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아들에게 '팔 없어 그려줄수 없다' 말할 수 없었어요"

조회수 2020. 9. 22. 09: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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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없어도 지금이 더 행복" 의수 화백 석창우
의수 화백 석창우
감전 사고로 두 팔 잃어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2014년 3월 소치 동계 패럴림픽 폐막식. 한 남자가 조명을 받으면서 무대에 오른다. 의수(義手)가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은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의수 갈고리에 붓을 꽂는다. 세로 8m 56cm, 가로 2m 10cm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바이애슬론, 스키점프 등 올림픽 종목을 크로키(대상의 움직임을 포착해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화법)로 그려낸다. 퍼포먼스를 끝낸 그는 손 대신 양발로 도서(圖署·작품에 찍는 도장)를 찍는다.


온몸을 움직여 대형 화선지를 가득 채운 주인공은 의수 화백으로 알려진 석창우(63). 석 화백은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크로키를 합친 수묵 크로키의 창시자다.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었지만 15년 동안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해 새로운 화법을 만들었다. 국내외를 합쳐 400회 이상의 전시와 퍼포먼스에 참여해 전 세계에 수묵 크로키를 알렸다.

출처: 본인제공
석창우 화백

2만 볼트 감전 사고로 두 팔 잃어


석창우 화백은 명지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1974년 졸업 전부터 전기기술자로 일을 시작했다. 전기 시설을 관리 및 점검하는 관리자였다. 1984년 10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계를 점검하던 중 2만 2900볼트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 후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두 팔과 발가락이 타들어 가 썩고 있었다. 12번의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끝에 양팔과 발가락 두개를 잃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 두 아이의 아빠였다.


사고로 신체 일부를 잃으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석창우 화백은 달랐다. 전기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면 사고가 날수도 있는데 운이 나쁘게도 그 대상이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아내가 옆에서 간호를 잘 해준 덕분에 빨리 의수에 적응할 수 있었다. 다만 어린 자녀들에게 아무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가족에게 미안하죠. 당시 아빠로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딸과 아들에겐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했고 아내에겐 경제적 부담을 떠 넘긴 셈이죠. 그래서 지금 더 잘해주려고 합니다."

출처: 본인제공
아들에게 처음 그려준 참새 그림(좌). 작품명 '한국인의 몸짓'(우)

참새 그림으로 걷기 시작한 화가의 길


의수 생활에 적응해가던 1988년 어느 날, 네 살짜리 아들이 종이와 펜을 들고 석 화백에게 다가왔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쳐다보는 아들의 눈빛에 두 팔이 없어 그려줄 수 없다고 할 수가 없었다. 의수에 펜을 끼워 참새를 그려줬다. 그림을 본 가족들은 팔이 있는 사람보다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나도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그림을 배우러 미술학원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팔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림에 필요한 물감을 짤 손조차 없어서 그런가 싶었어요. 서예는 먹 한 가지만 사용하니 저를 받아주는 곳이 있을 것 같아 서예를 알아보러 다녔지만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던 중 가족 소개로 효봉 여태명 선생님을 만났죠. 처음엔 선생님도 거절하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만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제야 받아 주시더군요. 금방 포기할 줄 아셨나 봐요."


그때부터 밥보다 붓을 선택하면서 연습에 몰두했다. 의수 갈고리에 붓을 끼워 글씨를 썼다. 밥을 먹을 땐 붓을 빼고 포크를 끼워야 했다. 붓과는 다른 각도로 끼워야 해서 시간이 한참 걸렸다. 석 화백는 그 시간조차 아까워 연습할 때는 밥을 먹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하루 10시간씩 한 달 정도 연습했다. 그 모습을 본 여태명 교수는 석 화백을 정식 제자로 받아들였다.


1991년, 서예를 시작한 지 3년째,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기 시작했다. 전라북도 서예대전, 대한민국 서예대전 등에서 입상부터 우수상까지 수상했다.

출처: 석창우 화백 홈페이지
김연아 선수의 트리플 넛츠를 수묵 크로키로 표현한 작품(좌). 쇼트트랙 경기를 표현한 작품(우).

수묵 크로키..새로운 장르 개척


1998년 석 화백은 누드 크로키 강의를 들었다. 한눈에 반했다.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크로키는 정말 신기했어요. 의수에 붓 대신 연필을 끼우고 크로키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강아지와 사람 등 모든 움직임의 특징을 잡아 그렸습니다."


크로키가 익숙해질 때쯤 다시 붓을 끼웠다. 서양의 크로키와 동양의 서예가 만나 수묵 크로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수묵 크로키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지금까지 미국, 독일, 중국 등 해외 전시를 포함한 개인전 40여 회, 해외 초대전을 포함한 그룹전 250여 회, 퍼포먼스 180여 회 등에 참여했다.


2014년 소치 장애인올림픽 폐막식에서 다음 올림픽인 평창동계올림픽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일반 대중에게도 석 화백과 그의 작품을 알리는 계기였다. 지난 18일 폐막한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도 수묵 크로키로 무대를 꾸몄다. 패럴림픽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수묵 크로키와 평창 올림픽 슬로건 '하나 된 열정'이 적힌 흰 천이 올림픽스타디움에 걸렸다.

출처: 본인제공
수묵 크로키 퍼포먼스 중인 석창우 화백

끊임없이 도전하는 의수 화백 석창우


석 화백의 작품은 국내는 물론 미국, 독일 등 곳곳에 걸려있다. 2002년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그가 그린 세종대왕 작품이 실렸다. 작품 활동 외에도 재능기부와 강의를 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2014년 소치 패럴림픽 폐막식이라고 한다. 영상 퍼포먼스를 선보인 평창 패럴림픽 폐막식과 다르게 무대에 직접 올랐기 때문이다.


"세로 8m 56cm, 가로 2m 10cm 화선지에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엔 7~8분 정도가 시간이 있었어요. 하지만 무대 구성 중 시간이 2분 40초로 줄었습니다. 촉박한 시간이었는데 해냈어요. 뿌듯하기도 했고 칭찬에 인색한 아내가 리허설을 보고 소름 돋았다면서 칭찬해 준 무대였죠."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서체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세계 최대 규모다. 폭 46cm 길이 25m 초대형 두루마리 화선지에 쓰고 있다. 지금까지 작업한 것만 2.5km가 넘는다. 15년간 하루 10시간 이상 끊임없이 연습하는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두 팔 멀쩡한 전기 관리자로 일할 때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의수 화백으로 사는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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