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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열사를 아십니까

조회수 2017. 5. 18. 11: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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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5·18민주묘지를 참배한 뒤 윤상원 열사의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문 대통령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5·18민주묘지를 방문하면 반드시 찾는 곳이 바로 윤상원 열사의 묘역입니다. 

출처: 전남일보

그렇다면 윤상원 열사는 누굴까요? 

윤상원 열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윤상원은 탁월하게 용감했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기를 그의 지지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와 최후의 투쟁 속에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윤상원은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5·18 당시 볼티모어 선 도쿄지국장이었던 브래들리 마틴의 말입니다. 그는 1980년 광주에 들어와 윤상원 열사를 만났고 위와 같은 평가를 남겼습니다. 

출처: 한겨레

윤상원 열사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평생직장'이라 불리는 서울 주택은행에 취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동운동에 뜻을 품고 1978년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78년 7월, 박기순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노동자 야학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출처: 광주일보
들불야학의 체육대회

윤상원 열사는 이후 신군부 세력에 맞선 시민군이 됐습니다. 특히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항쟁이 있기 바로 전날인 5월26일, 그는 외신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곳에서 신군부의 만행을 밝히고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신기자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스에게 '미국이 개입하라'는 말을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5·18의 비극을 멈추고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왜 외신기자회견에서 이런 부탁을 한 걸까요? 한국에도 언론이 있었을 텐데 말이죠.

당시 언론 상황 때문이었는데요. 신군부의 언론 검열로 5월 광주 상황을 제대로 전한 국내 언론은 없었습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과 통신은 끊겨 있었기 때문에 광주 바깥의 시민들은 언론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한겨레

5·18의 진실은 독일 기자였던 고 위르겐 힌츠펜터 씨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푸른 눈의 목격자'로 유명한 그의 취재 영상이 독일 제1공영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5·18 진상규명에 대한 여론에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겨레

'푸른 눈의 목격자'가 80년 광주에서 본 수많은 윤상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연한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5·18인 오늘, 5월 영령들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작 및 편집 / 나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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