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방랑생활 "나이 마흔, 아내와 둘만으로도 행복해"

조회수 2020. 9. 17. 17:25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시골소년→과학고→방송기자→여행 프리랜서로..행복을 찾아 걷다
과학고 나와 방송기자로 일하다 꿈 좇아
작가, 답사가, 연사, 에세이스트 등
여행 관련 프리랜서로 일하는 권기봉씨

40년 전 충북 제천 월악산 자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호기심이 많았다. 주위에는 산과 들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산에 올라 고사리, 두릅을 꺾고 반찬용 메뚜기를 잡았다. 평화롭고 자유로웠지만 어딘가 ‘결핍’이 있는 유년시절이었다. 바깥 세상이 늘 궁금했다. 유일한 해방구는 책이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듯 역사와 여행 책을 탐독했다. 책을 읽을수록 몸이 근질근질했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싶었다. 집을 떠나 여행 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이후 소년은 남들처럼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갔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즐겁지 않은 일을 얼마나 더 버티면서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갈수록 늘었다. 결국 4년 만에 사표를 냈다. 계획은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자’는 생각 하나였다. 적게 벌면 적게 버는대로 맞춰서 살자고 마음 먹었다. 그는 그렇게 나이 서른에 다시 월악산을 뛰놀던 소년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꿈을 좇아 10년 가까이 방랑 생활을 하고 있고, 매일 꽉 찬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다. 여행 작가이면서 답사가, 연사, 에세이스트,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권기봉(38)씨 얘기다.

출처: jobsN
여행 관련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권기봉씨

권씨는 여행·문화재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인이다. EBS 인기 프로그램인 ‘세계테마기행’ 단골 출연자,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와 '다시, 서울을 걷다' 등을 쓴 여행책 부문 베스트셀러 작가다. 권씨는 충북과학고,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2005년 SBS 기자로 입사했다가 2008년 퇴사해 역사 여행을 테마로 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잡앤(JOB&)이 권씨를 만나 살아온 길과 일에 대한 생각,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과학고 출신이라는 것이 의외다.


“중학생 때 과학 과목을 가장 좋아했다. 과학을 좋아하면 당연히 과학고를 가서 과학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고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를 가거나 카이스트·포항공대를 가야지’와 같은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일종의 정보 부족에 따른 오판(誤判)이었다고 할까. 과학고를 다니면서 내 적성이 이과(理科)가 아니라 문과(文科)임을 알았다. 수학·과학보다는 정치·경제·사회를 좋아했다. 역사나 소설 책을 많이 읽었다.”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는 어떻게 가게 됐나.

“과학고는 문과 반이 없다. 문과를 가려면 자퇴를 해야 했는데 그럴 용기까지는 없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방황하는 내게 ‘일단 대학을 가서 전과(轉科)를 해보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사범대는 전과가 안되더라. 역시 정보부족이었다. 사범대를 선택한 건 가정 환경 영향이 컸다.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사셨다. 누나 두 명이 있는데 교사(큰 누나), 학원 강사다. 다른 세상을 잘 몰랐다. 수능 점수에 맞춰서 지원한 것도 있다.”


대학 입학 후, 전과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패닉’에 빠졌다. 전공은 ‘당연히’ 흥미가 없었다. 수업을 자주 빠졌고, 틈나는 대로 서울 시내 답사와 국내 여행을 다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학보사에도 들어갔다. 대학 시절, 2~3개월간의 장기 배낭여행을 세 번 다녀왔다. 단연 기억에 남는 여행은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던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유럽 배낭여행(1999년)이었다. 1년간 과외, 음식점 서빙, 신문배달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서 200만원을 모아서 떠났다. 

출처: 권기봉씨 제공
생애 첫 해외 여행이었던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유럽 배낭여행. 30만원으로 두 달을 버텼다. 잠은 유레일패스 열차 안에서 잤고, 옷은 한 벌 뿐이었다.

-첫 해외여행 갔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두 달 내내 하루도 안 행복한 날이 없었다. 그런데 돈이 너무 없어서 거의 ‘거지 생활’을 했다. 당시 가장 저렴했던 비행기 티켓이 홍콩 항공사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 티켓이었다. 70만원으로 왕복 표를 끊었다. 45일짜리 유레일 패스는 100만원 정도였다. 남은 돈으로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카메라(10만원)와 필름을 사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 200만원 중 10만원이 남았다. 부모님이 막내 아들 첫 해외여행 간다고 보태준 20만원을 합쳐 딱 30만원 들고 유럽을 갔다. 유럽에서 두 달을 30만원으로 버틴다고 상상해보라. 18년 전이긴 하지만 당시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숙박비를 아끼려고 기간 내 무제한 탑승이 가능한 유레일 패스를 이용해 일부러 야간 기차에서 잠을 잤다. 역에서 노숙도 했다. 밥은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을 파는 마트에 가서 식빵을 사먹었다. 기차역 화장실에서 씻고, 샤워는 거의 안 했다. 우연히 만난 유학생이 재워주기도 했고, 여행자들이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짐도 없었다. 입고 간 옷 외에 반바지 하나만 더 있었고, 가방 없이 비닐봉지 하나 달랑 들고 거기에 반바지랑 칫솔·치약만 넣고 다녔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너무 행복했지만, 그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여행할 때 최소한의 돈은 있어야겠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갔다. 아쉬웠다.”

출처: EBS 방송화면 캡처
EBS 세계테마기행 단골 출연자인 권기봉씨

이후 권씨는 대학 시절 두 달 이상의 장기 해외여행을 두 번 더 갔는데, 첫 배낭여행 때 보다는 돈을 어느 정도 준비해서 갔다. 한 번은 제품(카메라) 홍보를 해주는 대신 삼성테크윈(현 한화테크윈)에서 800만원을 지원받아 친구 4명과 캠핑카 유럽여행을 갔고, 또 한 번은 해외 축제에 보내주는 서울시 공모전에 참가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리는 공연제에 다녀왔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이나 가방도 중소기업에서 후원을 받았다. 수백 군데 기업에 제안서를 보내 어렵게 후원을 받았다. 국내 여행은 전국 수십 곳을 다녔다. 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나 문화재가 있는 곳이었다. 삼국시대나 고려, 조선시대 때의 흔적들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국내 여행을 다니면서 권씨는 회의가 들었다. 수백~수천 년 전의 역사가 너무 멀게 느껴졌고, 그 때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지금 나와 연관시켜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자연스레 근·현대사 관련 공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로 일제(日帝), 해방 이후 군부 독재 시대의 것들이었다.


-근·현대사와 조선 시대 이전의 시설과 공간들은 어떤 차이가 있나.

“조선시대까지는 역사의 흔적들이 궁궐 외에는 주로 산이나 교외에 있다. 건축 소재는 나무다. 그런데 구한말부터 군부 독재까지의 근·현대사의 공간들은 도시 안에 있고, 소재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대부분이다. 도시의 다른 건물들과 크게 차별성 없어 보이는 곳이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어두운 면이 많고, 누구도 보듬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건축 소재의 차별성도 없어서 철거되는 것들이 너무 많더라. 모두 어떻게 하면 ‘저 부정적인 역사를 간직한 시설물을 가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한다. 근·현대사 문화재를 찾아 다니면서 ‘미래세대가 이 공간이나 건축물을 영영 못 볼 수도 있겠구나’란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이 부분을 발굴하고 연구하고, 그 역사적 공간에 담긴 의미를 감추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아이가 잘못을 할 때 부모가 얘기를 안 해주면 실수를 반복할 수 있듯, 역사적인 면에서도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런 일만으로 먹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취업해 돈을 벌어서 역사에 대한 탐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출처: SBS방송화면 캡처
SBS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의 권기봉씨

-직업으로 방송기자를 택한 이유는.

”예전부터 조직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기자는 일반 회사원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곳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방랑벽’(放浪癖)과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첫 언론사 시험이 2005년에 본 SBS 공채였고, 운 좋게 합격했다. 논술과 작문시험에서 쓴 글은 모두 내가 여행을 다니며 겪은 일이었다.”


-4년 만에 퇴사했는데.

“조직 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다.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직업이었지만, 기자도 엄연히 조직원 중 하나였다. 짜여진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답답했다. 거의 주6일을 했고, 매일 아침 7시까지 출근해 밤 10시쯤 퇴근했다. 유일한 낙은 시간 날 때 답사 가고, 책 쓰는 일이었다. 퇴근 후나 주말, 이동 중 틈나는대로 책을 썼다. 그렇게 쓴 첫 책이 2008년 1월 출간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15쇄를 찍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4만부 가까이 팔렸다. 당시 그런 식의 접근을 한 역사책이 없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책에 대해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자, 용기가 생겼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도 찾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나오고 얼마 후, 사표를 냈다. 만 29세가 된 직후였다. 퇴사 후 갈 곳이 있다거나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출처: 권기봉씨 제공
서울 시내 답사를 진행하는 권기봉씨의 모습

-퇴사 후 어떻게 먹고 살았나.

“우선은 근·현대사 관련 장소나 건축물을 찾아 다니고, 국회도서관 등에서 사료 연구 등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벌이가 없으면 안되니까 그 결과물을 활용해 책을 쓰거나 기고를 하며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책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여행이나 답사 관련 방송 출연 섭외가 들어오고 서울시청, 구청, 교육청 산하 도서관 등에서 강연과 답사 진행 요청들이 들어왔다. 몸은 바빴지만,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었다. 처음 회사 나왔을 때는 2년여간 월 100만원도 못 벌었다. 퇴사 초기에는 불러주는 데는 다 갔다. 무상으로 강연이나 답사를 해준 곳도 많다. 그때는 돈보다는 나를 찾아주는 곳이 있구나, 내가 전하고자 하는 얘기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마냥 기뻤다.


이후 두 번째 책을 쓰고, 또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연소득이 2500만~3500만원 정도로 늘었다. 직장 다닐 때 받은 돈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삶에 대한 만족감은 훨씬 컸다. 2014년부터 ‘대박’이 났다(웃음). 지금은 대기업 다니는 동년배들보다 많이 버는 것 같다.” 

출처: 권기봉씨 제공
권기봉씨와 아내 정유정씨

날씨가 따뜻해서 산책하기 좋은 봄·가을은 권씨에게 ‘성수기’다. 기업, 지자체, 공공기관,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답사 요청이 밀려든다. 거의 매일 1~2회씩 답사가 있고, 역사와 여행 등을 주제로 한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온다. 권씨가 개발한 서울 시내 답사 코스는 총 50~60개 정도다. 서울 사대문 안을 도는 5~6개 코스의 인기가 가장 많다. 여름과 겨울은 비수기다.


그때는 주로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찾거나 인터뷰를 다닌다. 여유가 생기면 해외여행을 떠난다. 1년에 4~5회 해외여행을 가며, 한 번 가면 1~3주 정도 있는다. 2015년 1월 결혼하면서부터는 항상 아내와 함께 여행을 간다. 주한 네덜란드대사관에서 일하는 아내는 다른 직장들보다 휴가를 내기 쉬운 편이다.

출처: 권기봉씨 제공
권기봉씨와 아내 정유정씨

-여행을 너무 자주 다니는 것 같은데, 지치진 않나.

“어르신들이 보면 웃긴 얘기일텐데 요즘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여행 다닐 시간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서. 아내와 나 모두 이제 마흔인데, 나이 들면서 체력 문제도 있을테고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부지런히 세상을 마음껏 여행해보고 싶다. 이런 욕심 때문에 사실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다. 조금은 개인주의적인 생각일 수 있겠지만, 아내와 둘이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프리랜서라서 소득이 불안정할 텐데, 노후에 대한 불안감은 없나. 돈은 어떻게 모으는지.

“프리랜서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다. 어차피 돈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고, 손 벌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 생각도 없었다. 평생 혼자 살 생각이었다. 쓸 데가 거의 없어서 돈 관리라고 할 것도 없다. 돈 쓰는 데가 여행밖에 없다.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한 말이 있는데 ‘당신이 원하면 명품백을 사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한 번 살다 갈텐데 소유물보다는 경험과 추억에 투자하자’고 했다. 다행히 아내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신 여행 갈 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아내가 버는 것은 대부분 모으는 편이고, 사치스럽게 살지 않는다. 별다른 재테크를 하진 않고 적당히 저축하며 산다. 수입의 70% 정도는 모으는 것 같다.”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회사에서 공짜로 건강검진 받다가 지금은 100만원 내고 받으면 아깝다 사실(웃음). 결혼해서 자녀가 있고, 이미 40~50대고 이런 분들은 사실 좀 어렵겠지만 20대 청년들, 30대 직장인들은 정말 돈 생각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꼭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직장인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어 하다보니 대학가고, 가서 사춘기를 겪는다. 내가 생각한 과가 아니라서.

출처: 권기봉씨 제공
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강연을 하고 있는 권기봉씨

그런데 고민을 하다 말고 등 떠밀려 취업 공부를 시작하는거다. 직장 들어가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나. 그리고 어 하다보니 결혼하고, 결국 가족 구성원의 나, 조직원으로서의 나만 남게 된다. 한참 지나서야 내가 누군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불안하더라도 내가 누군지, 뭘 좋아하는지 찾아봐야 한다. 찾는 과정에서 당연히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게 다 자양분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그 과정에서 버는 10만원이든 50만원이든 뿌듯한 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많이 못 벌더라도 지속적으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다.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글 jobsN 김지섭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