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나는 더 인간다워지기로 했다

조회수 2017. 4. 14. 10: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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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8) 번역가의 운명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8화 '번역가의 운명'입니다.

몇 년 전 한동안 출판 번역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수강생들의 배경과 연령대가 생각보다 다양했다. 대학생부터 백수, 외국계 회사원, 강남에서 20년 넘게 영어 과외만 한 사람, 연봉이 수억 대라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도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60대 후반까지 나이 폭도 상당히 컸다.


번역은 여러 분야가 있지만 크게는 영상과 출판 번역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는 출판 번역이 연령 면에서 비교적 관대하다. 영상 쪽은 주 관객이 젊은층이다 보니 번역자도 통통 튀는 감각이 더 요구되는 반면 출판 쪽은 폭넓은 지식과 연륜이 필요한 데다 성격도 진중한 쪽이 더 잘 맞는 편이다.


그래선지 퇴직자들이 제 2의 인생으로 번역가를 꿈꾸며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혹은 일종의 플랜 B로 생각하고 오는 경우도 있다. 우선 '투 잡'을 뛰다가 번역으로 자리를 잡으면 그때 가서 하던 일을 그만두겠다는 이들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력만 있다면 학벌이나 나이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 곳이 출판계니까. 여든여덟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일본어 번역가 김욱 선생님 같은 분도 계신다. 지금도 여러 출판사에서 러브콜을 받는다는 그분을 보면서 나도 체력과 지력이 닿는 한 이 일의 은퇴 시기는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꿈은 최근 일취월장하는 번역기를 보면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작년초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을 때까지만 해도 좀 충격을 받긴 했지만 내 일상까지 영향을 줄 거란 실감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들어 구글 번역기에 이어 네이버의 파파고 번역 서비스가 된 것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번역이란 직업은 육체노동인 동시에 정신노동이다. 그 노고의 강도에 비하면 보수나 사회적 인정은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책에 대한 애정과 평생 일이라는 기대에 의지해 살아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오랜 방황 끝에 나름의 천직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새 일을 찾아봐야 하나. 인생의 가냘픈 꿈마저 빼앗긴 것 같아 울적하고 불안했다.

<역사 속에 사라진 직업들>이란 책이 있다. 미하엘라 비저란 독일 작가와 이르멜라 샤우츠라는 삽화가가 함께 만든 책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독특한 직업들의 생성과 소멸을 다뤘는데 별별 일들이 다 나온다. 예를 들면 만능식도락가, 이동변소꾼, 고래수염처리공, 오줌세탁부, 커피냄새탐지원 같은 직업들도 예전엔 있었던 모양이다.


만능식도락가는 대목장이나 서커스에서 비정상적인 물체를 삼켰다가 다시 뱉어내는 묘기를 보여주는 사람을 말하는데 과거 런던에는 돌을 씹어 먹는 공연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요즘 푸드 파이터로 모습을 바꿔 재등장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동변소꾼은 공공화장실이 생기면서 사라졌고, 코르셋이나 채찍용 소재로 쓰이던 고래수염을 다루던 고래수염처리공은 코르셋과 크리놀린 스커트의 유행이 끝나고 다른 인공 소재들이 발명되면서 퇴장했다. 오줌세탁부 역시 세제가 발명되면서 없어졌고, 국왕이 커피에 세금을 물리기 위해 고용했던 커피냄새탐지원은 결국 그 세금을 철회하면서 실직했다.

이 책의 저자는 직업이야말로 당대 세계를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했다. 책을 쓴 이유도 직업 자체에 대한 소개나 묘사보다 그것들의 존재이유를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번역가라는 직업의 운명은 어찌될까. 비용도 더 적게 들고, 마감 시간도 더 잘 지키고, 잠수를 탈 일도 없고, 손목이나 허리, 어깨가 고장 날 일도 없는 인공 번역기로 대체되고 마는 걸까? 그리하여 결국에는 책 속의 사라진 직업군에서나 보게 되는 걸까?


올해 발표된 번역기의 성능은 100점 만점으로 봤을 때 평균 55점 정도를 맞았다고 한다. 구글과 네이버의 추산으로는 앞으로 3년 내에 70-75점까지 올리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인공 지능의 발전 추세를 보면 일정 단계를 지나면 비약적으로 상승하니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국 문서 중에서 쉽고 자주 쓰이는 실용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기계 손에 넘어갈 것이다. 지극히 난해하고 철학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텍스트, 그야말로 인간만 이해할 수 있고 옮길 수 있는 텍스트만 남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번역가의 수도 큰 폭으로 줄지 않을까. 운 좋게도 그때까지 살아 남는 번역가는 정말 희귀한 존재가 될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원문 뒤로 몸을 숨기고 사라져야 하는 운명의 번역가가 이젠 정말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것까지 걱정해야 하다니.


몇 년 전의 그 번역가 지망생들은 이제 그 꿈을 수정하거나 접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부터 기계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조사를 통해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산업혁명 때 기계에 밀려 실직한 노동자들처럼 컴퓨터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에 뛰어들겠다는 것은 아니다. 포드가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면서 일을 잃게 된 마부들처럼 거리로 나설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방망이 깎던 노인‘의 신 버전이 되어 이제는 시대가 필요로 하지 않는 재능과 함께 스러져 가는 운명을 잠자코 수용할 수도 없는 일. 그 노인 같은 경지의 재능과 기예도 내게는 없거니와 내세울 만큼의 장인 정신도 없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나마 문학과 철학 같은 분야는 당분간 기계가 대체하기 힘들다고 본다면, 그때까지라도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의 날을 다듬는 수밖에 없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번역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기계는 가질 수 없는 풍요로운 정서와 상상력을 갖춘 번역 정도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더 인간다워지기로 했다. 그러자면 기계적으로 옮기던 습관에서 벗어나, 보이는 것 너머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더 키워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지금의 자리도 지키기 힘든 요즘 그렇게까지 해서 무슨 영화를 볼까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좋아하고 천직이라 믿어온 일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사라질지도 모를 운명에 한사코 저항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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