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a Velar 베일을 벗은 SUV

조회수 2018. 4. 19. 14: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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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서 계속 바라보게 된다. 벨라는 그런 차다.
Writer 신동헌 :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레인지로버가 ‘벨라’라는 신모델을 선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또?’였다. 잘 팔리는 건 알겠지만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레인지로버는 원래 랜드로버의 한 차종 모델명이었을 뿐인데,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형제 차를 마구 만들더니만 이제는 랜드로버에서 출시하는 총 6종의 차량 중 4종류를 레인지로버로 이름을 바꾸어버렸다. 사명을 그냥 ‘레인지로버’로 바꾸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레인지로버 벨라를 보자마자 불평불만은 사라지고 만다. 아름답다. 라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바라보게 된다. 사진으로만 봐도 공감할 수 있겠지만, 실물을 보면 더 반하게 된다.


‘벨라(Velar)’는 이탈리아어로 ‘장막, 위장’이라는 뜻이다. ‘베일에 가린’이라는 표현에 사용하는 바로 그 ‘베일’의 이탈리아어다. 랜드로버는 1951년부터 당시 주력 모델이던 ‘시리즈 1’보다 큰 차를 계획했고, 우여곡절 끝에 1967년에야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 1970년까지 프로토타입을 총 40대 생산해 테스트했는데, 당시 신차종 개발 중임을 알리지 않기 위해 세운 회사가 ‘위장’을 뜻하는 ‘벨라 컴퍼니’였다.

첫 번째 레인지로버의 이름을 땄지만, 레인지로버(흔히 ‘보그’라고 부르지만, 차 이름이 아니라 그레이드명이다. 차 이름은 어디까지나 ‘레인지로버’) 후계 차종이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세그먼트를 담당하는 차다. 이보크보다는 조금 크고, 레인지로버 스포츠보다는 아래 위치에 있다. ‘레인지로버 스포츠보다 작다’가 아니라 ‘조금 아래 위치에 있다’고 쓴 이유는 그보다 크기가 별로 작지 않기 때문이다. 늘씬하게 빠진 덕분에 조금 작아 보이기도 하지만, 수치상으로 볼 때는 후계 기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별 차이 없는 크기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면 더 커 보일 수도 있다. 존재감이 그만큼 각별하기 때문이다.

이 차의 존재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라인이다. 초대 레인지로버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실루엣을 보면 ‘벨라’라는 암호명을 따온 것도 이해가 간다. 뒤로 갈수록 슬쩍 올라가는 뒤 범퍼 라인은 큰 형뻘인 레인지로버가 옆에 서도 기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레인지로버(‘보그’라고 부르는 그 차)는 워낙 거대해 가벼운 마음으로 탈 수 있는 차가 아니다. 서울에서 워낙 흔하게 볼 수 있어서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가격대를 알면 그렇게 자주 눈에 띄는 게 이상할 정도다. 벨라의 포지션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레인지로버의 절반 가격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차다. 언제 어디에 타고 가든 부담이 없는 적당한 크기도 소비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만든 것 같은 선택이다. 과거 레인지로버는 유럽 귀족들이 레저를 즐기거나 여행을 떠날 때 타는 차였지만, 지금 레인지로버 90%는 도심에서 세단과 같은 용도로 운행된다. 운전자를 두는 사람보다 직접 운전하는 비율이 높다. 여성에게도 인기가 많다. 그렇다면 레인지로버 스포츠처럼 남성미 뿜어내는 스타일보다 벨라처럼 우아함을 드러내는 쪽이 더 유용하다.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중간에서 범퍼 역할을 해주니 레인지로버와 너무 닮아서 발생하는 카니발리제이션도 막을 수 있다. 현명한 선택이다. 480cm라는 절묘한 차체 크기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운전하기 편하고 폼 잡기에도 좋다. 여기저기 둘러보면 랜드로버가 머리를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실내는 심플하고 또 심플하다. 동생뻘 되는 레인지로버 이보크와 상당히 닮았지만, 세부를 보면 최신 제품이라는 티가 난다. 과거의 레인지로버처럼 요트를 떠올리게 하는 복잡한 디테일이나 원목 장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애플 신제품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잘 만든 터치스크린을 달았다. 복잡한 스위치도 모두 없애고, 조작 버튼을 대부분 터치 방식으로 꾸몄다. 처음 타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와~ 할 만한 실내다. 반응이 ‘우와~’이건 시샘 섞인 ‘끄응~’이건 간에 이 차의 실내를 보면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차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많을수록 오너들은 신이 난다. 레인지로버는 원래 그런 맛에 타는 차이기도 하고. 다만 시트는 ‘레인지로버’ 하면 생각나는 푹신하고 거대하고 고급스러운 시트가 아니다. 다른 고급 세단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단순한 시트인데, 만듦새 좋고 디자인도 좋기는 하지만 레인지로버에 바라는 것은 이런 게 아니지 않은가 싶다. 폭 파묻히는 맛이 없어서 비위가 상한다.

엔진은 주행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디젤과 휘발유 모두 2리터 4기통 엔진을 준비하는데, 최대출력(240마력)과 최고속도(217km/h) 모두 같다. 디젤이 휘발유보다 연비가 좋은 거야 당연하니, 주유소에 자주 가기 싫다면 디젤을 구입하고 매끈하게 도는 게 좋다면 휘발유 엔진을 사면 된다. 요즘은 디젤이나 휘발유 엔진이나 진동뿐 아니라 소음 면에서 큰 차이가 없으니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문제는 V6 3리터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무려 380마력을 내는 이 차는 정말 조용하고 매끈하고 부드럽다. 가장 레인지로버다운 차가 뭐냐고 묻는다면, 0.1초의 고민도 없이 3리터 휘발유 버전이라고 답할 수 있다. 정말 순풍에 돛 단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달리고, 시종일관 고급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걸 타보지 않고 벨라를 논하지 말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배기음은 또 얼마나 흉포한지, 잊고 있었던 폭주 본능이 마구 솟아난다. 터보를 장착한 4기통과 달리 V6는 슈퍼차저를 달고 있는데, 이쪽이 영국 차들이 그동안 추구해온 방향과도 맞을뿐더러 좀 더 레인지로버다운 회전 감각을 연출한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꾸준하게 회전하면서 힘을 뿜어낸다. 그 과정이 어찌나 우아한지 눈 내리깔고 100m 달리기하는 것 같다.

유라시아 횡단을 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만주와 시베리아 도로는 생각보다 상당히 깨끗하다고 한다. 그래서 본격 오프로더보다는 오프로드 실력을 적당히 갖추고 온로드도 잘 달리는 차가 적당하다나? 요즘 정치 뉴스를 보면서 뭔가 레인지로버 벨라의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태블릿에 그쪽 지도도 다운로드하고, 지도도 한 부 사다 뒷좌석에 던져두는 거다. 원래 좋은 차는 실제로 제 성능을 발휘할 때 값어치가 있다기보다 남자로 하여금 꿈꾸게 할 때 값어치를 하는 법이다. 사고 나서 꿈꿀지, 사는 걸 꿈꿀지만 결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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