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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이자 작가이자 대표인 딴짓 천재, 알고보니 씨엘 아빠

조회수 2020. 9. 22. 21: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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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은 귀하다
물리학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미술작가, 저자… 씨엘 아빠 이기진 교수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논문을 게재한 물리학자, 동화책・그림에세이・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책 등 10여 권의 책을 펴낸 저자, 독특한 색깔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로봇 조형물을 만들어 프랑스 아트페어에 참가한 작가, 작은 전시장의 대표,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모으는 수집가.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야기다. 그런데도 그는 걸그룹 2NE1 출신 가수 씨엘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이기진 교수는 4월 4일부터 29일까지 롯데갤러리 청량리점, 6월 1일부터 24일까지 롯데갤러리 잠실점에서 <과학자의 만물상>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전을 열고 있다. 작품전에는 그의 그림과 로봇 조형물, 수집품 등 500여 점이 전시되어 ‘이 사람의 머릿속은 어떨까?’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4월 27일에는 ‘딴짓 물리학자 이기진의 자녀교육연구실’이라는 이름으로 강연도 열었다. 강연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아이였는지, 그리고 어떤 부모가 되었는지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자리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책을 못 읽어서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충격이 너무 커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죠. 그런데 어머니는 학교를 꼭 다녀야 한다거나 공부해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으셨어요. ‘그럼 쉬었다 내년에 다시 가자’고 하셨죠. 그때 어머니가 야단쳤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거예요. 쉬었다 다른 학교로 전학한 다음에는 학교 야구팀 포수를 맡아 야구에 빠져 살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밤새워 음악을 듣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림에 빠져 미대 진학을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재수해서 대학에 진학했지만 전공 공부에 매진하기보다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섭렵하고, 미술 동아리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사진을 보면 완전 피카소 같아요. 그러다 F학점을 받고 군대에 갔죠. 복학한 이후에야 ‘이제부터 공부해볼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막상 물리학 공부를 제대로 해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물리학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찡찡거리지 말고 쿨하고 재미있게!

이 교수의 강연을 듣다 보면 씨엘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강렬한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강연장을 찾은 학부모들에게 이런저런 당부의 말을 했다. 이런 식이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에 무모하게 도전해왔기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저지른 다음, 열심히 뒤처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물이 쌓였습니다. 책을 내고, 그림을 그리고, 로봇 조형물을 만들고, 전시장을 만든 게 모두 사소한 도전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새롭게 도전할 때마다 힘들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었습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두 딸에게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해보라고 했습니다. 공부를 해야 하니 나중으로 미루라고 하지 않았어요. 대신 어설프게 하지 말고 끝을 볼 정도로 열심히 하라고 했죠. ‘찡찡거리지 말고 쿨하고 재미있게 도전하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합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되 강요하지는 마세요. 함께 있는 동안 재미있는 추억을 많이 쌓으세요. 나중에는 돈을 줘도 갖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는 아르메니아와 인연이 깊다. 서강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1990년부터 2년간, 코카서스 산자락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전파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공산국가인 데다 아제르바이잔과 분쟁 중이던 아르메니아로 가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두 말렸다. 게다가 아내가 맏딸 채린(씨엘)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어머니만 ‘가고 싶으면 가야지!’라면서 여행비용까지 대주셨다. 아르메니아에서 빵을 구하려고 친구와 함께 헤매던 때, 전쟁터까지 찾아가 군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던 때를 그는 가장 따뜻했던 기억으로 떠올린다. 서강대 교수가 된 후 그는 아르메니아 유학생들을 자신의 연구에 많이 참여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 두 살이던 채린이까지 세 식구가 파리의 다락방에서 살았다. 파리 생활은 두고두고 가족의 추억이 되었다.


“세 식구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다락방이었어요. 박사후과정이라 월급도 적고 앞날을 알 수 없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죠. 그런데도 가장 쪼들렸던 그 시절이 제일 그립고 지금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2012년, 데뷔 후 힘든 시기를 보내던 채린이가 ‘아빠, 파리로 여행가자’고 했어요. 다시 한 달 동안 딸과 함께 파리에서 생활했죠.” 그때의 시간은 그림에세이 책 《꼴라쥬 파리》로 남았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책을 내게 된 것도 딸들 덕분이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일본 쓰쿠바대학과 도쿄공업대학에서 연구원과 교수로 생활하다 서강대 교수가 되면서 귀국했습니다. 채린이와 둘째 하린이가 어릴 때였죠.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겸 노트 한 권을 사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게 동화책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재울 때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었는데,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수록 더 좋아했어요. 그런 이야기로 만든 동화책입니다. 두 아이를 생각하며 ‘깍까’와 ‘꼭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죠.”


그 동화책은 프랑스어와 일본어, 영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 덕분에 잡지사나 출판사의 집필 의뢰가 이어지면서 만화와 그림을 그리고 계속 책을 내게 되었다. “따져보니 1년에 한 권씩 책을 낸 셈”이라고 말한다.


모두에게 공개한 ‘창성동 실험실’

요즘 그는 ‘하루하루의 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에 물리학 관련 그림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 있는 두 개의 사과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어떻게 될까?’ 같은 질문을 그림과 함께 올리면서 비전공자도 ‘물리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가 만든 로봇 조형물은 파리 퐁피두센터와 루브르박물관 아트숍에서 팔리고 있다.


“‘빠나나 박사와 깡통로봇’이라는 만화 칼럼을 연재하던 때, 그 깡통 캐릭터를 양철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학교 앞 철공소에 의뢰해놓고 매일 찾아갔죠. 연필로 그린 아이디어가 3차원 입체로 만들어지는 게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무엇인가에 한번 사로잡히면 앞뒤 가리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몰입합니다. 그렇게 완성한 로봇 사진을 파리의 지인이 아트페어 회장에게 보여주었더니 ‘바로 이런 작가를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합니다. ‘작가가 아니라 물리학자’라고 말하니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했대요. 아트페어가 시작되던 날, 한 남자가 180cm 크기의 분홍색 로봇 앞을 서성이더니 ‘이 로봇을 가져가고 싶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유명한 프랑스 배우 에릭 주도르였습니다. 그 배우 덕분에 제 로봇이 유명해졌죠.”


작품전에는 일본의 장인이 만든 그의 로봇 캐릭터 가방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오래된 물건을 특히 좋아한다. 이 빠진 사발, 레몬 착즙기, 주전자같이 흔한 물건들도 그에게는 수집 대상이다. “그 물건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떤 사람들이 사용했는지 추리하면서 시공간을 이동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서촌의 자그마한 한옥도 그래서 장만했다. 한국에 돌아온 때부터 낡고 오래된 한옥 단칸방에서 생활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처마 밑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온돌방에서 밥상을 펴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었다. 어렵게 장만한 한옥을 여기저기 손본 후 그는 ‘창성동 실험실’이라는 이름으로 모두에게 공개했다. 열정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공간에서 전시할 수 있게 했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의 ‘딴짓’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사실 그는 ‘마이크로파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물리학자이다. 50대가 돼서야 연구와 생활을 분리하면서 자기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여유를 가지니까 오히려 연구도 더 잘 풀렸습니다. 《네이처》에 논문도 게재할 수 있게 됐고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해야 새로운 연구결과도 나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미래를 불안해하는 청춘에게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무모하게 도전해보세요. 결국 그게 내 삶이 됩니다.”


글 jobsN 이선주 조선뉴스프레스 객원기자, 사진 김선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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