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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5억 스타셰프의 고백 '요리사는 망할직업, 이대로 생존못해'

조회수 2018. 11. 5. 14: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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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급 호텔 반얀트리 레스토랑 총괄셰프 겸 이사
세계적 셰프들 스승으로 모시며 밑바닥에서 시작
"셰프는 없어질 직업,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성공가능"

최근 서울 남산 부근의 6성급 호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의 레스토랑 그라넘(Granum). 총괄셰프인 강레오(41) 씨와 마주 앉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테이블을 무엇으로 닦았어요? 비린내가 나잖아요. 이렇게 손님 맞으면 되겠어요.” 그가 종업원에게 따끔한 지적을 했다. 주방에서도 파를 칼로 몇 번 썰더니 후배 요리사들에게 한마디 했다. “칼이 안 든다. 너무 무디다. 다시 정성껏 갈아라.”


강씨는 음식 오디션 프로그램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대중은 그를 ‘독설 셰프’라고 부른다. 방송에서 “이건 먹을 가치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독설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요리사는 고객에게 음식을 만들기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삽니다. 나태한 생각으로 만든 요리를 손님에게 내보낼 수 없지 않습니까

출처: jobsN
강레오 셰프

농부의 아들→공부 꼴찌→식당 아르바이트로 모은 700만원으로 영국행→19살 식당일 시작→세계적 요리사인 피에르 코프만·장조지·고든렘지의 레스토랑을 거치며 헤드 셰프 승진→인기 방송인→6성급 호텔 총괄셰프.


밑바닥에서 시작해 스타 셰프가 된 그는 10년간 영국과 두바이에서 셰프로 일하다 2006년 귀국했다. 양식 레스토랑 ‘화수목 바이 강레오’와 ‘마카로니 마켓’, CJ 비빔밥 체인 ‘비비고’의 런던지점 총괄셰프를 거쳤다. 2012년부터 음식과 예능 방송에 출연하다 2015년부터 반얀트리 레스토랑·바 5개의 총괄셰프 겸 이사,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호텔조리제과예술학부 학부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의 연봉은 '5억+@'.


이런 그가 셰프란 직업의 미래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셰프는 없어질 직업이다. 이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남들은 부러워할 만한 연봉을 받고 있지만 ‘언제든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노력하고 도전한다. 지난해 농업 식재료와 농사 경영을 공부하는 1년짜리 평생 교육기관인 ‘한국벤처농업대학’을 졸업했다. 이달 말부터는 수산업에 도전한다.


매달 두차례 전남 완도로 가 한국벤처수산대학에서 해산물과 수산업 전반에 대해 공부할 계획이다. 대부분 수강생이 농·어업 경영인으로 셰프는 강씨가 유일하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강 셰프를 만났다.

출처: 반얀트리 홈페이지 캡처
반얀트리에서 강 셰프가 개발해 파는 메뉴들

“내 위치를 지킬 수 없다...본질을 공부해야 성공한다”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합니다. 매일 몇시간씩 메뉴를 개발하고 요리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호텔에 새로운 레스토랑을 개업하는데, ‘미슐랭 스타’를 받기 위해 다양한 메뉴개발과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1주일에 두 차례 출강을 나갑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전국을 누빕니다. 우리나라 160개 시·군을 돌며 최고의 음식재료 원산지를 찾는 프로젝트입니다. 최근 수년간 해왔는데, 1년에 4만5000㎞를 달립니다. 지금까지 140개 시군을 방문했습니다.”

이미 성공했는데 왜 또 공부합니까.

남들은 ‘이미 꿈을 이루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요리로 ‘잔재주’를 피우는 것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엌에서 찌든, 삶는 그냥 마트에서 사온 당근으로 요리하면 평범한 셰프입니다. 그 당근이 어떤 햇볕을 쬐며 어떤 땅에서 얼마나 자랐는지 알고 요리하는 셰프가 몇명이나 될까요.

그 본질에 대한 갈증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농어업인들이 듣는 전문 교육기관에 들어가 처음부터 공부하는 겁니다. 이달 말부터 입학하는 벤처수산대학에서는 미래의 수산 먹을거리는 어떻게 변할지 배우는데 벌써 설레이고 있어요."

어떤 본질을 공부합니까.

돼지가 원래 초식동물인 거 아세요? 그런데 사람이 잡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돈 때문입니다. 사료를 먹여 빨리 살을 찌도록 해 팔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초식하는 돼지가 맛도 좋고, 포화지방도 적습니다. 다만 빨리 살이 찌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양돈 농가 가운데 소수가 초식 돼지를 키웁니다. 그런 곳을 발굴합니다.

또 30년을 키운 장생 도라지가 있습니다. 도라지는 3년 이상 같은 땅에서 못 삽니다. 30년 키우려면 땅을 10번 옮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끈기를 가지고 도라지를 키운 농부들과 만나 요리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스토리와 정성이 담긴 식재료를 확실히 아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는 전국에서 발굴한 식재료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실험한다. 매달 마지막주 이틀간 ‘테이스트 오딧세이’라는 요리 이벤트를 1년 반전부터 열고 있다.“미더덕이 제철이라고 하면 미더덕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생산하는 농부의 재료를 사들여 새로운 메뉴로 요리합니다. 이런 노력이 호평을 받아 레스토랑 매출이 오르고 평가도 좋아졌어요.”
출처: jobsN
반얀트리 그라넘 다이닝 라운지

셰프는 없어질 직업입니까.

그렇습니다. 4차 산업혁명 변화가 너무 빠릅니다. 맥도날드 보세요. 이미 로봇 시스템으로 서빙하고 음식을 조리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스테이크를 굽고 생선가스를 튀기는 로봇 요리사가 나왔습니다. 사람보다 더 청결합니다. 연봉 협상도 필요 없고, 유니폼도 갈아입을 필요 없어요. 저장장치에 수백만개, 수천만개의 레시피를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변화하는 현실에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사람의 감성, 혼을 담을 수 없는 요리를 하지 않으면 로봇이 다 이기는 현실 말입니다. 나만의 독창적인 스킬, 자기 스타일, 자신만의 ‘시그니처 디시’(signiture dish)를 만들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세계적 셰프의 식당에서 막내로 시작 

강 셰프는 남양주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중3 때부터 요리에 빠졌다. “공부엔 흥미가 없었습니다. 언제 한번 반에서 꼴찌를 했는데, 선생님이 ‘네가 우리 반 꼴찌인데 그게 전국 꼴찌다’라고 혼을 내셨어요. ‘장난으로 학교 오냐’는 소리를 엄청 들었습니다.”


고1 시절, 수업이 끝나면 서울 종로5가로 나갔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식당가 보조 일을 전전했다. “아버지는 ‘여자가 하는 일 아니냐’며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더 커졌습니다. 학교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 3부터는 평일에도 일한 적도 많습니다. 서울 시내 한 호텔 주방에 운 좋게 취업해 소고기를 써는 일을 주로 담당했고 밤 11시까지 자리를 지켰어요.”


3년간 모은 돈으로 세계 최고의 셰프들이 즐비한 영국으로 1997년 떠났다. “유학부터 지금까지, 부모님 지원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모은 돈으로 영국의 현지 어학원에 등록해 학생비자를 받았습니다.


또 학생비자로 주당 24시간 시간 내에서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어요. 한 영국 가정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수차례 이력서를 들고 레스토랑을 찾아갔습니다. 작은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못했습니다. 아는 단어라고는 ‘나는 일자리를 찾는다’(I‘m looking for a job)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영어 잘할 필요 있나요. 일만 미친 듯이 잘하면 되거든요. 첫시급은 7000원 정도였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롯데그룹 홈페이지 캡처
강레오가 같이 일한 세계적 셰프들. 고든 렘지(왼쪽), 피에르 코프만, 피에르 가니에르(오른쪽). 그는 이 가운데 피에르 코프만을 스승으로 뽑았다

세계 최고 셰프 식당에서 일하고 싶었다. “제 취업의 원칙은 거절을 당해도 무조건 가고 싶은 식당 주방에 들어가 말도 없이 며칠씩 일하는 겁니다. ‘당장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여기 아니면 안 된다’는 끈기를 보여주면 받아주곤 했습니다.” 여러 레스토랑을 전전하다 1년 만에 ‘미슐랑 3스타’ 셰프인 장조지 식당 ‘봉’에 막내인 '코미'로 들어갔다. 니콜 키드먼, 이완 맥그리거 등 유명인들의 단골 식당이었다.


셰프의 직급 체계는 코미→퍼스트 코미→디미 셰프 드 파티→셰프 드 파티→시니어 셰프 드 파티→주니어 수 셰프→ 시니어 수 셰프→헤드 셰프 순이다.

하루 생활이 어땠나요.

코미는 재료 손질을 하고 쓰레기 청소를 합니다. 월급은 150~160만원 받았어요. 해뜨기 전에 출근해 자정까지 일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 48시간 연속 잠을 못자고 밥도 못 먹고 물만 먹기도 했습니다. 무조건 ‘내가 먼저 도와드릴까요?’ 물어보고 일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요리를 배우는 영국의 한 3년제 전문대에 입학했지만 자퇴했습니다. 거길 졸업하면 보통 당시 제가 일하던 식당으로 취업했습니다. 다닐 이유가 없었어요. ”
출처: 방송화면 캡처,나무위키
2012~2014년까지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마스터셰프 코리아

근무문화는.

한국 레스토랑과 달리 ‘군대 문화’가 심합니다.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당연하고 폭행도 비일비재했습니다. 프라이팬으로 후배 셰프의 팔을 지지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겨 경찰서에 간 셰프도 봤습니다. 평소 형님으로 모시는 이연복 셰프는 ‘레오는 비단길을 걸었고 나는 가시밭길을 걸었다’고 하시더더군요. 그런데 말 못하는 나라에서 저도 고생 무지하게 했습니다.

요리를 만들려면 도구 쟁취 경쟁에서 먼저 이겨야 했습니다. 요리사가 40~50명이 되는 큰 식당에서 필요한 주방 도구들이 항상 부족하거든요. 전 세계 어느 레스토랑에 가도 셰프 숫자가 주방도구보다 많습니다.

주방 도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오전 6시에 출근해 내가 그날 써야 할 도구들을 나만의 공간에 숨겨놓고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출근하기 위해 레스토랑 주변 5분 거리 안에 집을 얻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경험했군요.

‘장 조지 셰프를 위해 직접 생선요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리를 했더니 선배 셰프가 ‘우리 셰프는 세계 최고인데 이따위로 만드느냐’며 뒤통수를 때리고 음식을 버리는 겁니다. 목젖까지 ‘이 인간은 나만 보면 지랄이냐’는 소리가 매일 치고 올라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음식을 셰프에게 대접했는데 ‘생선을 너무 많이 익혔다’는 피드백을 들었습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지만, 그 소리가 저에게 꿀 같은 ‘칭찬’으로 들렸습니다. 최고의 셰프가 내 음식을 먹고 평가를 해 줬으니까요.
출처: jobsN
반얀트리 레스토랑 주방에서 찍은 강레오 셰프(왼쪽과 가운데), 롯데푸드와 협업해 최근 출시한 간편식 브랜드 모습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모자라다

한 레스토랑에서 1년~1년반씩 일하며 레스토랑 7곳을 옮겨다녔다. 6년 노력 끝에 고든 렘지의 ‘주마’에서 수 셰프를 달았다. 연봉이 8000만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후 고든 렘지의 ’베르 바이 고든 렘지‘(두바이)로 옮겨서 셰프 최고 직급인 헤드 셰프의 자리에 올랐다. 

힘들 때 그만두고 싶지 않았나요.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더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장인은 주40 시간을 일하지만 저는 하루 18시간씩, 주당 100시간 이상 일했습니다. 사람들은 ’1만 시간의 법칙 ‘을 말하는데, 저는 1만 시간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400시간, 1년이면 5000시간 가까이 일했습니다. 1만 시간이 되기까지 2년이 채 안 걸렸거든요. 세상에 없는 ‘유일한 셰프’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서양 식당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생각에 2006년 귀국했다. 직접 레스토랑을 4곳 정도 차려 2014년까지 운영했다. 정통 유럽식 메뉴를 표방해 인기를 끌었다. 이태원의 프렌치 레스토랑 ‘마카로니 마켓’에서는 배우 이병헌씨의 결혼식 애프터 파티도 열었다. 실패도 있었다. “이화여대 앞에 국내 최초 ‘수플레 전문점’이란 타이틀을 걸고 식당을 운영했는데 6개월간 고전하다 망했습니다. 요리만 할 줄 알았지, 식당 위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거든요.”

'마스터 셰프 코리아', '찾아라 맛있는 TV' 등에 출연하다가 방송에서 사라진 이유는 초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휩쓸려 방송만 하다 보니 제가 운영하던 레스토랑에서 손을 놓게 됐어요. '아차' 싶었습니다. 요리사의 본질을 잊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능 방송을 접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한 겁니다.”

많은 청년이 셰프의 꿈을 꾸고 있는데. 

제가 아직 좋은 셰프가 뭔지 알 수 없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죽을 때까지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한국에 이어 일본의 44개 현, 그리고 중국까지 돌며 최고의 음식재료를 찾을 겁니다. 그런 다음 ‘최고의 음식재료 지도’를 그리고 책도 내고 싶습니다. 한 눈으로 정말 좋은 음식재료 원산지를 볼 수 있는 지도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청년들이 시야를 넓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시대에 꼭 한국에 살 필요가 없어요. 처음 영국을 갔을 때 부모님은 ‘한 3개월 하다 포기하고 오겠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5년을 버티고 자리를 잡고 한국에 들어갔어요. 무엇보다 누구한테 물어보고 결정하지 마세요. 피드백을 받는 것은 좋지만, 결정은 무조건 본인이 해야 합니다.”

글 jobsN 이신영

jobarajob@naver.com

잡아라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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