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번역도 크라우드소싱 시대

조회수 2017. 9. 1. 08: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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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13. 고마운 나의 숨은 조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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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반대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제13화 '고마운 나의 숨은 조력자들'입니다.


번역 일은 무한정 고독한 작업 같아 보입니다.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숱한 도움의 손길이 작동한다는군요.


자신의 부족한 점에 솔직해질 때 더 나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번역가는 고독한 직업인이다. 하지만 독불장군이어서는 곤란하다. 어려움에 처하면 도움이 필요하다. 그 덕에 원고는 좀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런 적이 많았다. 오늘은 그 경험을 이야기할까 한다.


크레이그 벤터의 『게놈의 기적』(2009)을 번역할 때였다. 이런 문장을 마주했다.


With the help of the Korean scientist C. Y. Jung, I would apply this approach to gauge the size of the receptor proteins we were attempting to isolate. (나는 한국인 과학자 C. Y. Jung의 도움을 받아, 이 방법을 적용하여 우리가 분리하고자 하는 수용체 단백질의 크기를 측정했다.)


여기에 나오는 한국인 과학자 C. Y. Jung의 한글 이름을 써주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크레이그 벤터와 함께 쓴 논문이 있었고, 메일 주소까지 나와 있었다. 연락을 했더니 다행히 답장이 왔다. 미국 버펄로대학교에 근무하는 정찬용 교수였다.

내친 김에, 나로서는 생소한 분야였던 유전체학의 용어나 개념을 설명해줄 만한 분을 추천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흔쾌히 경희대학교 김성수 교수를 소개해줬다. 나는 직접 찾아가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고맙게도 김 교수는 다시 내게 서울대학교 서정선 교수를 소개해주었다. 아마 이분들 도움이 없었다면 그 책을 번역하는 데 훨씬 더 애를 먹었을 테고, 오류도 많이 범했을 것이다.



로버트 P.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2012)를 번역할 때였다. 여기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2010)가 인용돼 있었다. 참고하기 위해 한국어판을 찾아 읽다보니 몇 군데 의문점이 눈에 띄었다. 직접 번역자 박경희 선생에게 문의해봤다.


보내온 답장을 읽어보니 박 선생의 단어 선택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고민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나는 내 생각에다 박 선생의 의견까지 종합한 끝에 인용문의 번역을 적절히 다듬어 출간할 수 있었다.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음은 물론이다.

리처드 하인버그의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2013)를 번역할 때는 몇몇 개념이 애를 먹였다. 첫 번째는 ‘leverage(레버리지)’라는 단어였다. 월가 금융 위기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개념인데 저자의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았다. 투자 전문 번역가인 이건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친절한 설명 덕에 레버리지와 수익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균제와 비례'라는 단어에 다시 멈춰 섰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에 나오는 개념을 인용했는데 도무지 명확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전건축의 시학』(2007)을 번역한 조희철 선생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선생은 참고 자료를 보내 왔다. 그제서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번역가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정보에서 도움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2015)을 번역할 때였다. 앞서 일리치의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2010),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2013) 등을 번역한 권루시안 선생의 홈페이지가 무척 요긴했다. 일리치를 번역하면서 자신이 선행해서 옮긴 용어들을 표로 정리해뒀는데 덕분에 손품을 많이 덜 수 있었다.


새로 번역을 시작한 마크 오코널의 『To Be a Machine』(근간)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대표작인 『창백한 불꽃(Pale Fire)』 첫 행이 언급돼 있었다. 마침 그 책을 같은 출판사에서 낼 예정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담당 편집자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번역문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아리송한 구절이 명쾌하게 해석돼 있었다. 쾌재를 부르며 그대로 써먹었다.

지금껏 이야기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 권 한 권 번역할 때마다 참 많은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작업을 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곧바로 해당 분야 전문가를 찾아 조언을 청한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알아내도 이메일이나 전화번호 같은 연락처를 얻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대개의 경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간편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됐다.


구문 분석이나 숙어 풀이 같은 언어적인 문제는 인터넷의 번역가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데, 질문을 다듬다가 답을 얻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은 내 소셜 계정에 질문을 올리면 사이버 친구들이 친절하게 댓글로 답을 알려주기도 한다.


한번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2011)에 나오는 'scrotumtightening sea'라는 표현을 트위터에 올려 물어봤더니 곧바로 Rekki 님이 '불알을 단단하게 하는 바다'라고 답했다.


또 한번은 모차르트가 작곡을 의뢰받았다가 취소당해 미완성으로 폐기한 작품이 뭔지 몰라 페이스북에 질문을 올렸더니 "오페라 「자이데」인 듯"이라는 답이 척하고 올라왔다. 이쯤 되면 크라우드소싱이라 할 만하다.

앞에서 번역가는 고독한 직업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외딴 섬이 아니다.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 홀로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때로는 전문가든 동료 번역가든 독자든 유능한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에 봉착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한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책 에릭 와이너의 『The Geography of Genius』(근간)를 번역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낯선 문장 하나가 나를 괴롭힌다. 저자는 니체가 한 말이라고 써놨는데 과문한 나로서는 도무지 초면이다. 저자가 착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속단할 순 없다.


이번엔 누가 나를 구제해주려나. 얼마 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2017)을 공역·출간한 김출곤 선생이 번득 떠오른다. 그는 블로그 '고싱가 숲'을 운영한다. 그곳을 통해 질문을 보낸다.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답장이 와 있다. 『1869~1874년 유고』에 실린 문장이란다. 아, 이제 안심하고 다시 마음껏 진도를 나갈 수 있겠다.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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