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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회장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조회수 2017. 4. 27. 12: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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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또 역사는 자리가 아니라 한 일을 보고 평가를 내리는 법이다.

※ 먼저 밝힐 것은, 필자는 중앙일보에 제법 오래 근무한 적(1984.10~98.8)이 있다. 홍석현 전 회장이 삼성코닝에서 중앙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옮긴 것이 1994년 3월이니 4년여를 같이 근무했으나 당시 평사원 신분이어서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다만 1994년 ‘신문의 날’을 맞아 ‘호외100년 전(展)’을 개최할 때 홍 전 회장이 개막식 행사에 외빈으로 참석해 축하해준 적이 있다. 이런 인연이 계기가 됐는지는 몰라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절 홍 회장을 두 차례(2003년 세계신문협회장 취임, 2005년 주미대사 취임) 단독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도, 특별한 교분을 쌓은 적도 없다.


1.


한국 언론사(史)에서 언론사 사주가 정치권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은 사례는 흔치 않다. ‘한국일보’ 창간 사주인 장기영 씨가 박정희 정권의 정일권 내각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국회의원(9대, 1973년)을 지냈으며, ‘매일경제’ 장대환 회장이 국민의정부 시절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해 끝내 좌절됐다. 이후로는 최근 대선 정국에서 출마를 저울질했다가 결국 접은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정몽준 전 의원은 ‘문화일보’ 사주이긴 하나 신문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아서 뺐다). 권언유착이 논란인 한국 사회에서 언론사 사주의 정계 진출은 바람직하지 않은 측면이 더 많다.


홍 회장은 문재인-안철수 양강구도가 부상할 무렵인 지난 4월 11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국난의 시기인 만큼, 어떤 형태로라도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선을 놓고 행보하는 것은 준비되지 않았다”며 사실상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는 또 “이번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홍 전 회장과 함께 소위 ‘제3지대’ 구축을 논의했던 김종인 전 의원과 정운찬 전 총리 역시 불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이들의 ‘제3지대의 꿈’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조기 대선 정국에다 무엇보다도 준비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출처: 한겨레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세속적으로 본다면 홍 회장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학벌, 가문, 재산, 인맥, 외모 등 한 마디로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그는 명문 경기고-서울대-스탠포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이다. 부친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 시절 법무·내무장관을 지냈으며, 장인 신직수는 박정희 정권 시절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전형적인 세도가 집안 출신이다. 게다가 매형은 삼성 재벌 이건희 회장이다. 2004년 주미대사로 취임할 당시 그가 신고한 재산은 약 730억 원으로 행정부 공무원 가운데 최고액이었다. 일설에는 그의 재산이 1조 원대 규모라는 주장도 있는데 정확한 액수는 알지 못한다. 여기에 영향력 있는 신문사와 방송사도 갖고 있다. 


‘홍석현 대망론’은 그 역사가 오래됐다. 2002년 대선 당시에도 있었다. 세간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두루 갖춘 그가 욕심을 낼만도 했을 것이다. 1994년 중앙일보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이래 그는 괄목할만한 사세 확장을 이뤘다. 취임 당시 ‘3등 신문’이던 중앙일보를 적어도 ‘2등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1999년 중앙일보 회장에 취임한 이후로는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2003년 한국 언론사주로는 처음으로 세계신문협회장에 선임된 후 세계문화오픈 조직위원회 위원장도 맡았으며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2월 주미대사에 임명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외교관 경험이 전혀 없는 언론사주가 대사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해 7월 소위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유엔 사무총장 자리는 반기문이 아니라 그가 차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 X파일 사건’으로 그는 불과 7개월 만에 주미대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탄탄대로에 올라섰던 그로서는 졸지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그러나 ‘꿈’을 접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국면 타개를 위해 그는 다양한 모색을 했다. 당시 그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A 씨에 따르면,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경기도 이천 소재 임야(4만 5,000여 평) 가운데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 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이 계획은 성사되지는 않았는데 그로서는 끊임없이 ‘모색’을 했다는 얘기다. jtbc 창립 역시 이 일환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번 대선 출마 저울질도 이 같은 성공의 연속 선상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출처: 노컷뉴스
주미대사 시절 홍 회장.

2.


일각에서는 홍 회장의 커리어, 잠재능력, 네트워크 등을 썩히기엔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지로 그런 측면이 있기도 하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그는 화려한 커리어에 잠재능력 또한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정·관계, 재계, 언론계, 학계, 문화계 등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 심지어 그는 한국기원 총재, 대한바둑협회장, 서예진흥위원장 등 그와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직함도 더러 갖고 있다. 일설에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을 그가 주선했다는 얘기도 있다. 종교는 선대 때부터 원불교와 각별하다. 삼성가 인맥까지 확장할 경우 국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이미지에 외양도 그만하면 원만하다고 본다.


이밖에 해외에도 인맥이 두터운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삼극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 회원이다. 이 위원회는 1973년 데이비드 록펠러 전 JP모건체이스 회장이 만들었는데 2015년 서울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북한 문제를 포함해 한반도의 상황과 자원안보, 기후변화, 세계 경제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 위원회의 주요 회원으로는 미국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커트 캠벨 전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을 비롯해 고바야시 에이조 이토추 그룹 회장, 마키하라 미노루 미쓰비시상사 고문, 리자오싱 전 중국 외교부장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 마디로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파워 엘리트의 모임인 셈이다.


홍 회장은 ‘금수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출신치고는 일면 진보성향을 갖고 있어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최근 홍 회장이 ‘한겨레’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부가 들어서도 정의당의 심상정 대표나 노회찬 원내대표가 노동부 장관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와 같은 부류의 인사들 입에서는 쉽게 나오기 힘든 얘기다. 2002년 초 중앙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여러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그 하나로 “예산 1% 대북지원에 쓰자”고 제안한 바 있다. 듣기로 이 제안은 홍 회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모 중앙일보 인사는 “회사 내에서 가장 진보성향을 가진 사람은 홍 회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 회장의 ‘진보적 성향’은 그 자신의 본질적인 것인지, 아니면 회사 경영상 전략적 차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중앙일보는 선대 홍진기 회장 때부터 미국의 진보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와 교류를 가져 왔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홍 회장이 경영을 맡은 이후 중앙일보는 진보성향 지식인들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중앙일보와 가까운(중앙일보에 글을 쓰거나 또는 지면에 자주 거론된) 대표적 진보인사로는 고은 시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진보성향의 필진을 영입하는 일은 홍 회장과 경기고 동문인 중앙일보 모 국장이 다리를 놨다고 알려져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중앙일보는 활발한 대북취재를 벌였는데, ‘예산 1% 대북지원’도 그 연장 선상에서 나왔을 걸로 생각된다. 그는 지난 14일 젊은 정당 ‘우리미래’에서 주최한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대선후보들이 통일을 얘기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우리미래’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홍 전 회장(왼쪽).

진보성향의 필진 영입과 관련해 홍 회장의 특기할만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 얘기는 2000년대 중반 당시 한겨레 편집국 모 간부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것이다. 당시 한겨레는 중견 문인 B 씨의 글을 연재하기로 돼 있었는데 연재 개시를 얼마 앞두고 B 씨가 찾아와 연재할 수 없게 됐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중앙일보에 글을 쓰기로 했다는 것. 그 무렵 B 씨는 중앙일보 모 인사의 소개로 홍 회장을 만나게 됐는데 홍 회장이 그에게 ‘파격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고액의 원고료까지 제시해 할 수 없이 중앙일보에 글을 쓰게 됐으니 양해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홍 회장은 ‘파격적인 행동’을 하면서까지 B 씨의 글 연재를 추진했다고 한다.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하면, 지난 1996년 지국 간의 신문판매 과열경쟁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적이 있다. 고양시 덕양구에서 일어난 중앙일보-조선일보 지국 간의 칼부림 사건이 그것이다. 이 일로 두 회사는 앙숙이 되었는데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쪽은 홍 회장이었다. 홍 회장은 선대 때부터 교류를 가져온 모 명리학자를 통해 와룡동 모처에서 당시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2003년 타계)을 만났다. 이날 만남을 주선한 명리학자는 방일영 회장에게 “(방)상훈이랑 다 또래들인데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이 자리서 풀어라”고 권했고, 방 회장은 허허 웃으며 잠시 뒤 홍 회장과 화해를 했다고 한다. 방일영 회장의 통도 컸지만 홍 회장이 만남의 자리를 주선함으로써 이날 화해가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3.


홍 회장의 최근 행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리셋 코리아’ 운동이다. 한 마디로 한국을 다시 세팅(setting)해 보겠다는 얘기다. 리셋 코리아 13개 분과의 위원들 면면을 보면 정부를 구성하고도 남을 정도로 막강한 인력풀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1월 13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리셋코리아: 내가 바꾸는 대한민국’ 행사 환영사에서 그는 “디지털 민주주의를 통해 집단 지성으로 지혜를 모으고, 인재를 모아서 정책과 사람과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했다. 경위는 어찌 됐든 간에 ‘나라 걱정’ 차원에서 도모한 일이라니 비난할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선한 의도’(?)는 최근 그가 대선 행보를 보임에 따라 빛을 잃게 됐다. 결국 그 모든 것이 대선용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홍 회장이지만 정계진출에는 걸림돌도 많다. 우선 그의 부친 홍진기 전 회장을 둘러싼 친일(일제강점기 판사 출신) 및 독재 부역(이승만 정부 때 내무·법무장관) 논란과 장인 신직수 씨의 행적 또한 구설에 오를 만하다. 그 자신의 문제로는 1999년 10월 당시 보광그룹 대주주였던 그가 탈세 혐의로 고발, 구속된 바 있다. 그가 검찰에 출두하는 날 일부 중앙일보 기자들이 현장에서 “홍 사장, 힘내세요!”라는 구호를 외쳐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2005년 7월에 터진 소위 ‘삼성 X파일 사건’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다시피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주미대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근 10여 년째 은둔하다시피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보광그룹 탈세 혐의로 구속된 홍 회장.

홍 회장 자신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탈세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인 2003년 11월 11일 ‘오마이뉴스’와의 단독인터뷰에서 그는 세간에 회자된 정계 진출설에 대해 “정치를 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또 “일류신문도, 일등신문도 못 만든 사람이 정치해서야 되겠는가?”라며 “우리 현실에서 적성에도 맞지 않고 감옥 갔다 온 사람이 정계로 진출해서야 되겠느냐”고 잘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근자에 와서 많이 바뀐 것 같다. 이번에 대선판에 한 발 들여놓았던 것이 한 증좌라고 할 수 있다. 욕심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판단미스인지 알기 어렵다. 


비록 대선판에서는 몸을 뺐지만 차기 정부에서 뭔가 ‘벼슬’을 하고 싶은 욕망은 여전해 보인다.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앞으로 국회의원 등 선출직에 나설 의향이 있나?’는 질문에 그는 “선출직이 제게 잘 맞는 옷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작은 힘을 보태는 방법이라면 선출직이든 비선출직이든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답한 바 있다. 시켜만 주면 한자리하고 싶다는 얘기다. 또 국회의원보다는 총리나 장관 같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를 선호한다는 얘기다. 그 나이, 그 커리어에 초선의원으로 정치권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그로선 별로 탐탁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총리, 또는 그에 버금가는 자리 정도는 돼야 성에 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홍 회장은 이번 대선에서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할까. 위 한겨레 인터뷰 가운데 두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를 어떻게 보나?

“문재인 후보는 만일 당선되면 우리가 놓인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 보다 통합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정책을 써주기 바란다. 안철수 후보는 당선돼도 40여 석 정당의 대통령으로서 민주당과 함께 통합정부로 갈 수밖에 없다.”

두 후보 가운데 누구를 돕겠다고 선언할의향이 있나?

“제 생각을 많이 받아들여 주시는 분을 지원하고 싶지만, 어떤 한 분을 공개지지 선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홍 회장이 인터뷰에서 특정 후보 지지를 표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위 첫 번째 질문 대답의 행간을 감안하면 둘 중에서는 안철수보다는 문재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듯하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우선 자신을 주미대사로 임명한 참여정부와의 인연도 있고, 정치성향도 민주당과 오히려 가까운 편이다. 무엇보다도 현재로썬 문재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 지킬 것이 많은 기득권자가 야당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는 홍 회장.

4.


장차 홍 회장은 어떤 행보를 취할 것인가? 일단 이번 대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장차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팀에 가담하여 자신의 몸집을 불리고 입지를 다진 후 차기 대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크다. 한겨레 인터뷰에서 “대선을 놓고 행보하는 것은 준비되지 않았다. 정치라는 게 금방 뛰어들어가서 (무언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라며 여운을 남긴 데서 그런 뜻이 읽힌다. ‘장차 정치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정계 진출 여부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며, 그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1949년생인 홍 회장은 올해 만 68세다. 참고로 이번 대선에 출마한 이재오 전 의원은 72세이며,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75세다.


홍 회장이 회원으로 있는 ‘삼극위원회’는 미국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후손인 데이비드 록펠러가 40여 년 전에 창립했다. 현업에서 물러난 그는 자선가로 활동하면서 세계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해 왔다. 홍 회장이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면 비단 정치 말고도 길은 많다고 본다. 한 예로 마쓰시타 그룹 창립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설립한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 같은 인재양성 기관을 설립해 미래의 지도자를 키우는 일도 보람될 것이다. 또 평소 국제문제,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으니 ‘통일전도사’로 나서보거나 아니면 자신이 소유한 두 언론사를 세계적인 일류 언론사로 키워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때보다 외려 퇴임 후에 더 호평을 받고 있다. 세상은, 또는 역사는 그 사람이 앉은 자리가 아니라 그가 한 일을 보고 평가를 내리는 법이다.


끝으로 사족 삼아 한 마디 덧붙인다면, 앞에서 거론한 모 명리학자가 홍 회장의 앞날에 대해 묘한(?) 예언을 했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너무 믿지 말기를 권해드린다. 적어도 일국의 대통령이 되려면 천운도 필요하거니와 시대정신, 이타적 삶, 공적 영역에서의 탁월한 업적 등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 게다가 한국인은 대통령감으로 ‘부잣집 도련님’보다는 서민 집안 출신의 자수성가형 인물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까지도 혼신을 다했던 ‘리셋 코리아’ 운동의 초심으로 돌아가 장차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크게 기여하시길 기대해 본다.


원문: 보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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