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건축가 이경훈 교수를 만나다

조회수 2017. 3. 20.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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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도시에 대한 인식이 잘못 세팅되어 있다
도시(都市) │ 명사
일정한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

위는 도시에 대한 사전적 정의이다. 얼핏 보면 의미 한 번 참 깔끔한데 곱씹어서 한 번만 더 보면 뭐 이렇게 총체적이고 와 닿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문장이 더욱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시는 곧 사람이 사는 곳이며,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의 선상 위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사람마다 도시라는 공간에 대해 체감하는 바가 제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 도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대수준과 양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럼에도 한국, 그리고 서울이라는 이른바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도시’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도시란 과연 무엇일까’ 시간을 내어 떠올리는 게 되려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아마 자동차와 마천루, 매연, 대형마트, 회색, 환경오염, 자로 잰 듯한 길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 것 같다. 서울이 바로 위와 같은 특징들을 갖추었기 때문이고, 자연스레 서울은 행정구역상 도시로 불릴 수밖에 없으며, 곧 우리는 서울의 그것을 곧 도시의 특징과 성질이라고 이해하게 된 과정에 놓여 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2011년, 교수이자 건축가인 한 남자는 위와 같은 제목의 책을 한 권 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이 사실은 도시의 요건을 대부분 충족하지 못하고 있지만, 걸맞지 않게 계획된 서울의 계획과 의도를 사람들은 기실 ‘도시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이 아홉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국민대학교 건축학부 이경훈 교수를 만났다.

백령도의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사실 건축보다도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 본인은 ‘그림을 너무 못 그렸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잡다한 이슈와 대상들에 폭넓은 관심사를 가졌고 1987년 뉴욕으로 훌쩍 떠난다. 한국에서도 건축을 전공했으나 자퇴 후 뉴욕에 도착한 그는 미술과 건축에 대한 열정을 양립시키며 브루클린의 프랫 인스티튜드(Pratt Institute)에 입학한다. 많은 사람이 알듯 프랫 인스티튜드는 미 동북부의 미술대학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트 스쿨이다. 


이후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미국 건축가 협회(AIA) 정회원이 된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와중에 신탄진 고속도로 휴게소와 헤이리 랜드마크 하우스 등의 설계를 진행했고, 졸업한 프랫 인스티튜드와 국민대, 경희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출간한 후 현 박원순 서울시장의 제안을 통해 서울시 도시계획 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지속적으로 국민대학교 건축학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Q.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지금의 건축철학에 이르기까지 생각의 과정에 대해 듣고 싶다.


음, 일단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건축사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좀 치열하게 ‘형태’로써 건축물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써, 고딕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고딕만 봐도 기술적으로 굉장히 진보했으며 동시에 아무나 만들지 못하는 형태의 건축물이다. 또 하나는 르네상스 건축이다. 건축을 형태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비례를 예쁘게 하는 등’의 조건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인문적 가치를 비롯한 관념을 녹여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첫 번째 경향보다는 두 번째 경향을 편애한다. 이유인즉슨 따라 하기 편하다는 것과 더불어 관념적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즈음에 네덜란드 건축이 득세하면서 ‘도시’라는 것이 마치 모든 것의 만병통치약 같은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고, 서울은 네덜란드와는 상황이 너무나 다름에도 우후죽순 제멋대로의 벤치마킹을 감행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Q. 뉴욕에서 10여 년을 지낸 이후 한국에서 지내면서 더욱 크게 체감했다고 들었다.


맞다. 사실 뉴욕에 있을 때는 체감하지 못했다. 물론 LA와 뉴욕이 판이한 곳이기 때문에 느껴진 것들은 있었다. LA는 사실 컨트리(County)라고 부를 수 있는, ‘군’ 정도로 넓게 퍼져있는 곳이라 많은 사람이 탈 것을 이용해서 이동하고 대형마트도 있다. 반면 뉴욕은 걸어 다니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어쩌면 걸어 다녀야만 하고, 걷는 게 더 낫다는 의미다. 대형마트가 없는 대신 건물 1층에 제각기 다른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주거를 담당하는 섹터와 상업을 담당하는 섹터가 따로 나뉘어있지 않은 형태였으니까.


그러다 한국에 들어오니 대다수의 사람이 막연히 도시에 대한 이미지를 LA의 그것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시니까 당연히 대형마트가 있어야 하고, 멋들어진 녹지가 있어야 하고, 자동차가 끊임없이 지나다녀야 하고. 도시를 기능에 따라 철저히 분리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화에서처럼 대형마트에 가서 카트 끌고 거의 1달 치 식량을 사서 차에 싣고는 자택 주차장으로 가는 생활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내 시각에서 그것은 도시의 생활이라고 보기 힘들다. 애초에 도시에 대한 인식이 잘못 세팅되어 있다는 거다.

Q. ‘걷는 것’을 도시의 요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도시는 밀도가 높다. 사람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근거리에서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미 많은 사람도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뚝 뚝 떨어져 있는 대형마트가, 필요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설정된 도시 속의 녹지가 이를 가능케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효율이다. 도시는 걸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많은 사람이 사는 만큼 서로 자주 접촉하고 마주칠 수 있어야 한다.


뉴욕 이야기를 자꾸만 하게 되는데 스마트폰 걸음수 재기 어플리케이션을 켜 놓으면 하루 기준으로 뉴욕에서는 평균 2만 보를, 한국에서는 많아봐야 4,000보가량을 걷게 된다. 서울은 의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걷기 힘든 곳이다. 건축물의 다양성도 많이 결여되어 있고 건축물 안에 들어와 있는 콘텐츠(상점)의 다양성도 확보되어 있지 않다.


Q. 저서에서는 서울의 도시다움을 망치는 요소들을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예를 들 만한 것은 무엇일까.


걷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연관 지어서 말해보자면 일단 인도와 차도를 애매하게 가로지르는 개구리 주차가 떠오른다. 압구정 로데오는 상인 혹은 건물주를 위한답시고 개구리 주차를 공식적으로 하라는 듯 주차구역을 그어 놨다. 이게 얼핏 보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최대한 편리하게 배려하는 것 아니야?’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지만 결국 걷기 힘들어진 곳은 지속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신천동도 압구정 로데오도 처음에 가졌던 정말 괜찮은 조건을 다 잃었다. 이제 누가 봐도 예전 같지 않다.


또 하나는 관에서의 잘못된 도시계획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걷게 하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이 잘못된 부분이 많다. 추진 중인 서울역 고가도로 역시 편히 걸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나무를 심어주고 일정 구간을 지하보도 네트워크로 연결해주겠다는 아이디어인데 이는 아직도 ‘자동차 중심적 도시’의 편향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걷기는 지상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걷기를 방해하는 것들이 오히려 우회하는 게 맞다.


Q. 일반적인 관점과 달리 상업적인 공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한국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어휘는 좀 잘못 이해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부정적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도시계획의 목표는 도시를 젠트리파이하는 쪽으로 설정되는 게 맞다고 본다. 다만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이 이슈를 둘러싸고 세입자와 건물주 사이의 갈등이 자주 빚어지는데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도시는 젠트리파이되는 것이 맞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해 줄 법적인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막상 건물주에게 ‘윤리적으로 행동하세요’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예를 들면 임대차 보호법상에 있어 법안 개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동시에 국회의원들이 입법청원을 통해 제도적 개선으로 해결하는 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본다.


Q. 그럼에도 상업시설이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유치 및 장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맞다. 일단 특정 구역에 있는 상업시설이 ‘단일 콘텐츠’로만 꾸려져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신천동이다. 도시의 일정 섹터가 먹자골목으로 변하면 그곳은 지속되기 힘들다. 상점만의 특수성과 다양성이 사라지면 다양한 층위의 도시인이 방문할 요인이 되지 못한다. 다양한 니즈를 가진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상업시설이 기획되어야 하고, 그래야 거리가 살아나며 결국 도시가 활기를 띤다.

Q. 어쩌면 도시의 상업성을 비롯한 ‘도시적 개발’의 정도를 적당히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과연 그 ‘적당히’의 기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결국 상업시설을 어떤 방향으로 유치하고 제한하느냐가 그 ‘적당히’의 열쇠가 될 것이다. 이 가능성은 내가 재차 이야기하는 뉴욕의 사례에서 벤치마킹할 부분이 많다고 보인다. 가령 뉴욕 시는 상업시설이 들어올 수 있는 상가의 층수제한을 두고 있다. 상업시설은 무조건 1층에 두되 2층이나 3층, 지하는 셰어하우스나 오피스, 주거공간으로 활용하거나, 특히 지하 1층 같은 공간은 일차적으로 사람들과의 접점이 딱히 필요치 않은 시설을 유치하는 것이다. 즉 적극적으로 젠트리파이하되 ‘어떻게 젠트리파이하느냐’가 중요하다.


도시가 발달하면 지대는 당연히 오르는 것이고, 다만 이렇게 제한된 층수에서 상점들이 입주했을 때 당연히 도시의 사람들과 접점이 늘어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개별 상점이 살아나고 지대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오히려 이게 도시라는 시스템 안에서 윤리적인 방향 아닐까?


Q. 도시 사람들이 으레 느끼는 ‘불편함’에 대하여 좀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계시다 들었다. 그중에서도 먼저, 방음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가령 도시의 필요에 의해 고속도로 혹은 고속화도로가 먼저 생기고 그 이후에 아파트 단지가 도로 앞에 생긴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에서는 백이면 백 모두 민원이 발생하고 도로와 아파트 사이에 흉물스러운 방음벽이 놓인다. 방음벽 올리는 건 다 세금이다. 사실 주거 단지가 생기고 나서 고속도로가 들어선 것도 아니고 굳이 그곳에 주거 단지를 세우겠다고 차후에 들어온 마당에 ‘내가 시끄러우니까 이건 상식적으로 방음벽을 쳐 줘야 해’라고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큰 길가에 살게 된다면 도시의 공적 필요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맞다.


만약 그것도 싫다면 도시에서 주거 단지가 지어지는 것에 대한 편견이 바뀌어야 한다. 건축적으로 한국에서는 이른바 스탠더드를 벗어난 시도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열악하다. 큰 길가에 무조건 주거공간을 세워야 하지만 소음이 싫다면 도로를 등지고 창을 내면 해결될 일이다. 한 번이라도 예술적 가치도 없는 산수화가 그려진 아파트의 벽 쪽에는 왜 창이 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들이밀면 구획의 이유를 문제 삼는다든지, 관념적으로는 ‘그래도 남향집이 좋으니까’와 같은 이유를 들며 끝까지 단 한 부분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Q. 남향집은 볕도 잘 들고 시종일관 따뜻하니까 당연히 선호하는 게 맞지 않나?


우린 지금 도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러 복잡한 기능이 총체적으로 모여있는 게 바로 도시다. 심지어 서울은 인구밀도도 높다. 이 말인즉슨 ‘나의 개인적 선호’를 죄다 반영한 도시 라이프는 이뤄지기 힘들다는 거다. 그래서 양보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해가 지고 퇴근하는 도시 생활에서 남향으로 창을 낸 집이 그렇게나 양보하기 힘든 요소인 것일까?


Q. 이제 환경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보편적인 관점으로는 도시는 환경오염이 심하니 녹지공간의 필요성은 당연시되는데 왜 오히려 녹지가 도시다움을 망친다고 보는 것인지?


물론 녹지는 환경오염을 완화한다. 하지만 이중잣대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서울에서 녹지의 비율은 무려 30%를 차지한다. 물론 이 녹지라는 것이 서울에서는 이리저리 큰 덩어리로 편중된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도시에서 녹지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걸을 가능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장치일 것이고 그것은 눈에 띄고 휘황찬란해 보이는 멋들어진 녹지공간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뿌려져 있는 초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단위 면적당 인구가 얼마나 환경오염을 일으키는지 살펴본다면 도시의 환경오염이 지방보다 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녹지가 많은 곳에서 인구 1인이 일으키는 환경오염의 정도는 도시의 1인과 맞먹거나 더한 경우도 많다. 미국만 하더라도 텍사스 사람들은 죄다 석탄 연료가 필요한 차량을 타고 다니는데 뉴욕 시민은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서 이동한다.

Q. 이야기를 잠시 옮겨서, DDP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건립 직후에 일각에서는 DDP에 대해 ‘역사성과 장소성을 고려하지 못한 뜬금없는 건축물’이라고도 평했다. DDP의 자문을 맡았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당시 여러 건축 옵션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옵션 중에서는 가장 장소성과 역사성을 잘 살린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건축물이 문제라기보다 해당 건축물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느냐가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슈가 되고 있다고 본다. 물론 DDP가 미래적 형태를 띤 건축물이긴 하지만 동대문이라는 특성을 생각했을 때 ‘그렇다면 어떤 건축물의 형태가 가장 잘 어울릴까’ 대안을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동대문이라는 곳의 장소성을 실질적으로 조망해보았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많은 상가의 간판과 밀리오레 같은 의류 쇼핑몰이다. 과연 동대문의 역사성과 장소성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어야 논쟁이 가능하다고 본다.


Q. 오랜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직(職)’의 측면보다는 ‘업(業)’의 측면에서 교수님의 다음 스텝이 궁금하다. 더불어 도시로서의 서울에 대한 전망도.


서울은 분명 진보할 거라 믿는다. 도시로서 지금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모할 거라고 믿고 나도 그에 일조하는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스위치를 켜듯 획기적인 변화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 그리고 법규는 느리게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한국, 또 서울에 사는 시민들이 ‘표준화된 것에서 벗어나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을 점차 줄여나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나는 어쨌거나 ‘설계’를 통해서 도시적 대안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더불어 건축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분야가 요즘은 ‘공연예술’이다. 도시적 접근을 통해서 공연예술을 풀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은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결합하여 다음 책을 써 볼 생각이다.


건축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 거듭날 의지와 욕심이 있을 때 더욱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한 스페셜리스트의 관점과 생각을 이해하고 이를 건축 및 도시적 관점에서 얼마나 잘 코디네이트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다. 장기적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더 나은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만남을 마치며


그는 오랫동안 경험적으로 축적해 온 도시의 감상과 이해를 회화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다만 시종일관 논리를 갖추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가 출간되고 나서 책의 제목과 슬로건, 짧게 축약된 자극적인 평들 때문에 오히려 뜨거운 감자가 되었을지언정 그가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은 모더니티를 거쳐 포스트모더니티로 이행해가는 현실에서의 ‘시민’이었다. 결국 전근대와 근대를 거친 ‘도시’라는 곳은 시민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공간이며 이유 있는 윤리의식합리적 이성, 그리고 시간과 장소에 대한 공감과 존중이 있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맨 처음 제시했던 도시에 대한 정의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불친절한 것처럼 도시에 대한 이해는 역시 누구에게나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도시에 대해 부여하고 있는 관념이 과연 얼마나 도시인들을 위한 것인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애써 떠올려 생각하지 않았던 우리의 ‘도시’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원문: ROOT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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