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흙 만지고, 점 봐주고..시급 9000원 '꿀알바'의 정체

조회수 2020. 9. 23. 14: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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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는 아르바이트생도 산다

종강 후 한 달간 달콤한 방학을 즐겼다. 이제는 방학을 활용해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차에 학교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너 혹시 박물관에서 한 달만 알바해볼래? 시급도 9000원이 넘어.”


박물관 알바라고 하니 굉장히 생소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겨울이라 관람객이 별로 없어서 딱히 하는 일은 없고, 눈 오면 눈 치운다”는 선배의 말에 ‘이건 ’꿀알바’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 후 바로 지원서를 넣고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에서는 포토샵을 다룰 줄 아는지, 전통문화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물었다. 또 설연휴에 출근이 가능한지도 물었다.


마침 지난 학기 교양수업으로 포토샵을 수강해 자격증을 따놓았다. 역사학도 복수전공하고 있기에 면접관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설연휴엔 특별히 어딜 갈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질문까지 모두 ‘오케이’였다.


꿀알바?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박물관의 일들


먼저 일하던 선배는 근무시간 동안 너무 지루할 수 있으니 공부할 책이라도 가져오고 했다. ‘내가 이런 꿀알바를 하게 되다니…’ 신나는 마음에 토익책을 주문하고 첫 출근을 기다렸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선배도 여기서 일한 지 한 달도 안 됐다는 것이다. 2월 1일, 출근 첫날 오전까지는 정말 하는 일이 없었다.


옆자리 선생님이 인터넷이라도 하고 있으라며 컴퓨터를 켜줬다. 이 때까지만 해도 꿀알바의 향기가 솔솔 풍겼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조금 넘어서 박물관 교육실로 불려갔다. 할 일이 생겼다. 개학하면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에 단체 관람을 많이 오는데, 그때 아이들이 체험활동에 사용할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찰흙을 빚거나 틀에 찍어서 모형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찰흙을 만졌더니 새록새록 옛 기억이 떠올랐다.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었고, 손바닥만 한 도깨비 얼굴모양 틀에 찰흙을 찍어내기도 했다.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어느새 오후 3시 반이 넘었다. 슬슬 팔이 아팠고 차가운 찰흙 때문에 손이 매우 시렸다. 재미가 고통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공 책만 한 틀이 등장했다. 이 틀에 찍어내려면 찰흙 8개는 동시에 주물러야 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찰흙은 딱딱해 주무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녔다. 그렇다고 히터를 틀면 찰흙이 굳어버리기 일쑤였다. 처참하게 갈라져 이후로 두세 번 더 찍어내기도 했다.


찰흙이 덕지덕지 붙은 손을 씻고 오후 5시에 퇴근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벽장에 가득 차있던 찰흙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보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날 잔뜩 쌓여 있는 찰흙 더미에 가벼워진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아침이라 더 추워서 그런지 찰흙이 유독 딱딱하고 차가웠다. 오후엔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자기 물감으로 하얀 컵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체험활동에 앞서 우리가 직접 체험해보고 시간이나 난이도가 어느 정도인지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물감이 생각보다 빠르게 말라 체험시간은 한 시간 정도로 예상한다” 혹은 “컵이 무겁고 도안이 생각보다 복잡해 학생보단 성인체험용으로 더 적합하다” 등의 의견을 나눴다.


이 외에도 가면 만들기나 직업체험용 프로그램과 같은 박물관에 준비된 다양한 체험활동을 알바가 직접 해보며 관람객의 입장에서 이것이 재미있고 유익한지를 직접 시험해봤다.


팔자에도 없는 ‘점쟁이’ 노릇을 하다


설 연휴가 시작되자 박물관 관람객이 늘었다. 가족 단위로 많이 찾아왔다. 우리 박물관은 설날 이벤트로 관람객들에게 ‘윷점’을 봐주고 점괘를 써주는 행사를 기획했다. 윷점은 윷을 세 번 던져서 한해 운세를 점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세 번 던져 모두 도가 나오면 ‘아견자모’(兒見慈母·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만나다) ‘도도개’가 나오면 ’서입창중’(鼠入倉中·쥐가 창고에 든다는 뜻으로 집안의 재물이 조금씩 빠져나갈 징조) 이런 식으로 결과에 해당하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그러면 이 사자성어의 뜻을 풀이해서 한 해의 운세로 점치는 방식이다. 아견자모는 어려운 일에서 벗어나 행복한 일이 생길 징조로 풀이할 수 있고, 서입창중은 집안의 재물이 조금씩 빠져나간다는 다소 나쁜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신나게 윷을 던졌는데 결과가 안 좋게 나왔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점괘를 기다리던 아이를 실망시킬 수 없어 옆에 준비된 팽이치기 부스로 보내놓곤 얼른 좋은 말로 바꿔 써줬다.


“엄마,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나왔어요!” 아이는 엽서를 받아 들고 신나게 부모에게 뛰어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중년부부와 부인의 어머니로 보이는 가족도 찾아왔다. 남편과 친정어머니가 윷점을 봤다. 두 사람 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 부인은 “새해부터 좋은 기운 받아가는 것 같아 고맙다”며 복채로 만원을 주고 갔다.


계속 사양했지만 끝내 내 손에 만원을 쥐여줬다. 이 돈은 박물관 안에 있는 카페에 맡겨 놓고 알바생들이 커피 마시고 싶을 때 같이 쓰기로 했다.


비록 ‘꿀알바’는 아니지만, 경험의 폭을 넓히다

2월 1일부터 한 달을 근무하면서 생각보다 다양한 일을 했다. 처음 면접 때 포토샵을 물어 본 건 행사에 쓰일 포스터나 배너 제작 때문이었다. 또 그 행사의 이름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알바생 4명은 근무시간의 절반 이상을 초등학생들이 박물관에 오면 무슨 체험활동을 해야 즐거워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직접 준비해 체험해보고 평가하는 일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체험활동 교구제작도 직접 하고 어린이 관람객이 오면 활동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의 다섯 가지 이상의 직무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게다가 그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지역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공부하고 교양을 쌓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 행사기획 등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 그리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박물관 단기 아르바이트에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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