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오~' 국악소녀에서 '국악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조회수 2020. 9. 22. 15: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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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N Heritage ⑤] 국악신동 송소희의 직업 국악인으로 살아남기
16년차 베테랑 국악인
KBS 전국노래자랑·KT 광고 출연으로 인기
어렵고 낯선 국악 문턱 낮추는 스타 국악인

"아니라오~ 다 되는 건 아니라오~"


2013년 이동통신사 KT 광고에 앳된 소녀가 등장했다. 고운 한복을 입은 소녀가 카랑카랑하고 탁 트인 목소리로 민요 가락을 부르는 모습은 신선했다.


SBS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에 '국악 신동'으로 출연해 이름을 알린 송소희(20)씨는 이 광고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루 5~6개씩 공연 섭외가 들어왔고 예능에서도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친근한 모습으로 ‘고리타분하다’는 국악에 대한 편견을 깼다.

출처: jobsN
송소희씨. 편의점 GS25 추석 카탈로그 지면 촬영현장에서.

그간 방송 활동이 뜸했던 송씨는 2016년 단국대 국악과에 입학했다. 학교 공부를 우선으로 하면서 국악 공연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한 달2~3회, 방학 때는 5~6회 공연을 한다.


"중·고등학생 때도 학기 중에는 일정을 잘 잡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학에 오니 국악을 사랑하고 치열하게 연습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저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기분 좋은 경각심이 듭니다."


최근에는 ‘기진맥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기진맥진(氣盡脈盡)이 아니라 ‘기운을 더하여 맥박이 오른다’는 ‘기진맥진(氣進脈進)’이다. 국악, 대중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다. 잡스엔(jobsN)이 국악의 문 턱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송씨를 만났다. 국악인으로서의 삶과 고민을 들었다. 

국악에 가슴 뛰기 시작한 건 사춘기 지나서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송씨는 어릴 적부터 그림, 피아노, 바이올린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경험했다. 식당을 운영했던 어머니와 신문지국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딸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시켜주고 싶었다. 국악은 다섯 살때 집 근처 국악원에서 처음 접했다. 당시 국악학원장 박석순씨는 송씨를 두고 “재능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국악을 가장 진득하니 했다고요.

“드라마처럼 ‘국악 소리에 이끌려 갔다’거나 ‘국악소리를 듣고 울음을 그치더라’ 이런 건 아니에요. 이것저것 배워봤는데 국악을 가장 진득하게 했어요. 보통 수업시간에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딴짓도 하고 그러는데 저는 가만히 있었다고 해요.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고 하고요.”


지금 송씨가 하는 소리는 ‘경기소리’다. 판소리와 다르다. 판소리는 굵은 소리가 많고 소리꾼 말고도 북치는 고수와 함께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경기민요는 고수가 없고 소리가 깨끗하고 경쾌하다. ‘아리랑’, ‘창부타령’, ‘군밤타령’이 대표적이다. 송씨는 국악 명창 이호연(경기민요 전수교육조교), 강효주(경기민요 이수자)씨 밑에서 경기민요를 배웠다.


“수업이 끝나면 소리를 배우러 가고 새벽까지 졸음을 참아가면서 연습했어요. 방학에는 항상 선생님들과 합숙훈련을 했습니다. 산속에서 선생님이 ‘폭포소리를 이겨봐라’라고 해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도 나구요. 힘들긴 했는데 재밌어서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송씨는 2004년 KBS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인기상을 받았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일곱살 어린이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국악을 불렀다. 4년 뒤 같은 프로에 다시 출연해 최우수상, 연말 결선에서 대상을 받았다. 38년 역사상 최연소였다. 이후 SBS ‘스타킹’, KBS ‘윤도현 러브레터’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이 무렵부터 방송, 공연 섭외가 쏟아졌다. 

KBS 해피투게더 영상 캡처

-어린나이에 유명해졌어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본다는 게 마냥 신기했어요. 어딜 가나 좋아해 주시고 궁금해하셨으니까요.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밌는데 사람들이 환호까지 해주니 정말 좋았죠.”


-어릴 적부터 꿈은 당연히 ‘국악인’이었겠네요.

“네. 누가 꿈을 물으면 ‘무형문화재’라고 답했어요.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죠. 그때까지만 해도 국악을 ‘가슴이 뛰어서’ 하진 않았어요. ‘어릴 적부터 했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컸어요. 하지만 사춘기 들어 국악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서는 '국악을 해야 가슴이 뛴다'는 걸 알았죠. 국악을 저만 알기에 아까웠어요.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즐겼으면 했습니다.”


-다른 길을 생각해봤다는 뜻인가요.

“아뇨,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다만 ‘내 길이 맞나’, ‘내가 정말 이 길을 가도 되나’싶었어요. ‘내가 희망을 갖고 한들, 사람들이 과연 알아줄까’하는 고민이었죠.”


중학생 때부터 진로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송씨의 부모님은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송씨는 “부모님은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고를 때도 제가 판단해 행동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며 “모든 일에 책임감이 있었고 ‘진짜 좋아하는 게 뭘까’하는 고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출처: KT광고 영상 캡처
2013년 출연해 KT 광고.

송씨는 국악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소리를 한 ‘본능’이나 ‘재능’만으로 부족하다 생각했다. “제가 설익은 상태에서 뭔가를 자꾸 시도하면 정체성 없는 음악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한국 전통 음계나 선율 말고도 팝이나 가요도 들었다. 서양 음계와 선율을 공부하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 음악을 국악과 접목한다면 사람들이 국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송씨는 국악고나 예고가 아닌 인문계고에 진학했다. 공부를 '국악'으로 한정짓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공부를 하며 그 속에서 국악을 바라보고 싶었다. "과학이랑 한국사를 좋아했어요. 특히 제가 국악인이다 보니, 한국사가 정서적으로 도움이 됐어요."


고3때는 1년 동안 자신의 이름을 건 ‘송소희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보컬 송씨를 중심으로 건반, 드럼, 일렉기타, 베이스, 해금, 대금 연주자들이 모였다. 송씨는 어떤 국악에 어떤 현대 음악을 접목해야 어울릴지 멤버들과 고민했다. 

출처: 송소희씨 인스타그램
송씨는 되도록 수업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스타 국악인’의 의무감 

송씨는 인문계고를 나와 대학에 들어와서야 ‘국악'을 전공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다. “같은 꿈을 갖고 있는 친구들과 공부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안 좋죠.”

국악은 아직까진 비주류다. 국악 전공자 대다수는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다. 국악계를 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국악인은 과거 신영희 명창이 있었고, 지금은 송소희씨나 남상일씨 정도다.


-보통 국악 전공자는 어떤 일을 하나요.

“크게 국악 전공자를 악기 연주나와 소리 하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졸업 후 연주단이나 소리 단체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는 방법이 있어요. 또는 밴드나 국악단을 자체적으로 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굉장히 불안정해요.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지만 돈을 벌기 쉽지 않죠. 연주단은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지만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국악인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기 때문이죠.”


-송소희씨나 다른 스타 국악인들이 많이 노력했지만 아직도 국악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성악곡은 가사가 어렵고, 기악곡은 한박자 느려 어렵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이유가 전부는 아니예요. 본질을 지키면서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출처: 송소희씨 인스타그램

-직업적으로는 가장 성공했다고 볼 수 있죠?

“국악 자체만으로는 아직 멀었어요. 음원 수입은 거의 없고 공연 수입이 90% 이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저희 4인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 회사 직원을 먹여살릴 정도는 됩니다. 예술하면서 돈을 번다는 건 예술인의 꿈이에요. 자기표현도 하고 생계를 꾸리는 건 예술계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이전에 국악무대라면 관객들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관객들은 송씨가 부르는 국악을 듣기 위해 표를 예매한다.


송씨는 웬만한 아이돌 가수만큼의 파급력을 갖고 있다. 송씨는 정부기관이나 지역 행사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대한적십자 RCY, 행정자치부 마을기업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충북 '청원 생명쌀'을 홍보하기 위한 사인회에서는 2시간 만에 8500만원어치 쌀이 팔린 적도 있다.


-스타성, 대중성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는데요.

“관심의 첫 단계는 ‘호기심’이라 생각해요. 비주류 예술 장르에 호기심을 끌려면 어떤 대상이 필요해요. 저나 남상일 선생님이 그런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국악을 듣기에는 거부감이 들 수 있으니 저희라는 ‘매개체’로 먼저 다가갈 수 있어요. 제게 호기심이 생기면 그 뒤에 있는 음악에 호기심이 생길 테니까요. 매개체를 억지로 만들기보다 흐름도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매개체가 된 것이고요.”


-운이 좋았다는 말이네요.

“저는 운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재능도 중요하지만, 제가 특출나서 이름이 알려진 건 아니에요. 예술계에서는 운이 중요해요. 그래서 제 역할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저 때문에 국악을 한번이라도 더 돌아봐주는 분들이 있으니 좋아요."


-'국악'에 대한 문턱을 낮추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보나요?

“앞으로 국악인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많이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출처: SH파운데이션 제공

한계 없는 국악을 위해  

-국악을 아예 모르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OST부터 들어보세요. 국악보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음악이 많아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저는 드라마 ‘추노’의 OST를 추천해요. 그래도 좀 어렵다 싶으시면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이 함께 있는 영상을 보세요. 서서히 국악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기진맥진 프로젝트'는 송씨가 직접 음악가에게 협업을 제안하고 아이디어를 낸다. 음원을 발표하진 않는다. “영상으로 사람들이 서서히 국악에 스며들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또 제게는 다른 음악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4월에는 ‘두번째 달’과 함께했고 8월 15일 공개한 영상에서는 아쟁 연주자 이태백씨와 함께 했다. 이씨는 송씨가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때 머뭇거렸다고 한다. “저는 경기소리를 하고 아쟁은 남도 소리 대표 악기입니다. 지금껏 경기소리와 남도 악기인 아쟁이 함께 한 적이 없어요. 선생님께서 첫 합주를 하기 직전까지 걱정하셨어요. 자칫 설익은 음악을 했다간 선생님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으니 악착같이 했습니다. 만족스럽게 두 소리가 잘 어울렸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국악은?

“’퓨전국악’이라는 말도 한계를 두는 것 같아요. 전통 국악 작업도 많이 하고 있어요. 장구 하나만 놓고도 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와 협업하면서 역동적으로 할 수도 있죠. 다른 음악, 아티스트와 한계를 두지 않고 재미있게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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