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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살고 있는 작가가 목숨을 걸고 반출시킨 소설 '고발'

조회수 2017. 3. 15. 10: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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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고백'하게 만드는 힘을, 나아가 '고발'하게 만드는 용기를

1. 1990년대의 반공 소년


지금 서른다섯인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때, 그러니까 1990년 초반에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어쩌면 대학 연구실에서 논문을 쓸 때보다 더 읽었는지 모른다. 교실에는 천 권이 넘는 책이 있었다. 담임교사의 말에 따르면 교실이 부족해 도서관을 헐었고 읽을 만한 책들을 남겨 두었으니 많이 읽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너희는 선택받은 아이들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읽을 만한 책들을 남겨두었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딱히 읽을 만한 책들이 없었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반공도서’였다. 북한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삶을 살고 있는지, 간첩들이 얼마나 준동하고 있는지, 남한의 요원들은 얼마나 선하고 믿음직스러운지, 그런 내용을 담은 문고본 책들이 참 많았다.

2. 그래서 누가 ‘고발’하는데?


그동안 북한을 ‘고발’한 책은 많았다. 굶주림, 공개처형, 수용소, 아오지탄광, 미사일, 이러한 단어들이 북한의 실상이 어떠하다고 우리에게 알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우리가 만들어낸 고발이었다. 그러할 것이다, 라기보다는 그래야 한다, 라는 당위에 맞추어 재생산되고 유통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고발』이라는 책은 우리가 해온 그간의 고발과는 다르다. 사실 읽어나가며 마주한, 작가 반디가 그려낸 북한의 참상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고백하듯 “재능이 아니라 의분으로, 피눈물에 뼈로 적은” 글이기에 우리가 아는 고발과는 다르다. 선동의 표어로 한 줄, 지나가는 사진으로 한 컷, 이렇게 후크송처럼 남지 않는다.

『고발』의 서문.

대신 메마르고, 거칠고, 초라하고, 미숙하다고 작가 스스로 표현한 그의 언어가 단순한 남북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한 인간의 가슴에 아프게 각인된다. 표어나 사진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평양과 그 주변의 분위기를, 그 안의 사람들의 숨소리를, 무엇보다도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절망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사자가 직접 쓴 르포르타주로서만 도달 가능한 영역이다.

 


3. 북한에도 남한에도 있는, 149호 가족과 유령들


『고발』은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작이 아니기에 읽고 싶은 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고, 마음에 드는 제목만 골라 읽어도 좋다. 그런데 우선 첫 글인 「탈북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빨간 버섯」까지 한눈에 읽게 된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는 문체와 내용 구성이다.


탈북기」의 일철과 그의 아내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신혼부부다. 그러나 일철의 아버지는 모내기를 위한 품종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처형당했고, 가족 모두 ‘149호’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신세다. 두 사람이 자식을 낳더라도, 그 자식에게도 149호의 낙인이 찍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남편의 출신 성분을 알고 절망한 일철의 아내는 “그런 생명을 낳을 어머니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만약 그런 어머니가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이기 전에 죄인 중에서도 가장 잔악한 죄인이 될 것”이라며 낙태를 하고, 피임약을 먹기 시작한다.

우리 주변에도 함부로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꿈꿀 수 없는, 내일이 절망으로 이미 예정된 무수한 149호들이 있다. 대학원생도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그리고 여성과 청소년, 노인 등등, 굳이 주민등록의 등본에 남지 않더라도 이미 선명한 낙인을 가진 이들이 있다.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할 수 없는 삶, 그것은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형벌이다. 언젠가 내가 인터뷰한 대학원생 조교는 30대 후반이었고,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에게 무엇이 가장 힘든가, 하고 물었는데 그에게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는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게 제일 힘들어요.”하고 답했다. 그의 아내가 언젠가 “여보, 나는 당신이 당장 몇 년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면 그걸로 살아갈 수 있겠어.”라고 말했는데, 거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인 그가 그 순간 얼마나 가슴 아팠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

 


4. 유령의 도시


이어지는 단편 「유령의 도시」는 100만 군중시위 연습이 이어지는 평양을 배경으로 한다. 한경희는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 두 (공산주의의) 유령이 평양 시내를 배회하고 있음을 느낀다. 유령이 통제하는 그 도시에서 자신들이 세 개의 굴을 파 둔 100만 마리의 토끼가 되어 웅크리고 있음을 인식하자마자, 그는 남편과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추방당한다. 그러는 동안 어느 환청이, “나가라믄 찍소리 말구 나갈 거지 무슨 허튼 생각이야. 이게 내 도시지 네 도신 줄 아니?”하는 유령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양은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유령이 지배하는 도시로 그려진다. 단순히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을 잔뜩 웅크린 토끼로 만들어 내고 추방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방이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끝없이 추방당한다. 서울에서 집을 구해 본 사람들이라면 안다. 전세보증금과 월세를 올려줄 수 없어서 조금씩 밀려나는 이들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유령들이 서울 상공을 언제나 배회한다.


보증금 1,000에 월세 50을 찾아 홍대나 상수에서 망원동으로, 상암동으로 단칸방을 옮겼다가, 다시 증산과 새절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도시로 거처를 옮긴다. 이어지는 6호선 라인이 있으니 괜찮다고 애써 생각한다. 어쩌다 연신내를 넘어 삼송이나 원흥까지 밀려나고 나면, 자신이 결국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추방당했음을, 버티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빨간색 광역버스만 있으면 그래도 괜찮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과 등교와 그 무엇을 준비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이게 내 도시지 니 도신 줄 아니?”하는 질문을 웃어넘길 수 있는 도시민은 많지 않다.

 

 

5. 빨간 버섯, 그리고 파란 버섯


마지막 단편의 제목인 「빨간 버섯」은 ㄴ시의 시당위원회 청사다. 8.15 직후 초대 공산당 비서였던 이가 빨간 첨가제를 섞어 특별히 구워낸 벽돌로 지었다. 속은 물론 겉까지도 빨개야 한다며 기와에까지 첨가제를 섞어 아예 ‘빨간 집’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원료기지라 불리는 화전에서 식량 공급을 책임지고 있는 고인식은 산에 서서 그 빨간 집을 바라보며 그것이 빨간 버섯과 같다고 느낀다. 빨간 독버섯을 잘못 요리해 직원 1명이 죽은 경험이 있으니, 그 혁명의 건물을 독버섯에 비유한 것이다.


『고발』을 읽고 덮으며, 나는 빨간 버섯과 파란 버섯을 함께 떠올렸다. 우선은 당사자의 르포르타주가 주는 힘을 확인했고, 그에 따라 가슴이 무너졌다. 이것은 우리가 팔짱 끼고 북쪽 강물 너머를 바라보며 “아이 참 불쌍하네.”하는 그런 종류의 동정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저기에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가 저기에 있다면.”하고 그러한 처지에서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에 더해 “그래서 나는 다른가?”하는 질문을 함께 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2017년의 봄을 앞둔 모두에게 추천한다.


대한민국에는 ‘파란 버섯’이 자란다. 우리는 그것이 독버섯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배워 왔다. 그러나 그 무엇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순간 우리는 독에 중독된 인간이 되고 만다. 예컨대, 어느 색을 구분하지 못함을 떠나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광장에 나가 태극기를 흔드는 인간이 되고 만다. 소중한 존재와 이름을 오염시켜, 그 후손들이 그것을 쉽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고발』이라는 작품은 우리에게 ‘고백’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우리도 사실 수많은 낙인과 유령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음을 고백하게 한다. 나아가 ‘고발’하게 만드는 용기를 함께 줄 것이다. 광장에 선 우리가 지금 『고발』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북한의 반디‘들’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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