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 잃고 수술만 21번, "그래도 군인으로 남을 것"

조회수 2020. 9. 22. 11: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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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고 상처 받은 군인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병원서 두번째 군 생활 시작 "다친 동료들 도울 것"
두 다리 잃고 의족 달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사람
쉽게 좌절 안해, 어려운 일 닥쳐도 '할 수 있다' 마음 생겨

"다치고 상처 받은 군인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하재헌 중사는 국군수도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군인이다.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해 보상 신청 등을 대신해주는 일을 한다. 2014년 7월부터 1년간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그는 국군수도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긴지 약 1년이 지났다.


"가끔 야전 생활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다시 야전 생활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하 중사는 2015년 8월 북한군의 목함 지뢰 도발로 두 다리를 잃었다. 오른쪽 다리는 무릎 위,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 정강이 부분을 절단했다. 당시 그는 22살의 하사였다. 동부산대학교 부사관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최전방 비무장지대 DMZ 수색대대에서 일한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출처: 하 중사 페이스북 캡처
하재헌 중사 모습.

수술만 21번을 받았다. 그중 19번은 전신마취 수술이었다. 보통 평생 1~2번도 하기 힘든 수술이다. 수술과 재활에만 1년이 걸렸다. 끔찍한 충격과 기억 때문에 다른 삶을 고민해봤을만도 하지만 그는 다시 군복을 입었다. 2016년 7월, 국군수도병원 근무를 자청했다.


"다리가 불편해서 예전처럼 야전 생활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제가 동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병원에는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병원서 두번째 군 생활 시작 "다친 동료들 도울 것"

-어떤 일을하십니까?


"원무과에서 부상병들에 대한 보상 업무 신청을 하고 있습니다. 복무 중에 다치는 군인이 많습니다. 심각한 경우 군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인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은 의무조사를 받고 이른바 '의병전역'을 하는데 국가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보상 신청을 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혹 사고로 목숨을 잃으시는 분들이 있으면 유가족에게 급여 등에 대해서도 알려 드립니다."


2012~2015년까지 연 평균 105명이 군복무 중 사망했다. 부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지 않은 숫자다. 그는 부상병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 격려와 위로도 한다. 업무는 아니지만 자기가 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그는 2016년 7월, 병원에 배치를 받았을때 지뢰 폭발로 한쪽 다리를 잃은 군인을 만났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친구 부모님이 많이 당황해하셨습니다. 제가 가서 위로해 드렸는데 나중에 '그때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하셨습니다.” 장애인이 될 아들을 상상하며 걱정하던 젊은 군인의 부모가, 두 다리를 잃고도 꿋꿋히 생활하는 하 중사의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 말보다 앞에 선 하 중사의 모습에서 더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있습니까


"고향이 부산입니다. 이곳에서 53사단 군인들이 총을 들고 훈련하는 것을 종종 봤습니다. 어렸을 때는 군인이 전투복을 입은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크면서 생각해보니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게 정말 멋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 대학에 가는 대신 군인이 되는 빠른 길을 선택했다. 동부산대학교 부사관학과에 들어갔다. 그는 군 장학생으로 선발돼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다.   

출처: 하 중사 페이스북 캡처
하 중사가 의족을 착용하고 재활훈련하던 모습. 페이스북에는 의족을 '누구보다 강한 내 다리'라고 표현했다.

두 다리 잃고 의족 생활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사람

-군인으로 처음 한 일은 무엇입니까


"1사단에서 DMZ 수색대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비무장지대에 들아가 북한군 침투 흔적을 조사하고, 매복 작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야전 생활은 약 1년만에 끝이 났다. 2015년 여름 "문을 열고 한 발 내딛었는데, 엄청난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가 폭발했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 했다.


하 중사가 말한 '문'은 철책 통문을 가리킨다. 남북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400여미터 떨어져 있다. 수색대원들은 이 문을 통해 비무장지대 안을 드나들며 수색한다. 하 중사는 당시 수색대원 8명 중 한명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한발 내딛는 순간 지뢰가 폭발했다"고 말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서부터 다리 아래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있던 김정원 중사가 부상당한 그를 부축했다. 이 과정에서 김 중사도 지뢰를 밟아 오른쪽 발목이 절단되는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다. 하 중사는 김 중사 다리를 빼앗아간 지뢰 파편에 다시 한 번 부상 당했다. "많은 분들이 제가 다리만 다친줄 아시는데, 지뢰 파편이 엉덩이에 박힌 부상이 더 컸습니다."


다행히 대응이 빨랐다. 부상 후 1차 응급조치, DMZ 밖에서 두번째 응급조치를 하는 동안 군 헬리콥터가 왔다. 하 중사가 부상을 입은 순간부터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되기까지 45분이 걸렸다. 사고 현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거리는 약 100여km. 구불구불한 도로를 차로 달린다면 2시간은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곁에 계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일이죠. 저 같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1시간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살아 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란 설명이다. 

쉽게 좌절 안해, 어려운 일 닥쳐도 '할 수 있다' 마음 생겨

-목발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의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재활을 처음 시작할때부터 목발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목발에 의존하면 습관이 되고 의족을 사용하기 불편해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목발 없이 하는 재활 훈련이 쉽지는 않았다.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두 다리로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을만큼 적응했다. "그래도 진짜 다리보다는 못합니다. 막대기를 세워놓고 그 위에 올라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는 사고 전후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고 말했다.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게 됐습니다. 힘들거나 어려운일이 닥쳐도 '할 수 있다', '별 것 아니다'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만 이유 없이 군인을 비하하는 말들을 들으면 안타깝다고 했다.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일을 보람과 긍지로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 이유 없이 '군인XX' 라거나 '군○○'라는 비하발언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하 중사 홈페이지 캡처
하 중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사고 전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사고 후 의족을 착용하고 걷는 모(오른쪽).

그는 2017년 6월 6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 62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 오른편에 섰다. 전투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은 하 중사는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해보였지만, 의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날 현충원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습니다. 나라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선배님들이 묻혀 계신 곳 아닙니까. 군인으로서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경스럽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생각은 할 틈도 없었습니다.”


-계획이 있습니까?


“가능하다면 만기 전역을 할 생각입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군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기회가 되면 의료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보병병과에서 의무병과로 왔는데, 이쪽에 아는 지식이 많지 않습니다. 위급할 때에는 전우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것 처럼요. 조금이나마 동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군인이 되겠습니다."


글 jobsN 이병희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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