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매일 시체 보는 남자 "'피' 보면서 8년 내내 죽어라 노력해.."

조회수 2020. 9. 18. 11:51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검시 조사관, 과학수사 자주화를 위한 무기 루미놀 개발
8년의 집념으로 세계 최고 수준 루미놀 개발
특허 소유권 국가에 양도…"혼자만의 성과 아닙니다"
매일 1구씩 시체 보는 게 일, 아직도 먹먹할 때 있어

“여기 혈흔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종종 사건·사고 현장에 ‘과학수사대’가 출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신발에는 덧신까지 착용한 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현장 증거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과학 수사대가 분무기에 담긴 ‘루미놀’을 뿌리면 잠시 후 푸른 형광빛이 나타난다. ‘루미놀’이 ‘혈액’에 반응하면 나오는 빛이다. 루미놀은 우리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만큼 적은 양의 피도 찾아낸다.


혈액에서는 DNA를 채취할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용의자를 찾아내는 중요한 자료다. 또 핏자국이 바닥이나 벽에 어떻게 나 있는지에 따라 사건·사고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루미놀은 과학수사대가 범죄와 싸우는 강력한 무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은 루미놀을 전량 수입했다. 500㎖에 7만원 정도 하는 값비싼 시약이었지만, 기술 부족으로 자체 생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내 한 검시 조사관의 집념으로 우리나라도 루미놀을 직접 만들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가격은 10%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과학수사 자주화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 주역은 경남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서 근무하는 임승 사무관이다.   

출처: 임 사무관 제공
실험실에서 일하는 임승 사무관 모습.

8년의 집념, 세계 최고 수준의 '루미놀' 개발

-‘신 루미놀(가칭)’을 개발한 계기가 있습니까


“예전에는 특별했던 과학수사가 이제는 보편적인 수사 기법이 됐습니다. 피에서 DNA를 채취하는 건 기본입니다. 그런데 전량 수입해 쓰고 있더군요. ‘이 정도는 직접 개발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발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습니까


“2009년에 시작했으니 8년 가까이 됐습니다.”


-어려웠습니까


“연구하는 게 본업이 아니었습니다. 퇴근시간 이후나 당직을 서며 시간 날 때 짬짬이 연구했습니다. 연구비가 따로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실험실에 시약이 있을 때만 조금씩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시약을 만들고도 효과가 있는지 검증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검증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서만 할 수 있다. 신 루미놀 개발은 임 사무관의 개인적인 연구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의뢰할 수가 없었다. “국과수 직원분께 부탁을 드리면 자기 시간을 쪼개서 해주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번 결과를 얻어내는 데 몇 개월씩 걸렸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실험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A시약을 더 넣고, B시약은 덜 넣는 간단한 실험’도 결과를 받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연구하다 모르는 게 생기면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다. “혼자서 논문 찾아보고 알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성능이 좋은 ‘루미놀’로 인정받으려면 미세한 양의 혈액과 반응해도 선명한 푸른빛을 내야 한다. 그래야 쉽게 빗자국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핏속에 남아있는 DNA를 파괴하면 안 된다. 푸른빛을 내는 시약을 많이 사용하면 DNA를 망가뜨릴 위험이 있고, 반대로 DNA를 보존하는데 신경 쓰면 루미놀이 피와 반응하지 못한다. 

출처: 임 사무관 제공
사건현장에서 임승 사무관이 과학수사계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특허 소유권 국가에 양도…"혼자만의 성과 아닙니다"

현재 거의 모든 나라에서 ‘블루스타’라는 이름의 루미놀을 사용한다. 블루스타는 네덜란드 Sirchie Finger Print Laboratories 사에서 개발한 제품이다.


임 사무관은 "블루스타가 제일 효과가 좋은 시약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짧은 게 단점이다. 미리 만들어 놓으면 채 이틀을 보관할 수 없다. 루미놀은 알약 형태로 필요한 만큼만 물에 녹여서 사용하는데 이때 유통기한이 최대 이틀이라는 뜻이다.


반면 임 사무관이 개발한 신 루미놀은 유통기한이 일주일이다.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관실은 지난 6월 1일 직무발명 심의위원회를 열고 이르면 하반기부터 신 루미놀을 수사에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허도 진행 중입니까


“출원 단계입니다. 정식 등록 과정도 밟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국유 특허로 돌렸습니다. 개발은 제가 했지만 소유권은 국가에 양도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공무원이잖아요, 연구과정에서 국가 장비나 시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국과수에 계시는 박사님들도 고생하셨는데 제가 특허를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처: 조선DB
혈액에 반응해 푸른빛을 내는 루미놀.

매일 1구씩 시체 보는 게 일, 아직도 먹먹할 때 있어

그는 학부시절 생물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 2005년, 검시조사관을 처음 뽑을 때 응시해 1기로 뽑혔다.


-검시 조사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기까지는 생물학 전공자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검시 조사관이 될 수 있었지만, 요즘은 자격 요건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임상병리, 간호사 면허 소지자나 실무 경력 2년 이상이 있으신 분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과학수사를 정말 해보고 싶고, 시체를 보는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이 있는 분에게 권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검시조사관은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 선발한다. 그는 7급으로 시작해 2015년에 5급 공무원이 됐다. 시체를 살펴 사건·사고의 경위를 추론하는 게 주 업무다.


경남지역에서 근무하는 검시 조사관은 모두 7명. 이들이 1년 동안 조사해야 하는 시체는 평균 2000~3000구 정도라고 한다. 한 사람이 연간 300~400구를 봐야 한다. 적어도 매일 1~2구의 시체와 마주한다는 뜻이다.


-시체를 보는 게 힘들지는 않습니까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괜찮아졌습니다. 매일 시체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국과수에서 6개월 연수를 받으며 부검도 하고 시체 손상을 확인하는 수사기법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살해당한 사건을 접하면 지금도 먹먹해집니다. 6~9살 되는 꼬맹이가…”

2017년 공무원 봉급표.

힘들 때도 있지만 임 사무관은 이 직업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시체를 보고 사인을 객관화하는 논거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부검하는 기법도요.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인권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글 jobsN 이병희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