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보다 더 인기많은 '조연' 임현식에게 배우란?

조회수 2020. 9. 25. 22: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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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 극 중 상황에 맞는 '딱 한 줄' "
조연의 품격, 애드리브의 달인 배우 임현식

배우 임현식(71)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셀 수 없이 많다.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어설픈 생계형 잡범, 무려 7년을 연기한 순돌이 아빠(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능청스러운 애드리브의 병부잡이 임오근(드라마 〈허준〉), 갈 곳 없던 장금이를 받아준 수라간 남자숙수 강덕구(드라마 〈대장금〉)까지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고 엉뚱하며 뻔뻔하기까지 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주연을 빛나게 하는, 주연보다 더 인기 많은 조연으로 사랑받아 왔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송추계곡 근처)에 한옥을 지었지만 여전히 서울을 바라보며 캐스팅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집을 찾아갔다.


“요즘 노인네가 볼 프로그램이 없잖아. 예능 계통으로 나오는 애들이 반복적으로 일주일 내내 5~6개 프로(그램)씩은 하는 모양이야. 60 넘어 퇴직해서 2~3년 지나봐요. 진짜 별 볼 일 없어져. 손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볼 수 있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없어요. 요즘 노인네들 다닐 수 있는 곳이 지하철밖에 없다잖아. 그런 사람 위한 프로를 했으면 좋겠어.”


임현식은 대학 시절인 1966년 연극무대에 처음 올랐고 1969년 MBC 1기 공채 탤런트가 되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다. 연기경력이 햇수로 따지면 50년이 넘는다. “주로 TV 드라마 연기를 했는데 언제나 극 중 역할과 함께 살았어요. 매주 대본이 나오면 ‘이런 식으로 연기해야지’ 하면서 살았어. 자동차 안에서나 길을 걸을 때도 연기 생각을 했어.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연기했어. 그래도 기가 막히게 연기를 해냈다고.”


임현식의 애드리브 연기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다. 독특한 개성이 없으면 나올 수 없다. 너무 튀어서도 곤란하다. “애드리브? 극 중 상황에 맞는 ‘딱 한 줄’이 생각날 때 하는 거지. 재미있고 상대가 당황하지 않아야 해. 당황하면 NG지 뭐. 애드리브를 할 때 감독 입에서 OK가 안 나오면 썰렁한 거지. 입속에 침이 도는 것처럼 해보는데, 선택이 안 되고 (감독이) ‘있는 대로나 잘합시다’ 그러면 섭섭하지.


고(故) 김종학 감독이 내 애드리브를 무지 좋아했어요. 내 대본에 빨간 볼펜으로 수정한 흔적이 있으면 좋아했지. 대본이 깨끗하면 ‘형! 어제 술 먹었구먼’ 그래. 이병훈 감독도 날 그렇게 좋아했어. 내가 애드리브를 하면 다 하게 했어. 그래서 드라마 〈허준〉에서 병부잡이 임오근이란 역할도 만들어 낼 수 있었어.”


― 임오근 대사 중 상당 부분이 애드리브인 거죠.

“많이 했지. 이병훈이 어떤 감독입니까. 철저한 감독인데 임오근 역할에 재미를 주려고 무지하게 애썼어.”

― 허준은 시종 진지하지만 임오근은 극 중 긴장을 푸는 역할이지요.

“사실 임오근의 수명은 허준이 궁궐에 들어가면서 끝이야. 원래 대본에 그렇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내의원 시험에서 허준더러 ‘답안지를 쓸 때 겨드랑이를 들고 써주게’ 해서 커닝을 통해 궁에 들어간 거지. 말이 돼요, 그게? 하하하.”


― 대본엔 임오근이 내의원에 들어갈 운명이 아니었던 거네요.

“원래는 없었지. 진지하게 살아가는 허준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아니, 균형미까지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역할 비중이) 괜찮았어.”


― 주연 연기와 조연 연기의 차이가 있나요.

“주인공은 프로그램을 지켜나가는 주춧돌 같은 존재지. 정글이나 뻘밭(개펄)을 헤쳐 나가는 힘이 있어야 하고 또 배우로서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해야지. 반면 조연은 주연을 뒷받침하면서 반전의 브리지(bridge)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 시청자(관객)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들고 ‘저렇게 되려고 이렇게 했구나’ 하는 느낌도 주면서 극을 죽 끌고 나가는 존재지.” 

임현식은 “미니시리즈나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주인공을 하긴 했지만, 주연이든 조연이든 내 역할에 대해 ‘출연료 아깝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현식, 뭐 필요 있겠어?’ 하는 작품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살아오면서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보다 제값 못하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게 더 무섭다는 신념으로 살았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하지만 쉽게, 잘 만들어진 인절미처럼 먹기 좋게’라는 의미처럼 시청자들 앞에 서려고 애썼지요.”


― 후배 배우를 볼 때, ‘싹수 있는’ 배우의 특징은.

“자기가 연기를 잘하고 인기가 있으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싸가지 없는’ 친구 중에 잘된 배우는 없어요. 잘되고도 망한 배우 많잖아. 배우는 캐스팅을 잘 받아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아. 물론 연기도 잘해야겠지. 이 계통에서 캐스팅을 잘 받으려면 우선 인간이 돼야 해. 겸손하고 붙임성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대학 시절에는 일주일에 희곡 한 편씩은 꼭 읽었거든. 1년이면 40~50편씩을 읽었어. 지루하고 어려운 희곡집도 계속 읽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져요. 배우는 아는 게 진짜 많아야 해. 그래야만 (연기를) 풀어낼 수 있는 순발력이 생겨요. 대충 눈치로 하면 비겁한 것밖에 안 되고, 남의 것 모방하는 것밖에 안 돼.”


이 대목에서 배우 임현식의 연기철학이 묻어 나왔다. “배우는 새로운 것을 빨리 섭렵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성품도 좋아야 하고 눈치도 빨라야 해요. ‘이런 상황에선 저런 것은 피해야 하는구나’, ‘저 감독은 이런 성격이네. 그러니 이렇게 해야겠네’ 하고 말이지. 그래야 캐스팅이 잘돼. 조금이라도 싸가지가 없이 행동하거나 자기보다 덜 유명한 배우를 하찮게 여기면 안 돼.


사랑이라는 것도 우러나서 하는 것도 있지만 연습을 통해 되는 것도 있어. 옛날 국립극장 연습실 벽에 ‘먼저 인간이 돼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어. 당시엔 아주 책임감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게 맞는 말이었어. 그 말이 나를 사람 냄새 맡을 줄 아는 배우로 만들었어요.”


“《셜록 홈스》를 읽고 자극받곤 했어” 

배우 임현식은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다. 전북 순창에서 자라나 전라도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64년 광주 살레시오고를 졸업한 뒤 1년 재수를 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학창시절 끼가 있었어. 도처에 파벌이 있었지만 이쪽하고 친하고, 저쪽에서도 어울렸어. 남달랐다면 독서를 좋아해서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며 ‘아, 이럴 땐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각색도 했어요. 어떨 때는 그런 상상을 하며 잠을 설쳤어. 탐정소설인 《셜록 홈스》를 읽고 자극받곤 했어. 홈스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고 최소한 왓슨 같은 조연 연기를 해도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하하하.”


― 재수를 해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갔다지요.

“막상 연영과에 갔지만 제대로 된 교재가 있나, 배울 게 없었어. 그때 연기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고 러시아 출신 연출가인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i·1863~1938)의 책을

일본에서 구해 번역해 읽었어. 어머니(고 배안순)가 스타니슬랍스키 일본판 이론서를 1년간 번역하셔서 내 책꽂이에 꽂아주셨어. 어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소학교 교사여서 일본어에 능하셨거든.”


어머니가 번역한 원고를 등사기로 프린트해서 친구들과 나눠 읽었다. 배울 것이 없었고 가르치는 사람도 시원찮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나에 대해 기대가 컸고 헌신적이셨어. 나 하나를 낳으시고… 아버지(고 임병하)는 6·25 당시 기자셨어. 일본 니혼대 정치학과를 나온 지식인이셨고. 8년간 기자생활을 하시다가 어머니와 스물일곱 때 결혼하셨어. 내가 여섯 살 때 6·25가 발발했는데 동료 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러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어.


어머니는 일주일 후 돌아온다던 사람이 안 오니까, 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평생의 역할이었어. 마치 소녀처럼 스물아홉부터 수절하셨지.”임현식은 1969년 MBC 1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뽑혔지만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무명 연기자로 지내다 생활고 해결을 위해 양주 장흥면으로 이사를 했다. “젊었을 때 나도 잘생겼었어.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볼 때 7차까지 시험을 쳤는데, 마지막 관문이 사장 면접이야. 사장이 내게 그래요. ‘얼굴이 밋밋하지 않아?’ 하고. 사실 그렇게 평범했어요.


배우는 주연 같은 ‘이도령 과(科)’가 있고 조연 같은 ‘방자 과’가 있다고 생각해. 기왕에 탤런트가 됐으니 이도령 같은 주인공이 되길 바랐지.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탤런트에 합격하기 전까지 나를 사람으로 안 봤어. ‘저거는 큰아버지 계신 순창으로 내려가 정미소 일이나 하지, 배우가 뭐냐’ 그랬어. 몇 년간 무명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물론 나도 ‘이도령’ 같은 주인공 연기를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 표준말로 대사를 또박또박 말하고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할 수는 있지만 매력이 없었을 거야. 그러나 방자(조연) 역할로 선회하면서 내 끼를 발휘할 수 있었어.”


어머니는 내가 주인공이길 바랐지만… 

― 이도령 대신 방자 역할을 잘 택했네요.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연기를 못 했을 겁니다. 누가 뽑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 어머니는 아들이 방자 역할을 하는 데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어머니는 내게 ‘의젓하고 차분하게 (연기)하라’고 하셨어. 목소리도 착 내려 깔고 중후하게 하라셨어요. 어쩌면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내게서 ‘방자’가 아닌 ‘이도령’이나 ‘신성일’을 기대하셨는지 몰라요. 당시 그렇게 인기 있던 〈허준〉을 보시면서도 ‘저런 걸 보고, 뭘 잘했다고 사람들이 상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어. 하하하.”


그는 어머니 얘기에 신이 났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어머니도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좋아하시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몇 번이나 보셨는지 몰라. 오전 10시에 영화관에 들어가 밤 10시에 나오셨던 분이니까.”


― 우리 아들은 그래도 〈허준〉의 주인공인 전광열쯤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아마 전광열처럼 주인공을 해야 우리 어머니, ‘광열이 때문에 우리 아들 밥 해주러 다니느라고 힘이 드네’라고 했을 것인데 하하하. 모임에 나가서 어느 분이 내 연기를 칭찬하면 ‘무엇이 그게 잘하는 것인가?’ 그러셨대.”


― 아들에 대해 기대가 너무 높으셨든지, 일부러 그러셨든지….

“그런데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할 때 내 역할을 진지하게 보셨어. 나의 개방적인 연기가 어머니가 보시기에 불안하고 싫게 보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현식이는 철학이 있네’ 그랬어. 그러고 보니 〈한지붕 세가족〉을 7년간 했는데, 그땐 어떻게 해야 남들과 다른 연기를 할까 고민하던 시절이었어. 그것이 지금의 캐릭터를 찾고 살에 살을 붙이고 (캐릭터를) 구상해 나갈 수 있게 했어. 나의 연기방식을 키워나가는 데 자신감을 갖게 한 거지.”


― 어떤 배우로 기억되길 바라세요.

“동네에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바람처럼 지나가는 아저씨로 기억해 주면 좋겠어. 오래 기억 안 해줘도 괜찮아. 한 시대를 이웃들과 함께 웃고 함께 살았다는 것만 기억해 주면 좋지. 사람이 싸가지 없게, 아는 척도 안 하고 사는 분들이 많잖아. 하하하.”


글·사진 jobsN 김태완 조선뉴스프레스 기자·시인, 사진제공 임현식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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