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망캐'입니다.

조회수 2017. 2. 23.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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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도 마치 '마비노기'와 같다면
출처: 게임동아

고등학교, 내 세상은 마치 ‘메이플스토리’


메이플스토리에서 캐릭터를 육성하고 성장하는 데에는 일정한 방식이 존재했다. 별로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근처 혹은 던전의 몬스터를 잡으며 경험치를 쌓고 레벨을 올려서, 스킬과 스탯을 찍고 일정 레벨이 되면 전직을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육성법에 어긋나지 않게 스탯과 스킬을 올리는 것이었다. 정해진 육성법을 지키지 못한 캐릭터는 ‘망캐’라 하여 가차 없이 삭제했다. 그래도 되었다.


‘망캐’ 여부는 캐릭터 생성에서부터 정해졌다. 캐릭터를 생성할 땐 주사위를 굴려 캐릭터의 초기 스탯을 결정해야 했는데, 당시 메이플스토리는 랜덤 방식으로 스탯을 정해 ‘4/4’라는 수치에 맞추지 못하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주사위를 굴려야 했다. 전사를 육성할 것이라면 지능과 운을 각각 4/4에, 마법사를 육성할 것이라면 힘과 민첩을 4/4에 맞추는 식이었다. 이 조건에서 어긋난 캐릭터는 정상적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출처: 메이플스토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화면 앞에서 보냈던가

물론 그 이후에도 해야 할 것들은 많다. 생성된 이후에도 정해진 육성법에 따라 최적의 스탯과 스킬을 올려야 했고, 그렇게 ‘망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남들과 같은 길을 선택해야 했다. 효과적인 딜량을 뽑아내기 위해선 모두가 같은 스킬을 찍어야 했고, 같은 방식으로 스탯을 올려야 했다. 이 길에서 벗어난 캐릭터는 그저 잉여, 혹은 쓰레기일 뿐이었다.


현실도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였다. 주어진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때가 되면 대학생으로 전직하고, 또 공부해서 경험치를 쌓다 보면 소위 말하는 ‘성공한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알았다. 또 다들 그렇게 말했다. 국영수사과 외의 스킬을 찍는 건 ‘망캐’들이나 하는 짓이었고, 책, 방송, 선생님, 또래 모두가 틈만 나면 효율적인 ‘육성법’을 나누고 그 길에서 벗어난 아이들에겐 손가락질했다.


‘망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항상 공부에 몰두해야 했고, 매 학기 시험 성적을 받아들면서 다시 안심할 수 있었다. 주어진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수능을 지나 좋은 대학에 가는 것. 그게 ‘나’라는 캐릭터에 대한 주어진 육성법이었다.

출처: 퓨리서치센터(2005)
그래서 모두, 행복하십니까?



그렇게 ‘대학’이라는 만렙을 찍었다


새내기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어딘가 영 재미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도,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더는 어디에도 명쾌한 공략집 같은 건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내 학점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굶어 죽는다는 인문학 전공에 별다른 스펙도 없이, 학점마저 복구할 수 없을만큼 내려간 것을 보니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야말로 답이 없었다. 나 자신도 내가 한심했지만, 딛고 일어서기에는 무력감이 너무나 강했다. 일단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루하루 나이는 먹는데, 아직도 자신의 것을 찾을 줄을 몰랐다. 망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나는 어느새 손색없는 ‘망캐’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캐릭터 삭제’를 할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후회도 추억도 아니라면요?

그대로 한참을 바닥에서 기었다. 할 일이 없으니 대학에 온 이후 한동안 놓았던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임은 생활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우며 ‘판타지 라이프’를 표방하는 RPG였다. 그렇다. 바로 마비노기다.


그런데 나는 그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습관처럼 공략법을 뒤졌다. 스킬은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캐릭터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하고 싶은 거 하세요”일 뿐, 아무런 명쾌한 육성법도 찾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직업 같은 건 없었다. 뭘 하면 좋을지 몰라 배울 수 있는 스킬은 아무거나 배웠고, 할 수 있는 퀘스트는 일단 시작하곤 했다.



인생도 마치 '마비노기'와 같다면

출처: 마비노기

그런데도 마비노기 속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칼을 들고 싸우다가도 활을 들면 궁술을 배웠고, 마법을 쓰다가도 재단과 방직으로 멋진 옷을 만들 수도 있었다. 심지어 전투에는 아무 소용도 없는 악기 연주를 배워 광장에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잡히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캐릭터는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스타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 재밌는 것은, 주위를 둘러봐도 나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략과 정해진 육성법이 없으니 ‘망캐’ 역시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은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즐겼고, 마비노기 속 세상을 살아나갔다.


가끔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가는 질문에 대하여 선생님은 항상 ‘다 크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대학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도, 나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은 무언가를 ‘그냥’ 하고 싶지 않다.

구정 때 만난 동창은 내게 물었다. 불안하지 않냐고. 행복하냐고.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즐겁다고 말했다.


정해진 것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니까. 아직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원문: TWENTIES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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