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S 게임의 로망 저격수, 실제는 어땠을까?

조회수 2018. 3. 14. 11: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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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저격수의 역사와 게임에 묘사된 저격수 간의 간극을 살펴본다
전쟁은 잔혹하다. 그걸 바꿀 필요는 없다. 전쟁은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빨리 끝나니까.
-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

FPS 게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저격’이다. 적의 총알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조준경 안에 들어온 적을 한 방에 쓰러뜨리는 쾌감은 많은 게이머들이 FPS에서 굳이 저격수를 고집하는 이유다. 때로는 가능할 법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저격총으로 적을 잡는 FPS 고수를 보면 탄성과 함께 질투가 절로 날 정도다. ‘남자의 로망’이라며 칭송을 받는 이유를 알 법 하다.

▶ 이렇게 보면 또 게임이나 현실이나 크게 달라보이지 않기도 한데...

그렇다면 실제 저격수의 모습은 어떨까? 아마 대대수가 알고 있는 저격수의 모습은 때때로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뭔가 치렁치렁한 위장복을 입고 길고 커다란 총을 든 모습 정도가 아닐까? FPS 게임의 ‘로망’으로도 불리는 저격수. 진짜 저격수의 역사와 게임에 묘사된 저격수 간의 간극을 살펴본다.

작고 빠른 새도 잡을 정도의 명사수

우리말로는 ‘저격수’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Sharpshooter나 Marksman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단어는 역시 ‘스나이퍼(Sniper)’일 것이다. 이 단어는 18세기 말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군 사이에서 시작된 말이다. ‘Snipe’라는 말은 인도에서 볼 수 있는 도요새를 가리키는 말로, 이 새는 보호색과 빠른 비행 속도를 모두 갖추고 있다.


    

서양에서 18세기에 널리 쓰이던 머스킷총으로는 이 도요새를 쉽게 잡기 어려웠다. 부싯돌로 화약에 불을 붙이는 발사 방식도 그랬고, 근대 총기처럼 정밀한 강선이 파여 있어 명중률이 대단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총으로 날랜 도요새를 잡는다는 것은 곧 정말 뛰어난 사격감각을 가진 명사수를 뜻했다. 날랜 도요새를 잡을 만큼 훌륭한 사수라는 뜻에서 ‘스나이퍼’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 18세기의 총으로 보호색을 갖춘데다 민첩하기까지 한 도요새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럽 본토에서는 Sharpshooter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이 단어는 독일어의 Scharfschützen에서 온 것이다. 근대까지 숲지대가 풍부했던 독일에서 사냥은 곧 일상생활이었고, 사냥꾼(Jäger)은 당연히 활이나 총 등 원거리 무기를 능숙히 다루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Scharfschützen은 사냥꾼 중에서도 특히 실력이 좋은 사람을 뜻했다. ‘scharf’라는 독일어는 날카로운 혹은 정확한이라는 뜻이고, ‘schützen’은 ‘사수’를 말하니 이 역시 우리말로 옮기면 바로 ‘명사수’를 뜻하는 단어다. 사냥꾼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일종의 정예부대로 징집되었고, 숲에서 사냥감을 잡던 실력을 적에게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 독일 지역에서 '예거' 하면 정예 경보병 부대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전장에서 이들이 떨친 용명 덕분에 본래 사냥꾼을 뜻하던 단어는 그대로 특화된 정예보병부대를 뜻하는 말로 변화했다. 예를 들면 독일의 예거(Jäger)나, 프랑스의 샤쇠르(Chasseur)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호랑이 포수를 별도로 조직해 전장에 동원한 일이 있으니 사냥꾼 하면 정예보병이라는 인식은 세계 공통이었던 셈이다.


   

한편, 특정한 적을 정확히 노려서 사살하려는 시도는 꽤 일찍부터 있었다. 18세기 말 미국독립전쟁이나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강선이 파여 있는 ‘라이플(Rifle)’ 총으로 무장한 부대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미국 독립전쟁 과정에서 독립군의 사수가 전선시찰 중인 영국군 사이먼 프레이저 장군을 저격해 사살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전쟁의 주된 양상은 보병 대열이 선형을 유지한 채 일정 거리 내로 접근해 상대방에게 일제 사격을 가하는 방식이었고 ‘라이플’의 활약은 여전히 비주류였다.

게다가 ‘적(특히 장교)의 머리를 정확히 노려’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미국독립전쟁 당시 명사수로 유명했던 한 영국군 장교는 자신의 사거리 내에 들어선 미군 장교를 발견하고 조준했지만 곧 사격을 포기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장교를 적이라고 해서 그런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난 미군 장교의 이름은 바로 조지 워싱턴이었다.

저 놈들은 이 거리에서는 코끼리도 맞출 수 없어!

새로운 기술이 낳은 새로운 전법

그러나 이런 상황은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빠르게 변화했다. 변화를 낳은 것은 역시 기술이었다. 특히 ‘저격’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연화약(탄환 및 발사장치의 진보)의 발달, 산업혁명과 함께 발달한 기계공학(강선 및 대량생산), 마지막으로 광학 조준경(Scope)의 발달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주요 목표물’을 원거리에서 사살하는 부대의 개념이 각 국에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첫 조짐은 미국에서 벌어진 남북전쟁(1861~1865)이었다. 북군과 남군 모두 유럽에서의 그것처럼 사냥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특별 편성했는데, 조준경이 달린 고성능 총을 무장으로 지급했다. 이들의 목적은 정찰과 적과의 거리 판단, 적 장교나 포병 사살 등으로 현재의 저격수와 거의 비슷한 임무를 맡았다.

▶ 미국 남북전쟁 시기의 '명사수'.

지금도 많은 저격수가 그렇듯 이 명사수들은 목적을 위해서 제식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했다. 멋들어진 군복이나 계급장 대신 온갖 잡다한 옷을 입고 모자에 나무나 풀을 붙이는 등 위장에도 나름 신경을 썼다. 지휘관이 ‘내 부하들은 군복 빼고는 다 입고 다닌다’라며 불평했을 정도다. 이들은 적 장교를 사살해 대혼란을 일으키고, 포병에게 위협사격을 가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등 맹 활약을 했다.


   

1864년 5월 9일, 전선을 시찰하던 북군 6군단장 존 세지윅(John Sedgwick) 소장은 남군 저격수의 위협 때문에 엄폐하던 부하들에게 “뭐가 두려워 그렇게 숨어있나? 저 놈들은 이 거리에선 코끼리조차 맞출 수 없어!”라며 일갈했다. 공교롭게도 장군이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1km 밖에서 날아든 남군 저격수의 총알이 왼쪽 눈에 명중했고,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는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최고 계급의 장성이었다.

▶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 6군단 사령관 존 세지윅 장군. 전선 시찰 중 남군 저격수의 총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유럽에서도 ‘저격’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1870년 발발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고성능 소총을 이용해 일반 보병의 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격을 시도해 프로이센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프로이센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프로이센군도 사냥에 능숙한 장교를 투입해 프랑스군 사수를 사살하는 등 저격전은 ‘스나이퍼’라는 말이 정착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편 영국군은 이런 전쟁 양상의 변화에 시큰둥했다. 멋진 '레드코트'로 잘 알려진 대영제국의 군대는 세계 최강이었고, 어떤 적과 싸워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장거리 사격이 필요하면 그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장교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일제사격을 하면 될 일이었다. 영국군의 이런 착각은 얼마 뒤 벌어진 제2차 보어 전쟁에서 호되게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 보어 민병대. 실제로는 농부가 사냥총을 들고 모인 수준이었지만, 이들은 게릴라전으로 영국군을 괴롭혔다.
▶ 보어인 코만도(Commando). 이들은 독일에서 수입한 최신 소총으로 영국군을 끈질기게 괴롭혀 악명을 떨쳤다.

1899년 영국군은 남아프리카를 침공했다. 이 지역에는 네덜란드계 보어인이 식민 지배자로 살고 있었는데, 이미 1880년 제1차 보어 전쟁으로 영국군과 한 판 붙었고 평화조약을 체결한 전력이 있었다. 이 당시에도 보어인들은 멋들어진 '레드코트'를 입고 있는 영국군을 조준 사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영국은 결국 남아프리카에 세워진 보어인의 국가를 승인했지만, 얼마 뒤 다이아몬드와 금광이 발견되자 다시 한 번 전면 침공을 단행한 것이다.


   

영국군에 비하면 보어인들은 한 줌에 불과했고, 대부분 농부들이 사냥하던 실력으로 총을 들고 나선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두 가지 무기가 있었다. 하나는 고성능 소총이었고, 하나는 남아프리카가 자신들의 안방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보어인들은 막강한 병력을 자랑하는 영국군을 비웃듯 원거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지독하게 괴롭히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 1900년 1월, 영국군은 스피온 콥(Spion Kop)에서 보어측의 신형 무연 화포 사격과 집중 저격에 참패를 당했다.
▶ 영국군은 보어인의 농장을 불태우고 남은 가족을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

대열을 맞춰 행군하는 영국군은 남아프리카의 평원에서 아주 잘 보이는 목표물이었고, 곧 보어인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영국군을 끈질기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영국군의 생각처럼 보병끼리 접근해 일제사격으로 전투를 끝내긴 고사하고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보어인의 총알에 영국군이 하나 둘 쓰러져갔다.


   

결국 화가 난 영국군이 보어인의 농장을 몽땅 불태우고 가족들을 수용소에 가두는 초토화 작전을 벌이고, 3년간 45만에 달하는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투입하고 나서야 보어인을 제압할 수 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보어인은 말도 안 되고 불쾌한 짓을 전쟁이라고 수행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겼으니 영국은 이 기억을 묻어버렸지만, 몇 년 뒤 또 한 번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놈들은 '스나이핑'을 하고 있다.

‘스나이퍼’의 등장

1914년 7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다. 곧 끝날 것 같던 유럽의 전쟁은 결국 연합군과 독일군 양 측 모두 깊은 참호를 파고 버티기에 들어가는 전쟁이 되었다. 수 킬로미터의 점령을 위해 수천, 수만명이 무의미한 돌격을 하고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대전 초기부터 저격수를 조직적으로 투입해 큰 성과를 올렸다. 과거 사냥꾼 시절의 전통을 잇는 명사수(Scharfschützen)들이 독일군 내에서 특별한 과정을 거쳐 선발되어 전선에 속속 도착했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던 연합군도 ‘참호에서 머리를 맞아’ 사망하는 전사자가 늘기 시작하자 이것이 의도적인 저격임을 눈치채게 되었다.

▶ 독일군 저격수가 날뛰기 시작하면서 관측 조차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로 돌변했다. 적을 감시하고 있는 프랑스군

영국군 병사들은 고향에 부치는 편지에서 이런 독일군을 가리켜 ‘적이 우리를 스나이핑(sniping)’하고 있다고 쓰기 시작했고, 이것이 점차 퍼져서 곧 ‘스나이퍼’라는 말은 저격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영국군은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 속사를 통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 장기였지만,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저격수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저격 대결은 점차 치열해졌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사냥꾼을 모병한 정예부대에 익숙한 프랑스군도 저격전에 뛰어들었고 가장 늦게 참전한 미군도 종특(?)을 살려 저격에 열을 올렸다. 사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오스트레일리아군도 특기를 살려 저격에 나섰다.


   

저격 ‘기술’도 차츰 발전했다. 처음에는 지급된 제복을 그대로 입고 저격하다가, 곧 주위 지형과 비슷한 색깔의 ‘사제’ 옷을 입거나 수풀이나 나뭇가지를 이용한 위장을 시작했다. 밋밋하던 참호는 곧 철판과 모래주머니, 철조망으로 어지럽게 ‘장식’되었다. 

▶ 나뭇가지로 잘 위장한 오스만 제국군 저격수(가운데)가 좌우의 오스트레일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혀 '인증샷'을 찍은 모습이다. 1915년 갈리폴리 전투 중.
▶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군 저격수. 이미 저격수와 감적수 2인조로 구성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적 저격수를 처치하기 위한 '역저격' 기술도 이미 제1차 세계대전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왕립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 소속 병사가 총에 헬멧을 올려 오스만 제국군 저격수를 낚고 있다. 동료들은 잠시 단잠에 빠졌다.

잘 위장된 저격 장소에서 적 참호를 노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저격은 밤에도 계속되었다. 참호에서 함부로 담뱃불을 켜면 곧 총성과 함께 머리통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저격수와 감적수(Spotter) 2인조로 저격을 수행하는 전법도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역저격, 단 하나의 특이점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방식의 정밀 정찰 등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많은 저격 기술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시행착오를 거쳐 발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이 멎는 그 날 까지 저격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사자 중 한 명인 캐나다군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 이병(George Lawrence Price)은 1918년 11월 11일 오전 10시 58분, 휴전 2분전에 독일군 저격수의 총탄에 사망했다.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고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전쟁, 그리고 저격은 다시 없을 것이라 방심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저격수는 나치당에서 살인을 즐기는 인간쓰레기들을 특별히 모아 편성한 놈들이다. 이들은 인간적인 감정따윈 없으며, 여자와 아이들을 취미로 쏘아 죽인다.
- 소련군 선전물

치열한 저격전이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평화는 채 20년도 가지 못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유럽에서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스페인 내전은 사실상 독일 및 이탈리아 대 소련의 신무기 실험장이나 다름 없었다. 독일과 소련은 각각 교관을 파견해 스페인인들에게 저격을 교육했고, 대리 저격전이 벌어졌다.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이어 11월에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했다. 금방 정리될 줄 알았던 핀란드는 40년전 보어인들이 영국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압도적인 병력의 소련군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핀란드인들은 광활한 설원과 침엽수림에서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게릴라전과 저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설적인 저격수로 꼽히는 시모 하이하는 겨울전쟁 기간 동안 500명 넘는 소련군을 저격으로 사살했다. 조준경도 없이 맨 총으로 말이다!

▶ 시모 하이하(Simo Häyhä, 1905~2002), 겨울전쟁 당시 총 500명 이상의 소련군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조준경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가늠자와 가늠쇠로 저격을 수행했다.

소련은 백만명 넘는 병력을 동원하며 이듬해 3월 핀란드를 간신히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약 15만명(추정)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소련은 방어전(특히 혹한기)에서 저격수가 얼마나 강력한지 온 몸으로 맛본 셈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은 얼마 후 벌어진 독소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은 한 때의 우방국이던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의 저격수는 진격하는 독일군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후퇴하는 아군의 후방에서 독일군을 저지했다. 열 받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힐 경우 고문과 학대 후 살해당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소련군 저격수는 몇 년 전 핀란드군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독일군을 저격했다. 독일군도 소련군의 저격에 대항하기 위해 한동안 잊고 있던 저격수 육성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동부전선은 곧 치열한 저격전의 장이 되었다. 

▶ 소련군은 여성 저격수를 전장에 투입했다. 1945년 동프로이센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54명의 독일군을 사살한 여성 저격수 로자 샤니나(Roza Shanina, 1924~1945). 불과 20세의 나이에 전사하고 말았다.
▶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1924~2004).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독일 산악병 부대에 복무, 동부전선에서 345명을 사살했다. 1100m 거리에서 저격에 성공했으며, 저격으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기사철십자장까지 받았다. 대전 말기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살아남았다. 공교롭게도 위의 로자와 동갑이다.

독일군의 진격이 둔화되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계기로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자 이번에는 독일군의 저격이 기승을 부렸다. 독일군 저격수는 초급 장교를 죽이거나, 선두에 선 병사의 배를 일부러 항공기용 특수관측탄(목표물에 맞으면 폭발하며 불이 붙는다)로 사격해 적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연합군과 일본군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남태평양의 정글섬에서 일본군 저격수는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툭하면 자살 돌격을 벌였던 다른 일본군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최대한 많은 미군을 사살하라는 교육을 받고 충실히 따랐다. 정글에 맞게 잘 위장하고, 적이 잘 보이는 열대수 위에 자신의 몸을 묶고 발각되어 시체가 될 때까지 저격을 하는 일본군 저격수에게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44년에 접어들자 추축국은 패색이 짙어 졌다. 노르망디에는 연합군이 상륙했고, 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의 소위 ‘대동아 공영권’이 날로 축소되고 있었다. 대전 말기 최후의 발악으로, 독일군은 적외선 투시경을 동원한 야간저격을 실시했다. StG 44 돌격소총에 커다란 적외선 장비를 달아 야간에 시야를 확보하는 식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때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 저격수들은 최후까지 저항했다.


    

한편 이오지마나 오키나와 같은 일본 본토 쪽으로 진격을 거듭할수록 일본군의 저격수는 더욱 골칫거리가 되었다. 잘 위장된 은신처를 오가며 저격을 일삼는 일본군 저격수에 대항해 연합군은 온갖 방법을 다 사용했다. 대항 저격은 물론이고, 숨어 있을 곳에 산탄포를 쏴 통째로 날려버리는 방법, 대구경 대전차 소총을 갈기는(어지간한 열대수 잎은 뚫어버렸기에 효과가 좋았다) 방법도 사용했다. 나중에는 화염방사기나 폭약이 동원되었다. 저격수 은신처에 불을 질러버리거나 폭약을 사용해 통째로 땅 속에 생매장했다.

▶ 일본군 저격수는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잘 숨겨진 은신처에서 저격을 해 미군의 골치를 썩였다. 일본군 저격수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권총을 겨눈 채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미군.
▶ 태평양 전쟁 말기가 되자 미군은 그냥 화염방사로 싹 태우는 쪽을 선호했다. 대전차무기가 빈약한 일본군은 속수무책이었고, 저격수는 아예 방도가 없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토치카와 저격수 은신처를 정리하는 미군 화염방사 전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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