어내기’라는 의미의 ‘페이퍼워크’란 말이 우리 학교의 현실성을 충실히 전달한다고 판단하여 이 용어를 쓰고자 합니다.


초임교사 때 제가 교사로서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것이 페이퍼워크였습니다. 웬 공문이 그리도 많은지 그것도 보고기한을 촉박하게 내려 보내주니 만사를 제쳐놓고 공문처리에 몰입해야 합니다. 심지어 수업시간에 아이들 자습 시켜놓고 공문 보고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그나마 지금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이란 게 있어서 공문처리가 많이 간소화 됐지만 그래도 공문의 양은 과거보다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학교는 기관평가에 대비해 각종 실적물 만들어 내느라 교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실정입니다. 거기에다 연구시범학교나 100대 교육과정 지정을 받으면 현장교사들의 용어로 ‘일 폭탄’으로 인해 신음할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일 폭탄을 맞아도 신기하게도 어김없이 교사들은 그 일을 다 해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교육의 본질이 망가지고 왜곡되고 학생이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하죠. 그리고 그것은 ‘일’이 아니라 그냥 ‘페이퍼워크’입니다. 어디 교사가 종이쪼가리 찍어대기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교단에 섰던가요?


페이퍼워크는 교사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 교사의 본업에 피해가 초래되는 점에서 ‘부당노동’에 가깝습니다. 전문직 종사자로서 교사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신성한 교육노동의 자존을 망가뜨리는 그러한 부당노동은 가급적 기피해야 하겠지만 젊은 교사의 존재 여건상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는 얼렁뚱땅 해치우는 게 최선입니다.


거짓말 적당히 섞어서 대충 처리하는 요령을 빨리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거짓말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불선한 겁니다. 페이퍼워크란 게 어디 거짓말 하지 않고 작업이 가능하기나 합니까? 아무튼 그런 무익한 작업에는 시간과 노력과 감정의 투자를 최대한 아끼시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자신을 위하고 이 나라 교육을 위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사가 덜 불행해야 아이들도 덜 불행해집니다.



둘째, 학교 친목회에 재미 붙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초등교사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 중등교사도 참고할 점입니다. “좋은 교사 되는 것과 친목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친목회는 학교사회 내의 비공식 기구지만 교사의 교직 삶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조직체입니다.


초등교직사회의 특수성과 초등교사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성찰하기 위해 학교 친목회가 교사의 교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냉철하게 짚어봐야 합니다. 아마도 초등교직사회와 중등교직사회의 성격이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도 이 친목회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또한 초등교직과 중등교직의 구조적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중등교사는 자기 전공과목이라는 독립적인 영역을 갖기 때문에 학교 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선명한 자기 포지션을 갖습니다. 이 배타적인 영역에 대해 타교과목 교사와 정보나 조언을 주고받을 일이 잘 없습니다. 이를테면, 수업 공개에서 수학교사가 영어교사의 수업을 참관하고 비평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선후배’라는 개념 또한 같은 전공 내의 같은 대학을 나온 사람끼리나 적용될 성질의 것이죠.


그러나 초등교사는 전과목을 가르치기 때문에 출신 배경부터 특정지역의 특정교육대학이라는 동질집단적 성격을 갖습니다. 그래서 초등에서는 ‘만인이 만인에 대한 선배이자 후배’라는 기치 아래 ‘우리가 남이가?’ 라는 인식이 공유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등 특유의 교사문화는 교직 일상이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순기능적인 면도 있지만 그 역기능적 측면 또한 심각한 수준입니다.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초등교직사회에서 과열된 친목 문화는 교사의 전문가적 마인드와 자긍심을 잠식하고 심지어 학생교육에도 피해를 끼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교직원배구대회입니다. 많은 지역에서 5월 스승의 날 주간을 맞아 교직원배구대회가 열리는데, 초등에서는 대부분의 학교가 이 대회 준비에 지극정성을 쏟습니다. 어떤 학교는 1년 중 교사가 가장 바쁜 달인 3월부터 선수를 구성하여 강훈련에 들어갑니다. 2월에 교사인사이동 결과가 발표되면 배구 잘 하는 아무개 교사가 어느 학교로 가는가에 남교사들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학교별로 선수 구성에 따른 전력을 분석하여 ‘올해 어느 학교가 우승을 할 것이며 우리 학교 성적은 어떻게 되겠다.’ 하는 전망을 내놓곤 합니다. 대관절 교사가 배구 잘 하면 학교교육의 뭐가 나아지는 것일까요? 많은 지역의 초등학교에 퍼져 있는 이 비정상적인 배구 신드롬은 괴상함을 넘어 반교육적이기까지 합니다.


초등교직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친목회에 과열 몰입하는 기이한 현상이 앞서 말한 페이퍼워크로 몸살을 앓는 초등교직사회 풍토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실적에 욕심이 많은 관리자들이나 승진에 혈안이 돼 있는 중견교사들이 많은 학교는 예외 없이 연구시범학교나 100대교육과정 따위를 따옵니다. 이런 학교에서 교사의 하루는 숨 쉴 틈 없이 빡세게 돌아가는데 친목회는 그 타이트한 일상에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이런 학교에선 관리자와 중간간부(부장교사) 그리고 평교사 사이의 의사소통이 결코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의사결정기구인 교직원회의에서 자유로운 토론이나 협의는 잘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시도 자체가 조직의 인화를 깨는 일탈로 터부시됩니다.


온전한 상식이나 양심을 가진 교사라면 관리자들이 학교실적 거양을 위해 교사들에게 강요하는 페이퍼워크가 교육발전에 아무 도움이 안 될뿐더러 필연적으로 학생교육에 피해를 끼치는 인과관계를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부당한 명령체계에 반감을 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관리자들은 교직원협의회나 부장회의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명하달식의 지시를 앞세우며 교사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채찍’이라면 ‘당근’으로 주어지는 것이 “친목활동의 자유”란 말입니다. 공식기구인 직원협의회에서는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비공식기구인 친목회에서는 그간에 쌓였던 불합리에서 오는 우울함을 뒤로 하고 생기발랄하게 잘 즐긴다면 ‘지성인’이니 ‘전문직’이니 하는 말들이 무색해지지 않을까요?



셋째, 승진에 욕심내지 마십시오

위에서 시키는 것들 열심히 해내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서 그 스트레스를 친목활동을 통해 해소하려는 교사, 이런 스타일의 후배들을 관리자가 제일 좋아합니다. 시쳇말로 ‘일도 잘 하고 잘 놀 줄 아는’ 사람인 거죠. 이런 교사들이 대개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의 코스를 밟습니다. 그것은 승진이라는 이름의 길입니다.


아시다시피 교사가 승진하는 길을 두 갈래입니다. 승진에 필요한 점수 꼬박꼬박 모아서 교감에서 교장으로 가는 길과 전문직 시험을 쳐서 장학사가 된 다음 교장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로 전자에 포커스를 두고 제 생각을 펼쳐보겠습니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승진을 금기시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한국의 교사라면 승진을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행정가로서의 교장의 길과 교사의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따로 존재하는 정상적인 사회의 학교체제와 달리 교사가 어찌어찌 해서 교장·교감이 되는 한국의 교직사회에서 승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교사는 없다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나이 들어서 동기들은 다 승진하는데 평교사로 남아 자기보다 나이 적은 관리자의 지시를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요컨대, 한국의 교사에게 승진은 치열한 실존적 이슈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교사들이 일찍부터 승진 준비를 하는 것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구체적으로 따져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 1)논리적 측면 2)도덕적 측면 3)철학적 측면 세 가지로 풀어보겠습니다.


논리적으로 교사가 승진의 길을 거부해야만 하는 이유를 간명하게 제시하자면, 교사의 삶은 교사로 존재함에 있지 교사이기를 벗어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사의 꿈은 교실 속에서 아이들을 통해 키워가는 것인데, 교실을 탈출하고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면서 꿈을 이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한참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지긋지긋하면 교실과 아이들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일까요?


따라서 승진을 꿈꾸는 자체로 그는 승진할 자격이 없는 교육자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진배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사 위에 군림하면서 교사더러 아이들을 사랑하라느니 교직에 자부심을 가지라느니 하면 설득력이 있을까요?


‘승진’이라는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조직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한 강화물(인센티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라는 조직체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타의 모범을 보이는 훌륭한 교사를 승진시켜 준다 함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교사이기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승진제도’ 자체가 교육적으로 모순덩어리인 것입니다.


바로 이 모순으로부터 승진을 꿈꾸는 교사들이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앞서 말한 승진욕구의 논리적 모순이 그대로 도덕적 모순으로 직결되는 겁니다. 교사로서 더 나은 존재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교사로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이 자가당착의 모순에 대한 자기해명 없이는 분열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순은 원천적으로 해명이 불가능합니다. 승진욕망과 교육혼은 절대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승진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교사들이 교실을 어떻게 방치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망쳐가고 있는지 말예요. 승진을 꿈꾸는 교사는 애당초 교육혼 따위를 가슴에 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중견교사가 되어 승진에 집착하면서 초심을 저버리고 원래의 자신으로부터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 가는 그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인간이 속물적 가치를 쫓으면서 점점 자신의 본래성(authenticity)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이치를 마르크스는 ‘소외 alienation’라 일컬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당신이 더 많이 소유할수록 당신은 덜 존재하게 되며 그만큼 당신 삶에서 소외의 부분도 더욱 커져간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을 지금 이 맥락에 원용하면 “교사가 승진을 욕망할수록 교사다운 존재로부터 멀어져간다.” 하겠습니다.


교사가 교실과 아이들을 벗어나 승진을 욕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교사로서 자기 삶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현재의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무엇을 품는 포부를 야망이라 하지만, 교직에서 승진을 쫓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정념의 노예로서의 빗나간 열정(passion)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사의 참다운 행위(action)는 참교육에 있습니다.


교사임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의 삶은 적극적(active)이 됩니다. 반대로 자기존재를 부정하며 어떻게든 교실을 탈출하여 승진 사다리를 오르려는 사람은 소극적인(passive) 삶, 자기 본연의 모습과 점점 멀어져가는 자기 삶의 이방인이 되어갑니다.



결.


연일 쓸데없는 페이퍼워크로 진 다 빼고 모처럼 약간의 시간이 나면 또 배구하러 체육관으로 오라고 연락 옵니다. 힘없는 젊은 여교사의 입장에선 너무 싫지만 피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이라 하겠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죠. 예,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러한 처세술을 터득하며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켜 갑니다. 전문직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온갖 반지성적이고 반교육적이고 비합리적인 습속으로 얼룩져 있는 이 분열적인 리얼리티 속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적응해 가야 합니다.


하지만 적응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자신이 힘이 없어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더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자성을 통해 ‘내가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의 자락을 내려놓지 않아야 합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해방을 이룰 것입니다.


원문: 필인의 꼼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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