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첫출격 성과는?

조회수 2017. 10. 23. 16: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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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격 나선 가미카제… 피해만큼 성과는 못 내

1944년10월 25일

연합군 항공모함 침몰 시도 실패

약 1500명의 조종사 전사하기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우위를 점했던 제공권은 1944년 10월 무렵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일본의 베테랑 조종사들은 대부분 전사한 데다 한때 공중전의 제왕이었던 제로식 전투기에 대항할 수 있는 전투기를 미국이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그들이 1년 동안 훈련시켜 배출한 조종사 수와 맞먹을 정도의 조종사를 하루 만에 잃기도 했다. 미 해군이 일본 본토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은 극단적인 공격법을 도입했다. 1944년 10월 19일 오니시 다키지로 해군중장은 필리핀 레이테 만에서 작전을 지원하던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가미카제 특공대를 결성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가미카제(神風)’라는 말은 1274~1281년 일본을 공격한 몽골 함대를 파괴했던 태풍을 일컬어 ‘신의 바람’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인데 이 제안은 열렬한 지지 속에 실행에 옮겨졌다.

다마이 아사이치 중령은 훈련생들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첫 번째 특공대를 구성했고 세키 유키오 소령이 지휘를 맡았다. 첫 번째 특공대는 1944년 10월 21일 레이테 만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함을 공격해 9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공격은 정확히 말해 특공대 소속 전투기가 아닌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미쓰비시 전투기가 한 것이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해군 항공대 소속으로 제로식 전투기를 운용했다.

출처: iliketowastemytime.com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공격 등 해전상황을 그린 상황도.

1944년 10월 25일, 가미카제 특공대는 출격에 나서 호위용 항공모함 5척을 공격, 1척을 침몰시켰다. 연이어 7척의 항공모함과 함대를 이루고 있던 다른 선박 40척을 공격해 그 중 5척을 침몰시켰고 35척에 피해를 입혔다. 공격은 선박에만 머물지 않고 미군 B-29 전략폭격기에도 돌진케 했다.

연합국 선박을 공격하는 것이 꽤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태평양 전투 마지막까지 가미카제 공격은 계속됐다. 가미카제 공격이 연합군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것은 1945년 4월 오키나와 침공작전 때였는데 36척의 연합군 선박과 상륙용 주정을 침몰시켰고 368척에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주요 공격 목표였던 항공모함은 전혀 침몰시키지 못했다. 이때 약 1500명의 가미카제 조종사들이 전사한 데 비해 놀라운 성과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미국 항공모함은 침몰되진 않았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갑판이 목제였기 때문이다. 1945년 3월 1일 한 대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미 해군의 벙커힐 항공모함은 승조원 389명이 전사할 정도로 피해를 봤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 기간에 전사한 영국 항공모함 6척의 승조원 수보다 많았다. 영국 항공모함은 전쟁 동안 8번의 가미카제 공격을 받았는데 20명이 사망했을 뿐이다. 차이는 갑판에 있었다. 미국은 목제였지만 영국은 장갑 갑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은 가미카제 공격을 받으면 대규모 수리 작업이 필요했지만, 영국 항공모함은 항공기 잔해들을 옆으로 치워내고 아무 일 없었던 듯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국방일보 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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