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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도 산재가 되나요?

조회수 2017. 7. 5. 16: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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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정신질환 그리고 업무상 재해

콘도 총무팀에서 일하던 이아무개씨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9년, 이씨는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객실 관리를 맡게 됐습니다. 


그 일이 그만큼 오래 걸려요?” 500개가 넘는 객실을 관리하는 업무가 낯설었던 이씨에게 돌아온 건 지배인의 독촉 뿐이었습니다. 그 후 이씨는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불안한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출처: depositphotos

2010년 8월 이씨는 대구고법은 지난해 7월 “갑작스러운 담당 사무의 변경, 변경된 사무로 인한 자존심 손상,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사건에 직면해 극심한 업무상의 스트레스를 받아 급격한 우울증세 등이 유발됐다”며 이씨의 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2017년 자살예방백서>를 보면, 2015년 자살을 택한 사람들 중 비율이 비취업자가 57.6%, 취업자가 42.4%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취업자들이 이런 선택을 한 원인을 파악할 만한 통계는 없습니다. 다만 ‘자살 동기’가 기록된 경찰청 통계 수치를 보면, 2015년 사망자 1만3436명 중 559명의 동기가 ‘직장이나 업무상의 문제’ 때문입니다. 


‘직장 및 업무’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한 해 500명 안팎의 희생자를 내고 있는 셈입니다. 자살까지 이르진 않았어도 ‘직장 및 업무’에 따른 정신질환 피해자 규모도 상당하겠지만, 이 역시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


'업무 변화'가 스트레스 1위


노동자가 자살하거나 정신질환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 한 가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한겨레신문>에서 2000년부터 2016년까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라고 확정한 21건의 자살·정신질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판결문에 등장하는 여러 직장 스트레스 원인 중 ‘업무 변화’가 유독 많이 지목되었습니다.


출처: 인사이트

콘도 총무팀에서 일하던 이씨가 남긴 것은 업무 수행의 어려움, 회사의 위법한 업무 처리 등을 적은 유서 한 장이었습니다. 


조건·상황 고려 없는 ‘성과주의’ 


한 생명보험사 지점장이었던 전아무개씨는 일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로 목표 대비 실적을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2013년 1~3월까지 영업실적이 27% 하락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던 전씨는 2013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미주 한국일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은 오랫동안 해온 익숙한 일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자였던 강아무개씨는 입사 19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부로 인사 이동되자 정신적 스트레스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강씨는 부서를 옮겼지만 우울증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4대강 특집 기획기사를 준비하다 2011년 9월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출처: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근로복지공단은 “20년 기자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스트레스는 인정되지만 사망으로 이어질 만큼의 부담은 아니다”라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2014년 11월 “4대강 특집 기획제작을 맡게 되면서 평소의 2배 되는 분량의 일을 소화해내기 위하여 심적 고통이 가중되었고 성과물을 내어야겠다는 정신적 압박감이 예전보다 심했을 것”이라며 판단을 뒤집었습니다.


‘해고’는 살인이었다


출처: 드라마 <송곳>

해조류 가공식품 업체에서 일하던 박아무개씨는 회사와 갈등을 빚다 2013년 3월 해고 통보를 받자 자살을 택했습니다. 회사 사장은 CCTV로 직원들의 근무를 관리했고, 사장의 잦은 질책에 일부 직원들이 출근을 거부하며 반발했습니다. 사장은 박씨가 주도했다고 보고 박씨와 동료들을 해고했습니다. 


광주고법은 2015년 “자신이 해고를 당하였다는 정신적 충격 외에 자신 때문에 동료들까지 해고를 당했다는 자책감까지 더해져 감내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며 박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정신질환 위험 요소 


출처: 티스토리

서울도시철도 5호선을 운행하던 이아무개씨는 2013년 3월 자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5호선은 모든 구간이 지하로 분진 농도가 높은데도 환기가 어려웠고, 당시 9조5교대라는 근무형태도 일반인의 생활 패턴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법원은 “열악한 근무환경은 의학적으로 정신질환의 발병 또는 악화에 일부 위험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출처: kbs news

서울메트로 기관사인 김아무개씨도 2007년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은 2009년 김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며 “기관사로 고속운행에 대한 불안감, 정확한 시간에 출발과 하차를 반복하여야 한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 운행 지연으로 인한 경위서 제출과 승객 항의 등으로 지속적인 정신적·심리적 스트레스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김씨 판결문은 일반적인 지하철 기관사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짚었습니다. 기관사들뿐 아니라 최근엔 감정노동자들의 정신건강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스트레스에 노출되기 쉬운 업무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노동자들의 정신질환 예방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자살도 산재가 되나요?


출처: MODU

자살도 산업재해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다만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말하는 ‘업무상의 재해’는 업무상 사유에 따른 노동자의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살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으려면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출처: kbs news

산재보험법 37조 2항은 ‘근로자의 고의·자해나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같은 조항에서 ‘그 사망이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한 행위로 발생한 경우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으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산재보험법 시행령 36조는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를 했다는 게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등을 업무상 재해로 보고 있습니다.


자살,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 동안 근로복지공단이 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사례는 유가족의 신청 190건 중 59건(31.1%)에 불과합니다. 

출처: ytn

<한겨레신문>과 함께 판결문을 분석한 권동희 노무사(법률사무소 새날)는 '자살도 산재가 될까'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자살 사건을 심의할 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의학적 판단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의학적 판단은 아무래도 업무상 구조적인 문제보다, 노동자 개인의 문제에 집중해서 보는 한계가 있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가 어렵다.
대법원이 자살과 업무의 인과관계의 기준을 ‘사회 평균인’인지 ‘당사자’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아 혼돈이 초래되고 있다. 다른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과 마찬가지로 자살 사건도 ‘당사자’의 처지에서 판단해야 한다.
출처: 디베이팅데이
기사출처 /  자살이 아니다, 그건 산재였다
(<한겨레>, 2017.06.27)
글 / 김민경 기자
편집 및 제작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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