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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고문자의 스위치를 누르는가

조회수 2017. 2. 7. 17: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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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행동을 통제하거나 유도하는 것은 정당한가

몇 년 전 만난 영우(가명)는 상·벌점에 유난히 민감했다. 학기 중에 몇 번이나 교무실을 찾아와 상·벌점을 확인했다. 상·벌점을 선생님들과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듯했다. 학생으로서 그 스스로 느끼는 자존감이나 인간적인 존엄감의 증표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자신의 많은 상점과 ‘0점’으로 찍힌 벌점을 보면서 득의에 찬 표정을 짓던 영우를 잊을 수 없다.

상·벌점제의 실효성


학교 안팎으로 상·벌점제 시스템을 찬성하는 이가 많다. 교사들은 상·벌점제의 구실을 강조한다. 상·벌점제가 있어야 수많은 학생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벌점제가 학생에게 자기 행동에 대한 권리의식과 책임감을 부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학부모들은 대체로 자녀들이 얌전하고 말을 잘 듣기를 원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 안 듣고 엇나가려는 사춘기 자녀들을 통제하는 데 상·벌점제가 효과가 있다고 여긴다.


상·벌점제가 ‘공식적으로’ 생겨난 것은 2010년 이후부터였다. 시행 초기 교육부가 적극 추진하고 각급 교육청 차원에서 전체 관리 시스템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학교 현장에서 체벌이 금지되면서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대다수 학교가 상·벌점제 시스템을 적극 받아들였다.


체벌의 교육적 효과가 의심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상·벌점제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상·벌점으로 학생을 통제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다. 둘째, 체벌이나 상·벌점제가 없어도 대다수 학생은 학교에서 ‘얌전하게’ 살아간다.

대다수 학생은 얌전하게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사춘기를 격렬하게 보내면서 학교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10대 ‘괴물’들이 중학교에 넘쳐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괴물’은 없다. 그들이 보기에 ‘괴물’은 극히 일부다. 그리고 그 ‘괴물 됨’은 그들 자신보다 주변 환경(부모, 성장환경, 학교 문화)에 말미암은 바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들의 ‘본성’에 원래 ‘괴물’ 같은 게 있다면 그 부모를 탓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그렇게 ‘괴물’ 같은 본성을 바란 채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다수 학생은 학교를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에 맞춰 자신의 언행을 제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매’나 ‘점수’(보상)로 말과 행동을 조절하는 ‘노예’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학생은 점수 때문에 행동을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상·벌점이 자기 행동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가르친다는 찬성론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학생들은 상점 받을 권리를 찾거나 벌점에 따른 벌칙 수행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선별하게 되지 않을까. 상점을 받으려고 일부러 ‘착한’ 행동을 하고, 벌점을 피하기 위해 ‘나쁜’ 행동을 삼가는 것처럼 말이다.


상·벌점이 부여되는 행동 항목들은 대개 학교에서 집단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 나가는 데 필요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언행들이다. 교사에게 대들지 않기, 친구에게 욕설하지 않기, 교실에서 수업 방해하지 않기 등등. 상·벌점의 교육적 효과가 확실하다면 상점으로 유도되는 ‘착한’ 언행은 계속 늘어나고 벌점으로 억제되는 ‘나쁜’ 언행은 꾸준히 줄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상점이나 벌점 때문에 일부러 언행을 가리진 않는다.

상·벌점제를 시행하고 있는 중학교 소속 교사로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선생님에게 인사했으니 상점을 달라거나, 친구가 욕을 했으므로 그에게 벌점을 주라며 반 장난처럼 이야기하는 학생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상점 받을 권리를 찾거나 벌점에 따른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언행을 가려서 하는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생을 포함해 평범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점이 되었든 벌점이 되었든) 눈에 보이는 점수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학생 행동의 통제·유도는 정당한가


상·벌점제는 ‘점수’로 학생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려 한다. 점수가 가시적인 보상물 구실을 한다. 이런 행동-보상 시스템이 실제 교육 현장에서 일정한 교육적 의의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사탕이나 과자, 상품권 등으로 학생들의 학습 활동을 이끄는 학교와 교사들이 많다. 대체로 처음에는 학생들 반응이 괜찮지만 곧 시들해진다. 미처 예기치 못한 문제도 발생한다. 물질적인 보상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잡음이다. 보상물이 일부 학생들에게 쏠리면서 나타나는 형평성 문제가 그것이다.

결국 보상의 저울은 기울어진다.

애초 학교와 교사의 순수한(?) 의도와 달리 학생들이 학습활동 자체가 아니라 보상물에 더 눈독을 들이는 문제도 생긴다. 보상물이 뒤따르는 공부에 맛을 들인 학생들은 학습에 대한 열의나 흥미가 전반적으로 낮다. 보상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학습 동기를 가지려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심리학 교과서를 보면 보상 없는 활동에서 흥미를 가졌던 학생들이 보상 조건을 부여하자 동일한 활동이었는데도 흥미를 잃었다는 실험 사례들이 많다. 보다 근본적으로 상당수 학생이 아예 보상물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도 제기할 수 있다.



체벌이 아닌 방식의 필요성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수업 시간에 교사와 동료 학생들을 방해하는 막무가내 ‘괴물’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학생들을 체벌이나 상·벌점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상·벌점제 폐지 반대론자들이 이 질문에 결코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체벌이나 상·벌점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나야 한다.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낄 때만, 진실로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질 때만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때 우리는 벌이나 수치심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복종을 거절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기꺼이 복종한다. (중략)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러는 것처럼 모욕과 처벌의 두려움에서 공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법을 익힌 사람들은 음울하게, 맹목적으로, 무책임하게, 스탠리 밀그램 박사의 피실험자들처럼 진실하고 자연스런 권위를 알아보는 능력도, 그 권위에 자발적으로 책임 있게 온 마음을 다해 따르는 능력도 잃어버린 것이 확실하다. 올바른 이유가 있을 때 복종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이유가 올바르지 않을 때 복종하지 않으며, 누가 스위치를 누르라고 지시하든 상관없이 고문자의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다.

– 존 홀트, 『존 홀트의 학교를 넘어서』(아침이슬, 2007) 295쪽.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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