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번역의 세계] 번역가를 꿈꾸신다면

조회수 2017. 11. 9. 22:56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12)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12화 '번역가를 꿈꾸신다면'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글쓰기 교실, 책 쓰기 교실이 부쩍 늘었다. 요즘도 여기저기 안내문을 본다. 어쩐 일일까? 독서율이나 도서 구매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데.


글쓰기 수업을 찾는 이들의 적지 않은 수가 퇴직자라는 말을 들었다. 은퇴 후 인생 2막으로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친구와 그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왜 그럴까? 못다 한 문청의 꿈을 이루려고 뒤늦은 도전에 나선 걸까?”


교과서적인 내 해석에 친구는 지극히 현실적인 답으로 응수했다.


“생각해봐. 어느날 다니던 회사에서 나오거나 잘렸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치킨 집? 카페? 분식집? 뭐든 일단 돈이 들어. 초기 비용만도 어마어마하지. 그런데 글을 쓰는 일은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되잖아. 그것도 아쉬우면 그냥 원고지에 쓰면 되고. 작가처럼 돈 안 드는 직업이 어디 있겠니?”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곧이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그래, 글쓰기가 다른 창업만큼 돈이야 안 들겠지. 하지만 작가 노릇으로 입에 풀칠하기는 어디 쉬운 줄 아니. 국내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말은 못 들어봤니. 글만 써도 될 것 같은 유명 작가가 왜 여기저기 행사에 불려 다니고 화면에 어색한 얼굴을 내비치는지 모르니-라는 말폭탄이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굳이 친구 면전에 쏟아놓진 않았다.


작가뿐만이 아니다. 사실은 번역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몇 년 전이었다. ‘번역가가 되는 법’을 주제로 한 책이 나온 적이 있었다. 광고 문안이 솔깃했다. 번역 일을 하면 나중에 월수입이 3,400만원까지 간다는 말도 있었다.


책은 꽤나 잘 팔렸다. 그 책을 사서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월수입 3,400만원은 너끈히 보장될 거라고 믿은 사람이 그만큼 많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번역 인구가 딱히 급증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그건 아닐 거다. 아니면 적잖은 사람이 책만 사고 작심삼일 끝에 손을 들고 말았거나.

혹시 번역가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고픈 분이 있다면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있다. 이 일도 작가처럼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일단 시작할 수 있다. 우리말로 옮기려는 텍스트의 해당 외국어는 물론 국어 실력만 있으면 창업 준비는 된 셈이다.


그게 다일까. 해박한 외국어, 사양 좋은 노트북 못지 않게 중요한 게 또 있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애정이다. 너무 뻔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요건이다.


생각해보시라. 하루 종일 책을 붙들고 두 나라 언어 사이에서 한 문장 한 단어와 씨름한다. 간신히 끝내고 나면 그 다음 책이 기다린다. 두 권, 세 권을 병행할 때도 있다. 해가 가고 달이 가도 일은 반복된다. 책 자체를 웬만큼 좋아하지 않고서는 지속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좋아하는 책이 놓아준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다보니 어느새 지금 여기까지 이르렀다.

첫 디딤돌을 만난 것은 7살 때였다. 당시 아버지가 도서 외판원이셨다. 어느날 우리집에도 100권짜리 계몽사 전집을 떡하니 들여놓으셨다. 처음 잡은 책이 ‘집 없는 아이’였다. 그걸 지금껏 기억하는 걸 보면 내겐 일대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전까지는 틈만 나면 밖에서 친구들과 놀던 아이였다. 아니면 집에서 TV를 보거나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그런 내게 활자 속 세상은 신세계였다. 그 뒤로 나는 책이라는 종교의 신도가 됐다.


계몽사 문고 덕분에 책 세례는 받았지만 그때만 해도 책은 흔치 않았다. 친구 집에 가면 책부터 살피곤 했다.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해도 소심한 성격 탓에 빌려달라는 말을 끝내 입밖에 내지 못한 채 돌아온 적도 많았다. 그런 내 마음을 엄마는 아셨다. 형편이 닿는 대로 책을 사주시는 데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도 기억 난다. 고향인 순천에서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 가서 1년쯤 단칸방에 살던 시절이었다. 그때 엄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어느 날 엄마 가게에 함께 앉아 있는데 신문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청소년 소설 50권짜리 전집 광고였다.


그 목록을 읽고 또 읽으며 신문지만 쓰다듬었다. 며칠 후였다. 그 전집이 집으로 배달돼온 것 아닌가. 읽고 싶은 책을 안아든 기쁨보다 책값 때문에 애쓰셨을 엄마 생각에 아픔이 먼저 밀려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교 공부에 눌려 책을 맘대로 읽지는 못했다. 그래도 완전히 놓진 않았다. 고교 시절 사춘기가 시작됐을 때는 주로 어렵고 두꺼운 책을 들고 다녔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펄벅의 <대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남달라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한껏 고개 들 나이 아닌가. 덕분에 니체며 릴케며, 이런 지성남들을 사로잡은 '팜므 파탈' 루 살로메며 하는 인물에도 눈을 떴다.


책을 제대로 읽고 토론까지 한 것은 대학 입학 후 문학 동아리에 든 뒤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 세미나였다. 사실 그때 열심히 읽고 공부를 하긴 했지만 나중에 먹고사는 데는 별 쓸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요즘 내가 번역하는 소설의 기본 철학이 실존주의라는 사실.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다.

영어로 된 외서를 접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가서 처음 읽었다. 영어 공부를 할 요량으로 잡은 원서가 스티븐 킹의 공포 소설 단편집이었다. 그때는 이름도 별난 이 저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저 영미인들이 장시간 비행기를 탈 때 가져가는 책 1순위라는 광고 문구에 혹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원어로 읽는 것이 번역본과는 또 다른 경험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또 한 번 활자의 신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비교적 읽기 쉬운 탐정 소설과 로맨스 소설 원서에 빠져들었다. 차츰씩 영어 실력도 늘어갔다. 지금의 독서 체력은 원서 읽기에 재미를 붙인 데 따라온 부수적인 결과물이었고, 그게 결국 생업의 밑천이 됐다.


원서 번역 과정에서 써보게 되는 검토서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 검토서란 출판사가 어떤 원서의 출간 여부를 결정할 때 참고하기 위해 의뢰하는 일종의 감정서를 말한다. 번역가도 사전에 일정한 양식에 따라 검토서를 작성해 출판사가 출간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곤 한다. 


내 경험상으로는 이런 것을 많이 써보는 것도 번역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검토서에는 작가 소개와 책의 줄거리와 주제, 책의 핵심 문장이나 감동적인 부분, 소위 셀링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을 고른 발췌 번역, 타겟 독자 예측과 아마존 독자평 같은 내용이 들어간다.

한 권의 원서를 읽고 줄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책을 읽을 때 눈에 들어온 감동적인 문장이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포인트를 밑줄 그어 놨다가 발췌 번역하다 보면 실력이 는다.


순수한 독자 입장에서 그 책이 어떤 매력이 있고,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일도 즐겁다. 아마존에 들어가서 독자평의 별이 몇 개인지, 리뷰는 얼마나 달렸는지, 가장 많이 읽힌 리뷰는 어떤 건지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책에 대한 식견도 늘고 고르는 안목도 높아진다. 그러다 애정을 담아 쓴 검토서가 통과돼 책이 계약되고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와 번역까지 하게 될 때는 보람도 크다.


운이 좋게도 나는 맨 처음에 써본 검토서가 통과돼 그 책을 맡아서 번역했고, 그 책이 자기계발서 부문 베스트 순위에도 올라 꽤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첫 검토서가 통과되기 전까지 무수한 책을 '검토'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면 검토서를 쓴다는 생각으로 연습을 해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처음부터 원서에 도전하는 것이 힘들면 국내 도서(혹은 번역서)를 한 권 골라 써보는 것도 좋다.


내가 이 책을 원서로 읽고 출판사에 출간 권유를 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쓴다고 생각하면 막연히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른 시각이 생길 것이다. 꼭 번역가가 될 생각이 없어도 좋다. 책 한 권을 이렇게 분석하고 해체해보는 것은 독서법으로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요즘도 간혹 출판사에서 매력적인 원서를 제시하며 검토를 의뢰해올 땐 기꺼이 맡는다. 운좋게 계약이 성사돼 직접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근사한 책을 만났다는 즐거움만으로도 보상이 된다.


누구보다 먼저 좋은 책을 읽고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 소개할 수 있는 기쁨을 위해 다른 모든 수고를 감내할 각오가 돼있는 사람에게 번역이란 좋은 직업이다. 보수와 직업의 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굳이 하지 않겠다.


좋아하는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반길 만한 운명이라 믿는다. 그 길 입구에서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일단 검토서를 써보시길.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북클럽 오리진] 컨텐츠 카톡으로 받아보기

북클럽 오리진의 후원 계좌는 신한은행 110-459-062359(오리진)입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