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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일어난 걸지도 몰라, 기적

기적, 순간이 아닌 일상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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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작성일자2016.10.21. | 19,325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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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AS] 지대넓얕에서 화제가 됐던 방송을 애프터서비스 해드립니다.

수정란이 되던 날 이후로 1등이 되는 기적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자주 농담하던 친구가 있었다.

매주 간절함을 담아 긁는 복권 한 장, 백수 탈출을 염원하는 미소로 가득 찬 면접장, 한 손엔 수성 사인펜과 또 다른 손엔 진땀을 쥐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수험생.


언제부턴가 우리는 한 순간의 기적에 너무 많은 순간을 걸어 놓고 산다.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 회사원이 되고, 강남 건물주가 되는 일. 우리는 그것들을 그토록 바라왔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신야스시로新八代에서 가고시마鹿兒島를 잇는 규슈 신칸센 개통 기념 홍보물로 제작되었다. 감독은 기차를 자주, 또 즐겨 탄다는 이유로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근데 기적과 기차, 이 둘을 어떻게 연관짓게 된 걸까?

서로 반대편을 향해 가는 열차가 한 지점에서 스쳐 지날 때 생기는 ‘쿵’ 소리. 여기서 감독은 기적의 순간을 떠올렸다.


‘이 정도의 소리와 충격이라면 아이들이 기적의 순간이라 믿을 만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감독은, 신칸센의 기적을 목적지로 두고 자연스럽게 영화를 출발시킨다.

가족이 다시 모여살기 위해서는 가고시마 화산이 터져야 한다고 믿는 형 고이치를 중심으로 아이들의 기적은 모여든다. 철없는 인디밴드 아빠와 살고 있는 동생 류노스케도 친구들을 모은다. 형제와 친구들은 각자의 기적을 마음속에 품고 신칸센의 기적을 만나기 위해 구마모토로 향한다.

먼저 가와사리 역에 도착한 형 일행이 산을 보고 감탄하자 역장 아저씨가 다가와 후겐산을 소개한다. 20년 전 분화된 산에서 쏟아진 화산재로 50명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화산을 보고 있는 친구들과 달리 아저씨를 유심히 쳐다보는 고이치의 모습이 화면에 들어온다. 표정 때문일까, 그 순간 고이치는 아빠가 말한 세계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두 번 다시 그런 불행은 없어야지.’ 아저씨의 말이 끝나고 동생 일행을 태운 열차가 들어온다. 

아이들이 신칸센을 타러 가기까지의 여정을 함께하며 우리는 어느새 그 작고 어린 기적들이 진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아이들의 마지막 뜀박질이 시작되고, 비밀의 장소에도 기차의 모습이 드러난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기적들 사이로 유독 조용한 고이치. 모두가 각자 바라는 소원을 소리치지만 고이치는 소원을 말하지 않은 채 터덜터덜 길을 내려온다. 가와시리 역으로 돌아온 형제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각자에게 엄마와 아빠를 부탁한 채 헤어진다.

- 난 말야, 소원 말 안 했어.
- 왜?
- 가족보다 세계를 선택했거든. 미안.
- 사실은 있잖아, 나도 다른 소원을 말하고 말았어. 미안해.
- 괜찮아. 아빠를 잘 부탁해.
- 어제도 똑같은 말 했잖아.
- 그렇지.

출처 : 다음 영화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아이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왜일까? 화산 폭발을 가장 간절히 바랐으면서도 신칸센 앞에서 조용했던 고이치가 기적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집에 돌아온 고이치는 하얀 가루칸 떡을 빚는 외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침 묻힌 손가락을 공중에 세운 채 말한다. ‘오늘은 재가 안 쌓이겠어.’ 고이치가 선택한 세계가 뭔지, 어떤 소원을 빌었을지 우리는 그 덤덤한 손가락에서 깨닫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는 고이치와 함께 일상의 모든 순간이 기적의 연속임을 함께 깨닫게 된다. 영화의 결말이 어려웠다면, 빈혈을 핑계로 쓰러지기 전 고이치가 발표했던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를 읽어봐도 좋겠다.


「산다生きる」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郎


살아 있다고 하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건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무 사이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갑자기 어떤 멜로디를 떠올린다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너와 손을 잡는 것

(중략)

살아 있다고 하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건

지금 멀리서 개가 짖고 있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

지금 어디선가 병사가 상처받고 있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지금 순간순간이 지나간다는 것



딸에게서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 붐비는 지하철에서 앞에 앉은 사람이 내릴 채비를 하는 것, 떨어질 뻔한 핸드폰을 낚아챈 것, 늦잠 잔 오늘따라 교수님이 출석을 늦게 부른 것, 수학 시험에 미적분 문제가 쉽게 나왔던 것.


꿈과 기적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퍽퍽한 일상 속에 우리는 서있다.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현실 뒤로 미룬 채 지나쳐 왔다면, 바삐 달려왔던 그 시간들을 잠깐 돌아보자. 


매 순간 일어나는 작은 일들, 이를 기적으로 여기며 사는 것. 이미 기적은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

지적 대화를 위한 팟캐스트 방송.
채사장, 이덕실, 김도인, 깡선생의 <지대넓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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