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몸에게 물어야 할 시간

조회수 2017. 8. 4. 08: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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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10)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10화 '내 몸과의 약속'입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다음 작품은 언제쯤 쓸 계획이냐는 질문에 이런 요지의 답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글쎄요. 이젠 소설을 쓰려면 내 몸에게 먼저 물어봐야 해요. 내 몸이 견딜 만하면, 그래도 된다고 허락하면 그때는 아마도 쓸 수 있겠죠."

소설은 머리나 가슴으로 쓰는 줄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그 대답이 참 신기했고 새롭게까지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젊었다.


요즘 그때 그 답변을 새삼스레 떠올릴 때가 많아졌다. 비슷한 질문이 내게 온다면 나 역시 "몸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앞세울 것 같다. 나이의 숫자가 늘어서만은 아니다.


번역가의 일이란 마감에 살고 죽는다. 시간에 가위 눌려 산다. 몸을 움직일 일도 많지 않다. 타고난 허약 체질에다 운동 부족까지 겹치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때가 많다. 지금까지 두 차례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


밝은 사연으로만 채워도 아까울 공간에 왜 하필 아팠던 이야기인가. 잠깐 고민했지만, 나만 이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냥 써보기로 했다. 아직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독자에겐 사전경보 효과도 있지 않을까.

첫 번째 위기는 마흔을 한 해 앞두고 찾아왔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겹쳤지만 치기 어린 심보 탓도 컸다. 시작은 단순했다. 친구 몇몇의 말이 화근이었다. 아니 그렇게 새겨들은 내 잘못이 컸을 것이다.


"회사원이 너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폼 나게 살았을 거야."


걱정인지 동정인지 모를 말에 그냥 웃고 넘겼지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내상을 입은 후였다.


어리석게도 내가 달려간 곳은 나를 더 혹사하는 길이었다. 그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마. 프리랜서로는 꿈의 연봉(그러니 미션 임파서블이란 뜻)이라는 1억을 목표로 삼고 질주했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일에 매달렸다. 그렇다고 주부와 엄마 역할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 틈틈이 살림도 하고 아이도 건사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했다.

마침내 그해 수입이 최고치를 기록할 찰나. 곳곳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턴가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막 몸을 푼 산모처럼 온 몸은 띵띵 부어만 갔다. 그 와중에도 내 눈은 목표액에 가 있었다. 머리는 닥쳐올 마감과 스트레스에 짓눌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결국 가족들 성화에 못 이겨 병원으로 향했다. 몇 차례 암 진단 검사까지 받는 지경이 돼서야 내 정신은 제자리를 찾았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견뎌야 했던 그 초조함이란.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샌 기억이 난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그 뒤로 6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라는 진단에 안도의 한숨이 새나왔다. 1억 원에 목숨을 건 도박을 한 셈이었다.


그일이 있고 난 후로 몇 가지 수칙을 정했다. 무리하게 작업 일정을 잡지 말 것, 마감에 목숨 걸지 말 것, 몸에 이상 신호가 느껴지면 반드시 검진을 받을 것.

규칙적인 운동도 항목에 넣었다. 시도도 다양했다. 동네 헬스클럽(한 달 동안 거울 앞의 내 모습을 보며 러닝머신만 걷다가 지루해서 포기), 스피닝 클래스(세 번 나가고 구토 증세를 느껴 포기), 요가(무려 두 달을 채웠으나 동작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부실한 허리로는 도저히 무리라는 생각에 포기),


줌바 클라스(유일하게 좋아했고 심지어 잘한다는 칭찬도 받았으나 강사 선생님의 아이가 급성 백혈병에 걸리는 바람에 해산 ᅲ.ᅲ), 필라테스(좋긴 한데 너무 비싸다는 생각에 포기), 아쿠아로빅(선배 할머니들한테 밀려나면서 포기), 동네 호수공원 산책(봄, 가을엔 좋았지만 기온차가 극심한 계절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어서 포기) 등등. 참 무수한 운동을 거쳤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다시 예전처럼 마감과 마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기 시작했다. 식사도 대충 때우고, 시간이 나면 한 번씩 TV 드라마를 보며 소음방지용 고무판 위에서 걷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운동도 살림에 필요한 정도의 움직임으로 갈음했다.

곧바로 몸이 알아챘다. 다시 신호가 오기 시작했 다. 책상에 앉아 10분 정도만 지나면 다리가 저렸다. 증상은 점점 심해져갔다. 검진 수칙은 아랑곳없이 깡으로 버텼다(버티는 것 하나는 참 잘한다). 수술비도 신경이 쓰여 꾹꾹 참았다. 결국엔 두어 달 전 수술대에 눕고 말았다. 하지정맥류 수술이었다.


성실함의 대명사이자 자기 관리의 달인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경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늦건 빠르건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보복을 받게 됩니다. 한쪽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필연적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정맥류는 몸이 내게 날린 보복이자 경고였다. 그렇게 일만 하고, 운동은 게을리 하고, 몸을 돌보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호되게 본때를 보여준 두 번째 옐로카드.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생기는 하지정맥류는 오래 서 있거나 앉아서 일하는 사람에게 생기기 쉽다. 예방하려면 일하는 중간 중간 일어나 걷거나 스트레칭을 해줘야 한다. 하지만 번역 일이란 게 한 번 리듬을 타면 끊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할 때가 많았다.


수술까지 겪고 난 후에야 맘을 다시 고쳐 먹었다. 요즘은 1시간 작업하면 타이머가 울리도록 휴대폰을 설정해 둔다. 벨이 울릴 때마다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5분 정도 걷는다. 하루 작업량도 대여섯 시간으로 정했다. 시간이 지나면 목표치에 미달해도 무조건 작업을 끝낸다. 병원에서 내준 하루 1시간 걷기 숙제도 주 5일 정도는 이어가고 있다.

벤치마킹을 위해 다른 사람들 건강 비결도 찾아봤다. 미국의 위대한 복음주의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는 서재에 보내는 긴 시간 때문에 몸이 약해질까봐 겨울엔 장작을 팼다고 한다.(우선 도끼부터 장만?)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6시에 일어나 45분 동안 유연체조를 했다.(나는 저녁형 인간인데...)


벤저민 프랭클린은 하루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방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공기욕을 했다.(이건 좀 민망할 노릇)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매일 2시간 산책에서 5분이라도 빠지면 병에 걸릴 것처럼 두려워했다고 한다.(역시 답은 산책?)


동료 번역가나 작가들의 추천도 다양했다. 선배 번역가는 등산을 권했고,(그건 운동이 아니라 고행 아닌가?) 어떤 제자는 발레를 강추했다.(발레복을 입은 내 모습이라니!) 하루키처럼 달리기로 창작열을 지피는 작가나 번역가도 있다.(돈을 준대도 달리기는 싫다!) 춤을 권해준 소설가도 있는데 지금 체중에서 3킬로그램만 빼면 도전해보겠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내 몸에 맞는 이상적인 운동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은 거실에서건, 책상 옆에서건, 집 앞 호수 공원에서건 꾸준히 걷고 스트레칭에 매진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게 지금의 결론이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으려면 건강해야 한다. 이 자명한 이치를 몸으로 수용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앞으로 몇 십 년이 더 남았을까. 그 끝이 언제이든 열심히 걷고 또 걷겠다고 다짐한다. 내 몸과의 약속이다. 두 번의 경고가 아닌 두 번의 기회를 준 데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다.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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