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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조회수 2017. 4. 28. 15: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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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당대의 종교와 정치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첫 신앙의 추억


나는 어쩌다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다 신앙의 매력에 빠졌을까. 그리고 나는 왜 지금의 교회와 개신교인들의 신앙에 회의하고 절망하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 교인 이야기가 한창 들려올 때,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심정에 100% 공감이 갈 정도로 교회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깊다. 그래도 여전히 교회는 다니고 있다. 그동안 쌓아 온 인간관계가 다 교회에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직은 내가 교회를 위해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기도 하고, 그저 교회가 내 희미한 신앙의 마지막 동아줄인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글쎄, 무엇 때문에 나는 여전히 교회를 욕하며 교회를 다니는 걸까.

지금 지나온 길이 후회되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지 알고 싶을 때,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돌아보는 것이 도움된다. 나는 이성적인 설득에 넘어가 처음으로 신앙을 갖게 됐다. 친구가 우연히 건네준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으면서 그의 주장과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하는 경험을 한 이후 나 스스로 교회를 다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주변에 아는 신학대를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해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나 좀 교회에 데리고 가 달라고 한 게 그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름 신과의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뜨거움은 있었기에 친한 친구들을 다 전도해 같이 교회를 다녀오곤 했지만, 성경도 잘 모르고, 교회 문화도 잘 몰라서 이질적인 문화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내가 다니던 교회가 내가 생각하는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한 원로목사가 예배 마지막 순서로 축도를 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짐짓 낮고 장엄하게 내리깔린 소위 홀리한 보이스로 자신 있게 선포하였다.

“하나님,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가 번창하여 ‘소나타3‘ 이상을 몰고 다니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아멘!”

나는 축도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눈을 뜰 만큼 충격을 받았는데,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교인들의 우렁찬 ‘아멘!’ 소리였다. 나와 같이 온 친구들도 다 충격을 받았는지 서로를 돌아보며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은 그 원로목사의 기도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왔다. 다 교회 다닌 적도, 신앙 생활해 본 적도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 다니지 말자! 점집에 온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신앙의 초짜도 되지 않았지만 가짜가 무엇인지, 무엇이 기독교적인지 아닌지 알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나 보다. 나는 나름 이 신앙이 내 삶을 이끌어 줄 진리이자 인생의 등대가 될 수도 있는 ‘고상한 그 무엇’이라 생각하며 결단하고 왔는데, 고작 ‘소나타3’를 위해 축복 기도하는 목사를 보고 있자니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선교 단체, 헌신자들과의 만남


그렇게 첫 교회 생활이 실패하고 잠시 신앙적인 방황을 하며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우연히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 선교 단체를 소개받았다. 주로 일대일 성경 공부로 전도하던 단체였는데 처음 경험을 통해 성경에 대한 무지가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성경 공부에 응하게 되었다. 별 기대감 없이 시작한 성경 공부는 의외로 상당히 재밌었고, 성경 공부도 공부지만 성경의 진리와 말씀대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선교 단체 선배들의 경건한 삶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인가에 온전히 헌신하고, 분명한 목적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 선교 단체에 꾸준히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강도 높은 제자 훈련을 받는 신앙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이후 결국 그곳을 나와 교회로 다니게 되었지만 내 신앙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신앙생활에 매료된 이유로는 교리적인 진리,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 가는 과정,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 경건한 헌신이 주는 기쁨 등 여러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신앙적 상상력’이었다. 처음의 선교 단체는 매우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앙관을 갖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 꿈꾸는 비전에 대해서는 충실하고 치열하게 살아갔다. 그곳에서는 해외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었으며, 캠퍼스 복음화라는 비전 아래 대학생들을 향해 불타는 소명감이 있었고, 실제 삶도 그런 꿈에 최적화해 단순화시켰다.


돌이키면 나 같은 경우 사상의 화려함이나 정교함, 교리적 정합성에 매료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치열하게 헌신하는, 단순한 삶이었다. 일반 사람들의 진부한 상상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이 담긴 그 삶은 더욱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하나님 나라, 다른 세상 꿈꾸는 사람들


시간이 지났고, 환상은 깨졌으며, 현실은 처참하고 막장인 한국 개신교의 여러 모습을 체험하고 나서 나는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한 걸까. 나는 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걸까. 결국 돌아보니 나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가 교회라는 사실에 매료됐다.


물론 지금은 교회 말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대안 공동체가 여럿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교회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는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 다른 세상은 ‘하나님 나라’라 불리기도 하고 ‘천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다르다’는 의미는 신앙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룩하다’의 본래 뜻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주일학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거룩’의 의미를 설명할 때 흔히 ‘구별되다’ ‘남과 다른 삶을 살다’라는 뜻으로 가르치고는 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개신교인의 삶이나 교회 행태를 돌아보면 과연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남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세상은 목적을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교회 또한 목적을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세상은 돈을 잘 벌고 거대해지는 것을 성공이라 정의한다.
교회 또한 헌금 액수가 많아지고 교회 건물이 커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은 기업가, 국회의원, 유명인을 우대하며 부러워한다.
교회 또한 기업가, 국회의원, 유명인을 우대하며 신앙의 롤모델로 추앙한다.
세상은 힘과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교회 또한 힘과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세상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교회 또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세상은 다수 이익을 위한 소수의 아픔과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교회 또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아픔과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대략 열거해 본 이런 현상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상과 교회는 그 추구하는 가치에 있어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만일 교회가 그들이 주장하는 ‘거룩’의 의미처럼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했다면 위에 열거한 가치들은 아래처럼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세상은 목적을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교회는 생명이 목적이다. 생명을 위해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을 기꺼이 감수한다.
세상은 돈을 잘 벌고 거대해지는 것을 성공이라 정의한다.
교회는 소수의 사람이라도 예수 닮은 사람을 양육하는 것을 부흥이라 정의한다.
세상은 기업가, 국회의원, 유명인을 우대하며 부러워한다.
교회는 유명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이 없어도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우대하며 부러워한다.
세상은 힘과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교회는 힘과 권력과 부가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 그 유혹을 경계하고 힘없고, 권력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집중한다.
세상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교회는 약자와 고난받는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공동체 내에 가장 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세상은 다수 이익을 위한 소수의 아픔과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교회는 아흔아홉 마리 양 떼를 남겨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예수의 말씀을 따라 다수의 뜻으로 소수의 뜻을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우선한다.

이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지금 교회는 정말 세상의 가르침, 가치관과 전혀 다른 예수의 목소리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교회 내 종교적인 헌신과 말씀 선포는 넘치지만 왜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보며 ‘거룩함’을 느끼거나 ‘남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느끼기 힘든 걸까.

나는 현대 교회가 약화된 여러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상상력의 기반은 성경이다. 성경에 보면 당대 문화와 주류적 가치관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도전하고 부딪혔던 신앙인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물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일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상식을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역설과 도전이 있었다.


예수는 당대의 종교와 정치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을 꿰뚫어 봤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나 권력이 아니라 생명임을 설파했다. 힘과 권력으로가 아니라 희생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예수의 삶만 그런 것일까.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했던 많은 선지자와 신앙인 중 현대의 기준으로도 여전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좋아하고, 모세 이야기에서 통쾌함을 느끼고, 다니엘 이야기를 사모하며, 엘리야 이야기에서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다른 신앙인들 삶이 결국 어떠했는지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그리 신나는 이야기가 많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고난받고 고생하다가 별다른 승리의 열매 없이 죽어 가며 초라한 삶을 산 사람들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성경을 읽으면, 현대의 기준으로 하나님 믿고 부자 되고 명예를 얻어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 역전 스토리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몇 사람 이야기가 교회에서 계속 반복되기에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도리어 하나님 바르게 믿다가 맞아 죽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바른 소리를 하다가 죽고, 하나님 잘 믿는다고 시험당해 온 가족이 사망하거나, 쫄딱 망한 이야기가 많다.

구스타프 도레 판화, ‘아모스’. 아모스 선지자는 고생을 많이 했다. 이런 선지자들 삶은 요셉이나 다니엘과 달리 주일 설교 주제로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신앙명으로도 별로 인기가 없다.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그럼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왜 믿는가. 나는 왜 이 길을 걸어가는가. 성공하고 행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성경을 면밀히 읽어 보고 내 앞을 따랐던 신앙인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면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 믿어서 잘 먹고 잘살고 행복하게 되는 것은 신앙과 그다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왜 굳이 이 길을 걸어가는 걸까. 나는 성공의 자리보다 실패의 자리가 익숙하고, 강자의 자리보다 약자의 자리가 익숙하다. 그리고 거인들의 삶의 발자취보다 소시민의 소박한 삶이 더 자연스럽다. 어쩌면 나는 약해지고, 작아지고, 실패한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크고, 강하고, 성공한 자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관심과 사랑을 쏟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의 자리에 있는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기에 나 또한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그런 삶의 발자취를 보여 주셨다. 그는 화려하고 성공한 자들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작고 약하고 실패한 인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을 찾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희망과 구원이 되어 주셨다.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를 맞아 종교개혁의 주체였던 개신교가 어느새 가장 개혁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 역설적 현실에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이 회복해야 할 신앙의 미덕은 어쩌면 아주 간단한 것일지 모른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성서의 상상력을 회복하고 다르게 살아 보는 것이다.


세상은 빨라야 한다고 하지만
느리게 사는 삶을 살아 본다.
세상은 커지라고 하지만
작아지는 삶을 선택해 본다.
세상은 강해지라고 하지만
약해지는 삶을 살아 본다.
세상은 지는 싸움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참여해 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극심한 신앙적 회의와 절망에 빠졌을 때, 그래도 이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되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꺼이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로 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예수의 사랑과 애통, 긍휼을 느꼈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무엇보다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가 온전히 회복된 다른 세상,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꿈꿀 수 있었다.

출처: 뉴스앤조이 박요셉
4월 8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기독인들이 모여서 기도회를 열었다.

작고 약하고 항상 실패하는 이 보잘것없는 인생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지 솔직히 알지 못한다. 합리적 대책이 없어 보이는 그들을 보며 답답할 때도 많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수없이 많은 역설의 신비를 드러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기대해 본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가장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주가 이 일을
지체 없이 이루겠다.”

- 새번역 이사야서 60장 22절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나는 그분을 믿는다.


어떤 이에게는 실패와 작아짐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내게는 작고, 약하고, 실패한 인생길이 너무 익숙하다. 이제 나는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초라한 길에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것만으로도 그 길은 꽤 매력적일 테니까. 나는 오늘도 내 비루한 삶에 동행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작고 초라한 인생 가운데 임할 은혜와 신비를 기대한다.


원문: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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