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핫피플 사로잡은 한국인 디자이너 유나양

조회수 2018. 11. 5. 14: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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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은 당연한 일
창피해말고 도전해보세요
한국서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영국→미국
여성 성별·한국인 국적은 유리천장이자 도약대
한국 고교시절 공부 도움 많이 돼

10년전 영국 런던의 한 골목길. 원단을 잘못 잘랐다가 해고 당한 28세 디자이너가 울고 있었다. 한달 일하고 받는 돈은 수십만원. 원단값은 월급보다 많았다.


미국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디자이너 양유나(38)씨. 브랜드 '유나양(Yuna Yang)'은 뉴욕 패션계에서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로 통한다. 2010년부터 뉴욕패션위크에 12번 연속 참가했다. 현재 일본, 대만 등 5개국에 15개 매장이 있다.


지난해 4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기금 마련을 위해 열리는 패션쇼 '메트 갈라(Met Gala)'. 양씨는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 메이 머스크 의상을 디자인했다.

2016년 4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금 모금 행사인 메트 갈라(Met gala)에서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이자 모델인 메이 머스크의 옷을 디자인한 양유나씨(왼쪽 사진에서 오른쪽 두 번째).

양씨가 만든 드레스 가격은 700~3000달러(약 84만~360만원), 청바지는 400~500달러(약 48만~60만원) 정도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비 브라운, 카다시안 패밀리 등이 고객이다. 가격이 높아 주로 상류층이 옷을 산다. 명품 브랜드 소속이 아닌 아시아계 개인 디자이너로서 희귀한 일이다.


한국 대학을 졸업하고 15년간 해외에서 활동하는 양씨를 지난달 29일 미국 뉴욕에서 만났다. 

출처: 본인 제공·조선DB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양유나씨.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후 뒤늦게 패션디자인을 공부해 뉴욕의 유명 디자이너가 됐다.

◇ 밀라노-런던, 패션디자인에 빠져 쓴맛 단맛 보다

  

2001년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후 패션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꿨다.

왜 이탈리아로 갔나?

3개 국어는 해야 취업할 때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어권이 아닌 곳으로 갔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한 것도 이유였습니다.

처음부터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꿀 계획이었나?

반대가 심했던 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승낙을 받았어요. 전 기억을 못하는데 '일본에 디자이너 겐조가 있다면 한국에는 양유나가 있다는 말을 만들겠다'라고 썼대요. 아마 허락을 받으려고 급히 적어낸 포부였던 거 같은데, 말이 씨가 됐네요.

이탈리아 밀라노 어학원에 다니던 중 인생이 바뀌었다.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의 재봉사였다. 그를 따라 공방에 놀러갔다가 패션디자인에 빠졌다.


패션학교인 마랑고니에서 10개월 과정을 이수했다. 디자인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졸업 후 명품 브랜드 '프리마 클라쎄'에 들어갔다. 팩스로 보낸 포트폴리오를 수석디자이너가 보고 직접 연락을 줬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일부러 매주 월요일 새벽 1시부터 수백군데에 이력서를 보냈어요. 팩스는 도착 순서대로 쌓이잖아요. 출근 시간 가까이 보내면 제 이력서가 가장 위쪽에 올라가 있으니 읽어볼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는 즐겁지만 힘들었다.

바로 위 상사랑 안 맞았어요. 제가 수석디자이너와 면접 보고 바로 입사한 걸 마음에 안 들어했어요. 원래 채용 절차는 담당자들과 순서대로 면접을 해야 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한국에 졌을 때는 며칠 출근을 못했다.

출처: jobsN
양유나 디자이너의 작업물. (오른쪽) 2016년 컬렉션에서 한복 색동저고리를 주제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

매일 울었다. 선배의 말이 마음을 울렸다. "너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면 이탈리아를 떠나라." 보수적인 이탈리아 패션계에서는 성장하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2005년 영국 런던의 세인트 마틴 스쿨에 다시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 10개월 과정만 배워 기본기가 부족했어요. 경력을 인정받아 학비는 감면받았습니다.

학교를 다닌 3년 간 일도 함께 했다. 방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보일러가 안나오는 열악한 사무실에서 일하다기 동상에 걸렸다. 근무했던 디자인 사무실이 망하자 패션쇼를 위해 사놨던 장식용 커튼을 뜯어 팔기도 했다. 

패션계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출처: 유나양 제공
양유나씨가 디자인한 옷. 양씨는 난민, 남북 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작품 콘셉트로 자주 다룬다. 그는 옷을 만들 때 실크와 레이스 등 소재를 주로 사용한다.

◇ 정글 같은 뉴욕에서 살아남다

 

'서른 살에 내 브랜드를 내겠다'며 2008년 미국 뉴욕으로 왔다. 금융위기라 업계도 얼어붙던 시절. 일단 사람을 모았다. 퇴사 후 쉬러 온 한국 지인 등 패션을 전혀 모르는 사람 2명과 함께 시작했다. 


처음부터 옷값을 비싸게 매겼다. 초보가 고급 브랜드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패션계 철칙.

오히려 고급 마켓이 낫다고 판단했어요. 대량생산해서 단가를 낮출 형편도 아니었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고급 소재인 레이스와 실크를 과감하게 잘라서 디자인했어요.

기자와 편집숍 주인들의 이메일 주소를 구해 초청장을 보냈다. 

주위에서 다 망할 거라고 했어요. 옷이 이상하다는 '독설'도 많았습니다. 뉴욕 사람들 냉정해요. 쓸데없는데 시간 낭비 안합니다. 그래도 거기까지 온 거 보면 관심은 있다는 거니까 기뻤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유명 패션 잡지 WWD에서 그를 소개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 첫번째 컬렉션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2011년 세 번째 컬렉션은 혹평받았다. "양이 매력을 잃었다"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제 실력과 에너지 부족이라고 생각해요. 세 번째라 판이 돌아가는 게 보였어요. 평가는 좋은데 돈이 안 벌리니까 지치기도 했고. 머릿 속에서 얼마를 넣어서 얼마를 뽑아야 하나 계산했어요. 냉정하게 평가해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무관심보다 낫고, 발전하는 계기가 됐거든요.
출처: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 한국 페이스북 페이지
양유나씨가 뉴욕에서 한 첫번째 컬렉션 주제는 '1920년대 미국 여성'이었다. 마침 영화 '워너 포 엘리펀트'의 배경이 1920년대였다. 유나양을 대표하는 소재 레이스를 활용해 영화 속 의상을 디자인했다.

이때쯤 글로벌 영화사 폭스 부사장 줄리아 페리가 찾아왔다. "당신은 옷을 만들 때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양씨의 답은 간단했다.


 "여성(Woman)." 


이 일을 계기로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와 '레드 테일스' 의상을 맡았다. 새로운 기회로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3년이 되기 전에 망하는 사람이 많아요. 5년쯤 버티면 '어, 쟤 아직 있었어?'해요. 10년은 견뎌야 인정받습니다.

양씨는 '이상한 디자이너'로 통한다. 고급 여성복 브랜드가 하지 않는 작업을 자주 시도한다. 록밴드나 래퍼들과 콜라보레이션을 했다. SM 등 한국 대형 기획사와도 함께 작업했다. 

가수 머라이어 캐리의 남편 닉 캐논과의 작업이 기억에 남습니다. 닉은 후원해주면서 두 가지 조건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운동화에 그림을 그려 패션쇼에 사용할 것, 둘째는 수익금의 일부를 공립학교 예술 교육에 기부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주의자다.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대량생산을 하지 않는다. 너무 잘 팔리는 옷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서로 윈윈하지 않으면 협업도 안한다. 대신 한 번 결정하면 허튼 돈을 절대 쓰지 않는다. 

패션은 예술이 아닙니다. 나를 믿고 있는 직원들을 먹여살려야 해요. 현실 감각을 잊어선 안됩니다.
출처: 양유나 제공
유나양의 옷을 입은 국내 연예인들. 왼쪽부터 배우 황신혜, 아이돌 가수 에이핑크, 배우 한채영씨

◇ 패션계 냉정하지만 장벽은 없어  

해외 취업이나 진출을 꿈꾸는 디자이너 지망생들을 위한 팁을 줬다. 

① 네트워킹

"메이 머스크의 옷을 만든 건 줄리아 페리의 추천 덕분이었습니다.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 작업을 하면서 신뢰를 쌓았습니다. 줄리아에게 저를 처음 소개한 건 누구였을까요? 바로 제 사무실에서 일하던 어시스턴트였습니다. 닉 캐논과의 작업도 제 밑에서 일하다가 이직한 어시스턴트가 다리를 놔줬습니다."


② 특이한 이력 활용하라

"한국인이면서 여성이라는 조건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소수자지만, 특이한 이력으로 눈길을 끌 수 있었습니다. 뉴욕은 치열하지만 능력에 대해서는 공정한 곳입니다. 다양한 과목을 배우는 한국 고등학교 수업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어떤 주제가 나와도 막힘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원동력이 되거든요."


③ 거절을 두려워 말라

"이력서를 보내고 저를 알리는 과정에서 수백, 수천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패션쇼 후원사 구할 때 화를 내며 거절하는 기업이 있습니다. 창피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작업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리다보면 타이밍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④ 세계인 마인드 가져라

"일하는 곳이 어디든 '세계인'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기준을 한국에만 두지 말고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디자인 철학이나 콘셉트를 잡는데 도움이 됩니다."


⑤ 외국어는 너무 걱정말라

"런던에 가기 전까지 영어를 잘 못했습니다. 이탈리아어도 악바리처럼 매달려 배웠습니다. 현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잘하긴 어렵습니다. 면접이나 미팅에서 문법을 틀리는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어가 부족한 대신 새로운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가졌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글 jobsN 뉴욕=감혜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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