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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장을 치른 그의 아내가 수척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조회수 2020. 10. 14. 13: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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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좀 깍아 주세요

암 병동 간호사로 야간 근무할 때였습니다. 새벽 다섯 시쯤 갑자기 병실에서 호출 벨이 울렸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런데 대답이 없었습니다.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창가 쪽 침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병동에서 가장 오래 입원 중인 환자였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놀란 마음에 커튼을 열자 환자가 태연하게 사과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간호사님, 나 이것 좀 깎아 주세요.”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겨우 사과를 깎아 달라니, 그만 맥이 풀렸습니다. 옆에선 그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건 보호자님께 부탁해도 되잖아요.”

“그냥 좀 깎아 줘요.”


다른 환자들이 깰까 봐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어 못내 사과를 깎았습니다. 그는 내가 사과 깎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번에는 먹기 좋게 잘라 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사과를 반으로 뚝 잘랐습니다. 그러자 예쁘게 좀 깎아 달라더군요. 할 일도 많은데 별난 요구를 하는 환자가 못마땅해 못 들은 척 사과를 대충 잘라 주었습니다. 


깎은 사과의 모양새를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그를 뒤로하고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습니다.


며칠 뒤, 그는 상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일장을 치른 그의 아내가 수척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사실 늦은 밤, 새벽에 사과 깎아 주셨을 때 저 깨어 있었어요. 그날 아침,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며 깎은 사과를 내밀더라고요. 제가 사과를 참 좋아하는데 남편은 손에 힘이 없어 깎아 줄 수가 없었어요.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던 마음을 지켜 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간호사님이 바쁜 거 알면서도 모른 척 누워 있었어요.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정말 고마워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새벽, 가슴 아픈 사랑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심하고 어리석었던 걸까요.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의 전부였던 환자와 보호자, 그들의 고된 삶을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던 그녀는 손을 잡아 주며 말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 선물을 하고 떠나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것으로 충분했노라고.

-

지금까지 강원도 횡성군에서 원순진님이 보내 주신 사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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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좋은생각 목소리 서포터즈 1기
'전은희'님의 목소리로 녹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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