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의치 않게 되는 것

조회수 2017. 4. 6.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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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상처에 대해서 할 일은, '그것이 별 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중에 과거에 상처를 겪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중에 과거에 상처를 겪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상처의 시간은 현재도 계속 흘러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몸의 상처가 아닌 마음의 상처이다.


주로 내가 상처를 받지만 또 본의 아니게 주기도 한다. 꼭 개인적인 의도나 의지가 상황적으로, 환경적으로, 구조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또 사람 사이의 관계란 마치 가시덤불을 지나가는 것과 같아서, 관계가 있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상처도 있게 된다. 일방향이든 서로 간에든 말이다.



상처는 언제 생기는가


종종 상처가 되리라 미처 예상치 못했을 때에 한 측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입장은 서로 곧잘 바뀌기도 한다. 실제 그 상처를 준 이의 무주의나 무덤덤이 원인인 때도 있고 혹은 상처받은 이의 민감함이나 예민함이 원인인 때도 있다. 혹은 그 두 가지 요소가 어느 정도씩 어우러지기도 한다. 보통 그럴 때는 양측 모두에게 개인적 사정(과거 원인, 내적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비교적 소소하게 주고받는 상처가 있는 반면 아주 명확한 트라우마를 만드는 상처도 있다. 이런 경우는 그 관계나 상황도 아주 선명하고 강렬하다. 피해자가 받게 되는 ‘신체적, 정서적, 사유적, 상황적’ 충격과 공격, 폭력도 상당히 큰 경우다. 트라우마성 경험 후에는 어느 시점에서든 반드시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데 많은 경우 치유 없이 평생을 안고 가기도 한다.

특히 여성들이 높은 확률로 겪는 성폭력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뇌과학 연구에서도 어릴 적 심하게 받은 심신의 폭력이나 학대, 충격 등이 실제 뇌에 영향을 미치고 우울이나 불안 등의 증상으로 평생을 간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물론 제대로 치유를 하면 많은 경우 큰 도움이 되지만 치유의 한계가 있는 경우도 있다.


남들이 볼 때는 소소하고 별 일 아닌 상처 같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심각한 트라우마 못지 않게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의외로 많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처는 그 상처를 받는 본인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깥의 사람이나 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받는 본인이 그것을 크고 심각하게 받으면 실제로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타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당사자는 더 힘들게 된다.



지나간 상처에 대해 우리가 할 일


상처, 겪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라 별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심리적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상처를 받고 또 괴로워하며 살아가야만 할까?


아니다. 그럴 순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상처를 경험하는 그 자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후의 괴로움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아니, 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나간 상처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직접적인 심리적 상처의 치유이든, 혼자서의 극복이든, 친구와 가족들의 도움을 받든, 사회의 도움을 받든 결국 한 가지이다. 바로 “상처, 겪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라 별 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무 말로만 쉽게 내리는 결론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물론 문장만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저 말 즉 ‘상처, 겪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니라 별 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은 그냥 나온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치유와, 극복과, 공감과, 품고 넘어섬을 통해 나온 것이다. 아주 치열한 말이다. 그래서 힘이 있는 말이고 무거운 말이다. 또 따듯한 배려와 격려, 지지의 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든 나 자신에게든 공히 말이다.


물론 할 수 있다면 가장 최선은 아무 상처도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헌데 모두가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성장하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내부, 외부의 자극과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상처가 나고 그 흔적이 남게 된다. 삶에서 상처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이든 사회든 부당하고 불필요하며 불공평한 모든 상처의 가능성과 상황을 최대한 줄이거나 없애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당연하다. 개인은 스스로 성숙해서 그리고 사회는 구조적으로 개선해서 말이다. 이것은 모두가 협력해서 이루어야 할 개인과 사회 진보의 과제이기도 하다.



상처를 허락하는 마음


그런데, 그러한 노력과 별개로 개인의 심리적 상처는 또 우리가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상처를 더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이미 경험된 과거의 상처를 허락하지 않는 마음‘이다. 10초 전이든, 1시간 전이든, 한 달, 10년 전이든 그 상처는 이미 경험되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상처와 상황의 존재를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억울한, 분한, 슬픈, 불안한, 두려운 경험을 하다니. 내가 왜? 왜 하필 나야.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억울해. 싫어. 난 그런 경험, 상처 허락할 수 없어!”라고 내면에서 계속 소리치는 것이다.


사실 그것도 자연스러운 마음이긴 하다. 과거에 경험했다고 해서 내가 다 받아들여야만 하고 허락해야만 하는 건 꼭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받아들임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거나 만족스러워지기도 한다. 하나의 전략적 마인드인 것이다. 당했다고 해서 다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만족과 편안함의 지속이다. 혹은 그러한 심리적 거부에 의한 결과적인 마음의 상태이다. 그렇게 과거의 경험 자체, 그 상황, 체험, 느낌, 상대의 존재 자체를 내가 부정하고 허락지 않으려 할 때 결국 우리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결과적으론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려는 행위는, 사실 스스로도 ‘틀린 방법’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럴 알면서도 그 부정과 거부를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허락하고 받아들이면 내가 더 비참해지고 더 억울해지고 슬퍼지고 화가 날 것 같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돌보기

그런데 내가 아무리 의식적으론 그 상처, 그 경험, 그 상황, 그 상대를 거부하고 억누르고 무시하더라도 뇌의 기억 시스템에는, 뇌의 신경망에는 그 상처의 경험과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억압’은 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계속 무의식적으로 후속 영향을 준다. 의식적인 억압과 무시의 기제가 클수록 그 영향도 커지는 프로세스이다. 억압과 무시는 그래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받아들이는 것도 억울하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을 준다니.


그 상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결국 그것이 별 것이 아니게 되는 것. 상처가 없어져야만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있든 없든 상관없게 되는 것. 개의치 않게 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돌봐야 한다. 이것이 꼭 심리 상담가나 정신과 등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아니다. 물론 그렇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분명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언제든 전문가를 찾자.


그러나 다른 방법들도 있다. 우호적인 사람들을 만난다든지, 도움되는 프로그램에 참가한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스스로의 통찰을 찾는다든지, 종교와 기도와 명상 등에 의지한다든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각자에게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이용하면 된다. 때로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가장 강력한 치유의 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을 쓰던 결국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결과는 이것이다:  


그 상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결국 그것이 별 것 아니게 되는 것. 상처가 없어져야만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있든 없든 상관없게 되는 것. 개의치 않게 되는 것


어쩌면 심리적 상처의 치유를 위해 우리가 힘을 기울이는 모든 방법들 즉, 상담 치유, 종교, 기도, 만남, 프로그램, 책, 명상, 통찰, 시간 등 모든 것들은 ‘그 상처가 별 것 아니게 되는 것, 있어도 괜찮게 되는 것, 개의치 않게 되는 것’을 위한 하나의 인위적, 임시적, 설정적 구실 인지도 모른다. 그런 치유 과정, 통찰 과정을 거쳤기에 나아지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치유와 통찰을 통해 그 상처가 아무것도 아님을, 내가 그 전까지 여겨왔던 것처럼 그렇게 크고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과거 상처에 내가 나도 모르게 부여했던 절대성을 거두는 것이다. 그것을 전부라고 였던 착각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주었던 중요도를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 과거의 기억보다 내가 더 커지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어떤 기존의 틀에 갇혀있기에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것이었고, 이제 내가 그것보다 더 커지고 내가 그것에 더 이상 갇히지 않고, 내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상처가 상처가 아니게 되는 것’이 근본적인 것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상처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그 상처를 치유하자.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스스로의 자립이 약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몸의 상처는 병원에 자발적으로 가서 기꺼이 치료를 한다. 마음의 상처도 같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가서 당당하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리고 또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자. 그래서 나름의 방법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자. 그 치유의 과정은 곧 성장의 과정, 확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중에 이 부분을 선명히 보자.


결국, 마음의 상처의 치유는 꼭 그 원인들, 그 원인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라는. 비록 원인과 원인자들을 잘 처리해서 그것들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것은 맞지만, 이제는 이것을 눈치채어 보자. 그리고 선명하게 만들어 보자.


결국은, “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어떤 기존의 틀에 갇혀있기에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것이었고, 이제 내가 그것보다 더 커지고 내가 그것에 더 이상 갇히지 않고, 내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상처가 상처가 아니게 되는 것’이 근본적인 것임”을.



강한 자아, 건강한 자아 만들기


우리, 나를 더 강하고 성숙하게 해서 현재와 미래에는 되도록이면 더 이상 상처를 겪지 않게 하자. 그러면서도 과거의 상처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찌해야만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별것이 아님을 선명히 해서 저절로 내가 자유로워지게 하자. 물론 이것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상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용할 마음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목표를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하고 심지어 미리 방지도 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상처도 할 수 있는 한 그 치료와 회복을 도와주고 다시 재발하지 않게 도와주자. 이를 위해 우리의 모든 지혜와 실천을 동원하자. 나의 행복을 위해.


원문: 필로 이경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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