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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일본

조회수 2017. 3. 29. 16: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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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공황으로 촉발된 위기는 일본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휩쓸기 전 일본은 이미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금융산업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였던데다가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발생한 거액의 대출은 부실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실채권들은 제대로 대손상각 및 감액손실 처리 등을 실시하지 않아서 일본 은행의 재무구조는 그들의 재무제표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취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1927년 봄이 되자 몇몇 은행들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만은행의 고객 중의 하나인 스즈키 상점이 1927년 파산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대만은행의 예금주들은 곧바로 예금을 인출하여 이 은행의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연쇄작용을 일으켜 일본의 여러 은행들의 예금주들이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는 이른바 뱅크 런(bank run)이 일어나며 27년 4월~5월의 3주 사이에 수십 개의 은행이 지급불능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1927년의 일본판 뱅크 런, 도쿄 저축은행 앞에 예금을 인출하기위해 몰려온 사람들

1930년대의 일본 2017년 3월 29일 by Orca (Edit) 이렇게 중소규모의 은행 수십 개가 망하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일본 재벌계 은행들은 이를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미쓰이, 야스다, 스미토모, 미츠비시 같은 재벌 계열사들은 금융업뿐만 아니라 각 산업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사이 재벌과 이와 유착한다고 믿어지던 정치인들에 대한 적개심 내지 반감은 일반 대중들 뿐만 아니라 우익 쪽에서도 더욱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다시 글로벌 차원의 빅 랜덤(?)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과 일본의 경제/사회적 위기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던 주식 가격이 대폭락 했습니다.


이를 시발점으로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 경제위기의 여파는 일본에서도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마저도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 몰려온 투자자들, “이보게 도대체 무슨일이 난건가?”

당시 집권당이던 민정당(民政党)의 수상 하마구치는 이 경제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중요한 정책을 폈습니다.


첫 번째는 국내 물가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수출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통화공급을 줄이고, 재정지출을 축소했습니다. 두 번째는 국제무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고정환율제, 다시 말해 금본위제로 복귀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여러 가지 금융정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해보셨던 분들이시라면, 뭔가 좀 방향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디플레이션이 휩쓸게 될 이 경제 대공황에서 이 조치들은 한마디로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전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은 일본 국내 물가의 하향 안정화로 인한 효과를 상쇄했으며, 금본위제로 복귀하여 환율이 고정되자 수출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자국 엔화를 평가절하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의 재벌들은 다시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각종 내부정보 등을 통하여 일본이 조만간 고정환율 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이들은 막대한 양의 엔화를 달러화로 환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며 엔화가 달러화에 대해서 50% 이상 평가절하되자 손쉽게 자신의 돈을 두 배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재벌들의 행태는 일본 국민들 사이에 만연했던 ‘자본주의자들과 이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시련은 일본의 농민들에게도 닥쳐왔습니다.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속에서 쌀과 보리 같은 곡물들의 가격은 43% 폭락했고, 소규모 지주들은 세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소작농에게 맡겼던 일부 경지를 자신들의 가족 노동력을 이용해서 경작하여 이번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작농들은 자신들이 경작하던 토지에서 쫓겨나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기간 동안 소작쟁의는 급증하게 됩니다.

1920년대 경작지 사이를 이동하고 있는 일본의 소작농 가족들의 모습
1930년 니가타현에서 발생한 소작쟁의의 모습

또한, 주로 도시지역에 집중된 소규모 상인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객들인 노동자들의 임금이 인하되고 실업률이 치솟자 소매상인들의 도산도 2배 이상 급증하게 되었고, 신문들에는 빚을 갚지 못해 야반도주한 상점 주인들의 이야기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인형을 팔고 있는 소상인의 모습

이런 경제위기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의 중산층들은 당시 일본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会)와 민정당(民政党)을 ‘자본주의의 개’라고 비난하면서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계층에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정책을 정치인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한편 당시 일본의 중소기업인들은 ‘자본과 노동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기 시작합니다. 실업률이 15~20%로 추정되는 당시 상황에서 이들은 점점 적대적으로 변해가던 노동자들과 대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언급했던 소작쟁의와 마찬가지로 노동쟁의도 그 빈도수 뿐만 아니라 폭력성도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여성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는데, 특히 토요 면직물 공장의 파업에서는 수백 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합세하여 야간 행진을 벌이던 중 돌멩이를 투척하며 경찰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신문들에는 ‘시가전’이라는 제목으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호전적인 투쟁에 대한 놀라움을 나타내는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토요 면직물 공장의 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

그런데 일본 사회를 놀라게 한 여성들은 이 호전적인 여성 노동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모던 걸’들은 이 시기 다른 모습으로 사회에 충격을 주게 됩니다. 당시 일본 주요 도시에 있던 카페와 댄스홀에서 근무하던 여급들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매춘’에 종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주 수입원은 손님들이 주는 팁이었습니다. 그리고 업소의 주인들은 그들에게 에로틱한 분위기를 유도하거나 단골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유도하였습니다.


1929년 조사에서 여급들의 수는 50,000명으로 등록된 매춘여성들의 수를 초과하였으며, 1936년에 경찰은 다시 여급의 수를 111,0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카페에서 남자 손님에게 서비스를 제공중인 여종업원(女給)

어찌 됐건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은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전통 사회의 규범과 도덕이 급격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위기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위기에 대한 인식은 사회의 엘리트 계층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매우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감은 곧 다른 반동을 낳게 됩니다.


난국의 타파 :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


앞서 말씀드린 위기감은 군부와 그들의 연합세력인 민간 우익세력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젊은 장교단들은 1920년대 동안 정부의 외교 및 국내 정책에 실망하고 있었으며, 삭감되는 군사 예산과 자신들의 특권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재벌과 결탁한 정당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군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분노로 인한 가장 파급력 있는 반동이 생겨났는데, 바로 군부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 군부의 독자적인 움직임의 메카는 바로 관동군일 것입니다.


관동군은 이미 1928년 만주에 세력을 가진 군벌 장쭤린을 기차를 폭파시켜 암살하며, 당시 일본 민간정부가 만주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유도했습니다.


비록 당시 일본의 수상 다나카는 만주에 군사력을 투입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여러 경로로 압력을 받아 이 사건을 일으킨 군부 책임자를 강력히 처벌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불길한 전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관동군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시와라 칸지는 앞으로 불가피하게 일어날 미국과 일본의 최후 전쟁을 위해서 풍부한 자원이 있는 만주지역의 점령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의 가치는 이런 전략자원의 확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시와라 칸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만주를 이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닌 사회적 평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기본 원리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일종의 시험장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1931년 만주사변을 거쳐 1932년 설립된 명목상의 독립국 ‘만주국’은 서구의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뇌내망상을 하고 있던 일본의 계획 수립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상을 펼쳐 보일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중들도 1931~32년에 걸친 만주국의 탄생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만주지역의 획득은 당시 만연하고 있던 실업의 해소를 통해 국가 전체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선전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의 제국주의와는 그 의도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일본 국민들은 대중가요, 가부키,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메뉴 등을 통하여 자신들이 새롭게 차지한 풍부한 자원이 있는 만주를 일본 제국이라는 왕관의 보석으로 열렬히 찬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주사변은 일본의 외교 및 국내 정책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일본제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기보다는 새로운 확장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 국내 정치의 안정보다는 새로운 폭력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이미 몇 번의 민간 정치인과 재벌 기업인에 대한 군부 및 우익세력으로부터의 암살을 경험했던 일본이었지만, 1932년 5월 15일 젊은 해군 장교 집단이 당시 수상이며 정우회(政友会)의 총재였던 65세의 이누카이 츠요시를 암살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일본의 의회정치는 일단 막을 내리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촉발된 위기는 일본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경제적 측면에 가장 큰 충격을 주었지만, 어찌 보면 더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소임을 다하며 평화롭고 평등하게 사는 전통적 농업사회 – 아마 실재했다기 보다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 의 이상적인 사회규범과 도덕 등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기 위해 결탁한다고 여겨진 재벌 기업가들과 민간 정치인들에 대한 염증을 토양으로 삼아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경제도 중요한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 일본의 파시즘 –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의 도래는 경제 위기와 더불어 농촌과 도시노동자의 계급 갈등, 여성들의 자각, 좌익과 우익의 대립, 전통적 관념의 파괴에 대한 우려 등등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성과 갈등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후일의 시점에서 보면, 당시 일본이 선택한 길은 누구보다 그들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군국주의가 거의 모든 일상생활 – 심지어 여성의 패션에 조차 – 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풍자한 1936년 잡지 도쿄 퍽 (東京 パック)의 삽화

[참고문헌]

Andrew Gordon (2003), “A modern history of Japan”, pp. 142-143, 182-203

W.G. Beasley (1987), “Japanese imperialism 1894-1945”, pp. 175-219

Andrew Gordon (1992), “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 pp. 237-269

원문 : orca의 잡상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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