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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 찍은 효과가 있는 건가?

조회수 2018. 3. 9. 19: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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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는 그를 보자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았다. 병가라도 내고 한 이틀 푹 쉬고 싶었지만, 회사 연수 때문에 빠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전날 링거까지 맞고 연수원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연수는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나는 숙소에서 쉬려고 서둘러 일어섰다. 그때였다.


“다들 한잔해야지?” 

대표님의 한마디에 술상이 차려졌다. 너나없이 손에 잔을 들고 일어나 “위하여!”를 외쳤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잔, 두 잔 비우다 보니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겨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벌써 창밖엔 햇살이 가득했다. 지난밤에 입은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방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술 때문에 필름이 끊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민망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이란!  쭈뼛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나를 보는 팀원들의 표정이 묘했다. 


'간밤에 실수라도 저지른 건가? 왜 다들 웃는 거지?'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돌아서서 쿡쿡 웃는 사람들의 표정에,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자리에 앉으려 하자

“어, 거기 앉으면 안 되죠. 저기 ○○ 씨 옆에 앉아야지.”라며 누군가 나를 끌고 ○○ 씨 옆에 앉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말했다.


“아휴, 술 들어가니까 엄청 대범하던데요? 언제부터 둘이 그런 사이였어요?”


그때 ○○ 씨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백 번 찍은 효과가 있는 건가?” 

환하게 웃는 그를 보자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알고 보니 지난밤, 나는 난데없이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 씨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외쳤단다.


“이 나쁜 놈아! 나도 너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곤 대자로 뻗어 코를 골며 자더란다.


당시 ○○ 씨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날 좋아한다며 쫓아다니던 중이었다. 나는 술에 취해 그런 식으로 마음을 고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역시 내게 그런 고백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술만 아니었으면, 필름만 끊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옆에 코 골며 잠든 웬수와 10년째 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술기운에 그리 싱겁게 오케이를 해 버린 덕에 우리 부부에게 술은 이제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당신은 술이 좀 들어가야 솔직해진다니까?” 

빙긋이 웃으며 내 잔에 술을 채우는 남편의 얼굴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아! 물론, 술이 들어가면 말이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김경순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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